태평천국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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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북벌
시기
1853년 5월 8일 ~ 1855년 6월 8일
장소
중국 황하 이북
원인
태평천국의 영역 확대 시도
교전국
태평천국
청나라
지휘관
임봉상
이개방
길문원
주석곤
허종양
황익운
진사보
증립창
진일강

함풍제
승격림심
승보

결과
청나라의 승리, 태평천국의 패배
영향
태평천국의 주요 장수 및 정예병 상실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북벌의 시작
3.2. 황하를 건너야한다
3.3. 산서성으로
3.4. 직예성 진입
3.5. 사그라드는 기세
3.6. 탈출 시도
3.7. 지원군 출발
3.8. 지원군의 허망한 최후
3.9. 2차 지원군
3.10. 부성에서 탈출
3.11. 임봉상 사망
3.12. 이개방 사망



1. 개요[편집]


태평천국난징을 점령한 후 영역의 확대를 위해 벌인 일련의 군사 행동. 당시 기세가 최고조에 달해 있던 태평천국의 주요 장수와 정예병이 동원돼서 적의 수괴인 함풍제가 있는 베이징을 목표로해서 북벌을 시도했다.


2. 배경[편집]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한 후 약 10만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태평천국은 수도인 난징, 양저우, 전장 외의 영역은 없었기 때문에 거점의 확대가 최우선 목표였고 최종 목표는 청나라의 멸망이었다. 이 때 태평천국의 실질적 지도자인 양수청은 위의 두 가지 목표를 달성키 위하여 북벌과 서정을 동시에 기획했고 역량이 뛰어난 장수들을 다수 동원해서 진격을 명령했다.


3. 전개[편집]



3.1. 북벌의 시작[편집]


1853년 5월 8일, 임봉상(林鳳祥)을 대장으로 하고 이개방(李開芳), 길문원(吉文元)이 부장으로 임명된 북벌군 선봉이 양저우 근처의 포구[1]에 상륙한 후 북벌을 개시했다. 주석곤(朱錫琨), 허종양(許宗揚), 황익운(黃益芸)은 후속제대로 뒤따랐으며 북벌군의 총합계는 9군 22,500명 정도였다. 북벌군은 양수청의 명령에 따라서 성을 점령하는데 집중하지 않고 베이징을 목표로 해서 진격함을 명 받았다. 이들의 목표는 점령지의 확대가 아닌 오로지 지름길을 이용하여 톈진까지 도달한 후 후속 부대와 힘을 합쳐서 베이징을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청나라도 당할 수는 없으니 조치에 들어갔는데 청야전술의 계를 취했다. 북벌군이 접근해올 경우 비축한 식량과 화약을 소각하도록 해서 피폐해지도록 한 것. 각 고을의 수령들은 이 방식을 마뜩찮아 했지만 청나라는 특무군관들을 곳곳에 파견하여 이런 방식을 독촉했다. 또한 북상을 저지할 수 있도록 황하 곳곳의 도하 지점이나 요지의 방어를 강화하고 배들을 치우거나 불태우는 등 최대한의 방해 요소를 설치했다.

5월 14일, 임봉상이 이끄는 북벌군 선두부대는 포구에 도착한 후 3부대로 나뉘어 공격을 개시했다. 포구의 청군은 헤이룽장성 출신의 팔기군이었는데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못하고 절반 이상이 말을 버린 후 안후이성 추저우로 달아났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지만 추후 바로 문제가 생긴다.

주석곤, 허종양, 황익운이 이끄는 북벌군 후속제대는 임봉상이 이끄는 선두부대를 따라서 포구에 도착했지만 엉뚱한 곳으로 행군하여 5월 15일에 육합(六合)[2]으로 향했다. 당시 후속제대는 제대로 된 공성 장비가 부족하여 성을 강하게 공격하지 못하고 성밖에 숙영을 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 때 경솔하게 민가에 들어가서 밥을 짓던 중 청나라군이 몰래 매설한 화약이 폭발했다. 이 폭발의 여파로 화약고 역시 폭발했고 후속제대는 거의 궤멸했다. 결국 주석곤만이 일부의 군대를 이끌고 임봉상에게 가서 합류에 성공했고 허종양, 황익운은 난징으로 귀환했는데 오직 임소장이 이끄는 부대만 멀쩡했을 뿐 피해가 막심했다.

한편 서쪽의 안후이성 추저우를 목표로한 북벌군 선두부대는 5월 15일에 추저우성에 도착했는데 방어군 500명이 이미 도망친 뒤라 16일에 성을 무혈점령했다.

5월 17일, 북벌군은 회하를 건너기 위해 나루터에 도착했다. 이 근방을 지키던 청군은 일찌감치 도망을 치고 없었다. 18일, 태평군이 회하를 건너려고 할 때 청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격퇴되었다. 21일에는 구화산(九華山)에 있는 청군을 기습하였다.

청군은 점차 회하 양안쪽에 집결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이에 태평천국군은 이 지역을 떠나 강을 건너기 위해 저주로 돌아와 26일, 청류관(清流关)[3]에 도착했고 직후 군을 둘로 나눴다.

청류관에는 청군의 방어 기지가 있었고, 800명의 수비병이 있었다. 동쪽으로 간 북벌군은 청류관 수비군을 공격했고,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때부터 태평군의 숙적 승보(勝保)가 나타났다. 승보는 3천 명의 지린성 기마대를 이끌고 청류관 수비병과 힘을 합쳐 태평천국군을 공격했다. 태평천국군은 기세에 당황해 황급히 퇴각하느라 강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자도 많았다.

서쪽의 북벌군은 청류관에서 저지를 당했고, 동쪽의 군은 회하에 이르러 부교를 설치하고 도하를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이 곳에는 청군의 수비병 4000명이 일대에 흩어져서 봉양부(鳳陽府)[4]를 수비하며 북벌군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5월 28일, 동쪽 방면의 북벌군 1만 명은 청나라의 방어선을 뚫고 구화산 일대의 청군에 타격을 준 후 안후이성의 임회관(臨淮關)[5]과 봉양부를 함락시켰다. 한편 봉양부를 함락시킨 후 6월 6일에는 몽성현(蒙城県)[6]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지현 송유병을 참살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을 통해서 허난성으로 진출하는 길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직후 몽성에 모여서 휴식을 취하던 북벌군은 6월 9일, 박주(毫州)[7]를 함락시키고 허난성으로 진입했다.


3.2. 황하를 건너야한다[편집]


한편 북벌군이 허난성에 침입한 것을 안 청나라는 허난순무 육응곡(陸應谷)에게 명령하여 북벌군을 치도록 했다. 육응곡은 6월 11일에 병사를 이끌고 송가집(宋家集)[8]을 사수했는데 12일부터 13일까지 북벌군은 본격적으로 이들과 충돌했다. 육응곡의 분전으로 승부가 나지 않자 임개방은 황하 도하를 위하여 이들과 승부를 피하고 송가집에서 70리 떨어진 귀덕부(歸德府)[9]를 공격했다. 직후 임봉상이 부대 전체를 이끌고 귀덕부를 공격하자 육응곡 역시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귀덕부를 수비했다. 그리고 6월 15일에 임봉상은 양익포위 전술을 통해서 청나라 군 2000 여명을 참살했고 육응곡은 카이펑으로 도주했다.

귀덕부의 승리로 화약 2만근과 대포를 상당히 획득했으나 식량과 마초가 부족해졌다. 북벌군은 빠르게 황하를 건너기 위해서 6월 16일,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유가구(劉家口)[10]로 향했으나 청군이 이미 배를 거둬 북안에 정박시켰거나 전부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임봉상은 서쪽으로 우회하여 황하를 건널 지점을 찾기로 했는데 6월 18일에 영릉(寧陵)[11] 일대를 함락한후 20일에는 카이펑에 도착했다. 카이펑의 수비병력은 적었지만 해자가 깊게 파져 있어서 공성이 쉽지 않았고 큰 비로 인해 화약이 젖고 병에 걸린 자가 나와 카이펑 공격을 멈추게 됐다.

청나라 역시 원군을 보내니 선록(善祿)은 휴주(睢州)[12] 등에서 태평군의 후발대를 수색했고, 23일에 진류현(陳留縣)[13]에 도착했다. 서릉아(西凌阿)가 이끄는 원군은 24일에 카이펑에 도착했지만 이미 후퇴한 북벌군을 찾지 못했다.

한편 계속 서진한 북벌군은 진류현, 주선진(朱仙眞)[14], 중모(中牟)[15], 정주(鄭州)[16]를 지났다. 약 보름간 고생하던 북벌군은 공현(鞏縣)[17]을 지나 사수구(汜水口)[18]에서 간신히 강을 건넜는데 배가 적고 곧바로 청나라군이 추격해와서 약 3000 명은 강을 건너지 못했다.

임봉상은 7월 5일까지 황하 근처에서 식량을 모으면서 뒤처진 부대 3000 여명을 기다렸는데 합쳐지지 못하자 자신이 이끄는 부대만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했다. 남은 부대 3000 여명은 남쪽으로 돌아가 후베이성을 지나 안후이성으로 들어가 서정부대에 편입했다.

강을 건넌 임봉상은 7월 8일에 회경부(懷慶府)[19]를 북벌군의 기지로 만들고자 공격했지만 50 여일의 공격에도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두 차례의 큰 공성의 실패 및 성문 폭파를 위한 지뢰가 비로 인해 폭발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서릉아 등이 이끄는 4천 명의 병력이 7월 15일 황하를 건너 회경부에 도착하였고, 그밖에도 여러 부대가 집결했다. 그러나 이들은 북벌군의 기세에 눌려서 접근하지는 못했고, 대치만 지속됐다. 그러자 임봉상은 다시 한번 야간에 성밖에 참호를 파고 목성(木城)을 세워 방어시설을 강화한 뒤, 저수지의 물을 풀어서 청나라 지원군의 진지를 교란하였다.

곤경에 처한 청군은 7월 31일, 승보가 선두에 서서 북벌군을 공격했다. 이튿날 청군은 출격하여 양면에서 협공하는 태세를 취했다. 한달 간 청군과 북벌군은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8월 26일, 청군은 목성을 향해 공격했고 승보의 군사는 이 틈을 타 참호 안에 뛰어 들어 총탄을 퍼부었지만 임봉상은 이를 강력하게 저지했다. 청군은 비록 북벌군의 방어진지를 부수지는 못했지만, 이제 북벌군도 한계에 달했다. 임봉상은 회경부를 포기하고 9월 1일, 태평천국군을 이끌고 서남쪽의 제원(濟源)[20]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는데 이는 회경부의 동, 남, 북쪽 청나라군의 방어선이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북벌군은 서쪽으로 돌아서 북진을 서두르려 했지만 시간이 지체돼서 많은 물자를 소모하고 청나라에 대비 시간을 주고 있었다.


3.3. 산서성으로[편집]


9월 3일, 북벌군은 제원을 지나서 산서성의 입구인 천단산(天壇山)에 도착했다. 산서성의 포정사(布政使) 곽몽령은 태평천국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원곡현(垣曲縣)[21]의 지현인 안립(晏立)을 보내 수비하게 했다. 그러나 4일, 태평천국군은 신속하게 원곡현성을 공격했고, 수비병은 모두 달아났다. 안립은 지원군을 보냈지만, 태평천국군은 이마저 돌파하고 산서성으로 진입에 성공했다.

9월 7일, 북벌군은 원곡현에서 북상하여 강현(絳縣)[22]을 점령하고 지현을 살해했다. 그리고 곡옥현(曲沃県)[23]을 포위했다. 8일, 태평군은 곡옥현성을 격렬히 공격하여 점령했다. 9월 12일에는 평양(平陽)[24]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승보, 서릉아 등의 원군은 평양이 점령된 후 뒤늦게 도착하여 북벌군을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이에 북벌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기로 했는데 하나는 평양성 안으로 들어가서 청군의 주력을 견제하면서 추후 포위를 뚫고 합류하기로 했다. 나머지 부대는 평양 북부의 서산(西山)을 거쳐서 북진하여 홍동현(洪洞縣)[25]으로 향했다.

북진한 군대는 9월 14일에 홍동현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고 쫓아온 승보가 이끄는 4천명의 기마병과 대치했다. 한편 그동안 평양성에 남아 있던 부대는 승보가 이끄는 청군을 뺀 나머지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같은 14일에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청나라는 숫적 우위를 적극 활용했는데 특히 평양성 주위로 산서성의 청군들은 점점 모여서 남아 있는 태평천국군에 큰 위협이 됐다. 이에 남아있던 부대는 16일에 탈출을 도모했다. 평양성 안의 태평천국 부대는 성동격서의 방법을 취했는데 성의 북쪽을 공격하려는 태세를 취해 다른 곳의 방어가 취약하도록 만든 후 동쪽으로 신속히 나왔다. 이후 이 부대는 홍동현에서 임봉상이 지휘하는 주력과 합세에 성공했다. 이렇게 모든 부대가 결집하자 임봉상은 지체하지 않고 19일에 승보를 기습공격하여 길을 뚫은 후 동쪽인 둔류(屯留)[26] 방향으로 향했다.

둔류를 거친 북벌군은 심원(沁源)[27]을 점령한 후 잠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23일에 로안(潞安)[28]을 공격했는데 수비군이 모두 도망친 상태라 무혈점령에 성공했다.

당시 북벌군은 산서성에서는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기동전을 수행하며 기존의 목적에 충실했다. 또한 이곳에서 많은 지원병을 받아들여서 병력의 증강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앞으로 가는 길은 더더욱 험난해지고 있었다.


3.4. 직예성 진입[편집]


다시 진격을 시작한 북벌군은 타이항 산맥을 거쳐서 서현(涉縣)[29]을 지났고 기세를 올려서 한단의 임명관(臨洺關)[30]를 함락시켰다. 북벌군이 직예성에 들어와서 한단까지 점령하자 베이징의 민심이 크게 동요해서 3만 가구가 도망칠 정도였다. 함풍제계엄령을 선포하고 황숙[31] 혜친왕(惠親王) 면유(綿愉)[32]를 대장군으로, 커얼친(科爾沁) 군왕(郡王) 승격림심을 참찬대신으로 임명해서 요격을 준비했다. 이 때 계엄령과 민심의 동요로 인해 식량 및 땔감의 사재기가 극심하여 쌀과 진주, 땔감이 목서와 가격이 비슷할 정도였다.

한편 북벌군은 우안(武安)[33]을 지난 후 다시 동북쪽으로 진격하여 사허(沙河)[34]를 점령했고 곧이어 순덕부(順徳府)[35]를 공격했다. 순덕부의 수비병이 성벽을 방패삼아 대포를 쏘며 격렬히 저항하자 북벌군은 공성을 포기한 후 동북쪽의 런현(任縣)[36]으로 갔고 10월 1일에 함락시켰다.

임현을 함락한 후 2일에는 당산(唐山)[37]에 이르렀고 융평(隆平)[38]을 공격했다. 그리고 4일에는 자오주(趙州)[39]를 기습 공격했고 수비병의 도주로 쉽게 점령에 성공했다.

북벌군이 거침없이 직예를 휩쓸자 직례총독(直隷總督) 계량(桂良)은 호타하(滹沱河)의 배를 치우고 순찰과 경계를 강화시켰다. 만약 북벌군이 호타하를 도하하는데 성공한다면 베이징 근처의 바오딩톈진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청나라는 승보에게도 요격을 지시했는데 승보는 아직 직예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북벌군은 자오에서 북진해서 루안첸(欒城)[40]를 점령했고 큰 길을 통해서 호타하를 건너려 했지만 가오청(藁城)[41] 근처의 야하포(野河鋪)에서 청나라 지방군을 만나서 도하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에 북벌군은 가오청을 점령한 후 도하할 때를 기다렸다.

이 때 승보는 전력질주 하여 직예성에 진입했고 북벌군과 맞섰는데 승부가 나지 않자 북벌군은 가오청 안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이 때 청나라의 서릉아 역시 도착하여 가오청의 포위를 강화했다.

가오청의 북쪽에는 호타하가 흘렀고 청나라가 모든 선박을 북안으로 치워서 도하가 어려웠는데 태평천국에 동조하는 주민들이 대나무를 갖다줘서 북벌군은 강을 건널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10월 7일에 북벌군은 대나무를 가공해 부교를 만들었고 주력군은 나머지 부대의 엄호하에서 강을 건넜고 청군이 눈치채고 왔을 때는 모든 군이 도하를 끝낸 상황이었다.

강을 건넌 북벌군은 8일에 진저우(晋州)[42]를 함락시켰고 동진해서 9일에는 선저우(深州)[43]를 점령했다. 이는 북벌군이 직예성의 남부 한복판에 들어와 휘젓고 있으며 바오딩톈진이 지척이라는 것이었다.

함풍제승격림심에게 2000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바오딩으로 내려가도록 했는데 평소 승격림심은 승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베이징에 머물면서 승보에게 책임을 넘겼다. 결국 승보가 선저우로 가는동안 서릉아가 북벌군을 상대했는데 오히려 선저우 서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결국 승보는 선록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선저우에 와서 서릉아와 합류했고 주변의 청나라군도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북벌군은 포위 당하고 있었다. 이에 임봉상은 16일에 탈출을 시도했으나 승보, 선록, 서릉아가 이끄는 병력에게 심주의 서북쪽에서 공격당해 우선 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승보의 병력이 충분치 않아 북벌군은 공성에 대한 위협을 겪지는 않았지만 청나라군은 점차 늘어나서 6000명까지 성밖에 모이고 있었다.

임봉상은 19일 밤에 기습으로 청나라군을 무찌르고 북상하려 했으나 오히려 승보가 미리 대비를 해둔 탓에 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북벌군이 다시 몇 일간을 지체하는 동안 청나라군의 숫자는 불어나기 시작했고 20일 경에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북벌군이 성밖의 풀숲에 둔 매복병 및 북문의 대포에 걸려서 싸움은 해질녘까지 지지부진했다. 결국 승보는 병사를 거둬서 돌아가는데 오히려 임봉상이 남문으로 나와 승보를 공격하여 청군 1000 여명이 사망했고 사기가 떨어졌다. 기세를 탄 북벌군은 22일에 성의 포위를 뚫었는데 허를 찔러서 바로 북진하지 않고 동쪽으로 향했다. 북벌군은 창저우(滄州)[44]로 가서 시안현(献県)[45]을 점령했다

뒤이어 징하이(靜海)[46] 방향으로 진격한 북벌군은 두리우(獨留)[47]를 점령하고 더욱 진격하여 양리우친(楊柳青)[48]까지 함락시켰다.

북벌군의 규모는 기존의 2만에서 4만까지 늘어나 징하이와 두리우에나뉘어 주둔하여 톈진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선봉대는 톈진에서 5km 정도 떨어진 교외의소직구촌(稍直口村)[49]에서 공격을 준비했다.


3.5. 사그라드는 기세[편집]


북벌군이 톈진까지 육박하자 청나라는 승격림심과 승보에게 엄명을 내려 북벌군을 요격토록 했다. 여기에 호응하여 승격림심은 궁저우(琢州)[50]에서 기마병을 이끌고 왔고 승보는 바오딩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달려왔다.

지원군이 오는 사이에 북벌군은 톈진을 맹공했지만 청나라군의 저항으로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임봉상은 공성을 강화했지만 오히려 톈진의 청군은 남쪽 운하를 개방해서 홍수를 만들어 북벌군의 침투를 차단했다.

그리고 10월 29일, 승보는 징하이현성에서 5리 떨어진 곳에서 진영을 차리고 원군이 더 오기를 기다렸다. 30일에 선록, 서릉아 등이 도착했다. 그날 승보는 군대를 둘로 나눠 진공하였고, 태평군도 동남쪽을 향해 병사를 나눠 대적했지만 승부는 나지않았다. 하지만 승격림심의 군대가 오고 있었기에 북벌군은 갈수록 위기였다.

결국 11월 1일, 임봉상은 청군의 원군이 아직 다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고 징하이현성의 남문을 나갔고 승보도 두리우감하(独流减河)를 건너 북벌군과 대결했다. 그러나 승보는 이기지 못했고 보급의 문제로 군의 사기가 낮았기 때문에 함풍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임봉상 역시 추위와 보급으로 고생하고 있기에 청나라 군 역시 보급의 위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에서 방어로만 일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승격림심 및 다른 지원군들이 도착하여 북벌군은 숫적으로 열세에 놓였다.

11월 4일, 승보를 포함한 청군의 주력부대는 톈진 부근에 모였고 리앙왕좡(良王庄)[51]과 왕칭퉈(王慶坨)[52] 에 큰 진영을 설치한 후 북벌군을 앞뒤로 포위했다.

11월 7일, 큰 싸움이 벌어졌으나 승패가 나지는 않았고 북벌군은 독류로 물러났다. 청군은 기세를 타고 양리우친으로으로 전진했다. 양리우친에 있던 임봉상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고 후퇴를 시작했는데 연기를 피우면서 시야를 가린 후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징하이와 두리우로 군사를 물린 후 지키기 시작했는데 임봉상 본인은 만 여명을 이끌고 징하이를 사수하고 이개방은 주력 3만을 이끌고 두리우를 지키며 기각지세를 이루기로 했다.

약 1개월간 대치 상태가 이어졌는데 불리해진 것은 장강 이남 출신이 대부분이라 추위에 약한 북벌군이었다. 청군은 12월 2일 밤에 두리우를 기습했지만 이개방 및 이하 부대의 침착한 사격으로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한편 징하이를 지키는 임봉상은 승보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근처 제방의 물을 터뜨려서 한동안 승보를 붙잡아 놨다. 이에 승보는 백성을 동원해 근처 강의 상류에 제방을 쌓고 동남쪽 한 면을 제외한 정해를 수몰시키려 했다.

제방의 건축이 지지부진하자 12월 12일에 승보는 독류를 공격했는데 임봉상이 정해의 동남쪽으로 나와 청나라군의 뒤를 치고 이개방이 출성하여 정면을 공격하니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한편 12월 23일, 독류의 서북쪽은 얼음이 두텁게 얼었는데 이개방은 청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방어를 소홀히 했다. 청군은 기회를 잡았다 여기고 서북쪽을 집중 공격했다. 그런데 이 공격으로 청군의 남쪽 방면이 약해졌고 이개방은 주력을 이끌고 동남쪽으로 나와 청군의 남쪽 방면에 대포와 화기 사격을 퍼부었다. 승보는 기회를 잡았다고 여기며 서북쪽을 공격하는 중이었는데 오히려 이개방은 겉으로만 수비를 허술히 했을뿐 실제로는 서북면의 수비를 강화시켜 놓아서 승보는 포위에 걸려서 패하고 말았다.

서북쪽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정해의 동남쪽으로 나온 이개방은 남쪽의 제방을 통해서 청군을 공격 중이었는데 싸우다가 못 이기는척 후퇴하니 청군은 승기를 잡았다 여겨 급히 추격했다. 그리고 추격하던 청군은 이개방이 준비한 매복에 걸려서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다수의 장교들이 전사했다.

당시 청군은 지휘관인 승격림심과 승보의 불화가 심해서 북벌군의 기세와 역량을 당해내지 못했다. 승보는 흠차대신의 자리에 있어서 전권을 받았기에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몽골 하르친(喀喇沁) 도로이 기윤왕(多羅郡王)[53]승격림심귀족 출신이라 자존심이 대단했기에 승보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성격이 불 같아 화합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북벌군은 큰 승리에도 불구하고 진격이나 후퇴를 하지 않고 방어만 일관했기에 전국의 변화는 가져 올 수 없었고 오히려 청나라의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갈수록 열세에 처하게 됐다. 그나마 승보와 승격림심의 불화로 청나라 군대의 작전이 통일되지 않아 방어가 성공적인 것이 다행이었다.


3.6. 탈출 시도[편집]


정해와 독류의 공격이 쉽지 않자 승보는 지원군을 불러오고 정해와 독류 사이의 교통선 및 연락선을 끊기로 결정했다. 우선 승보는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 숭은(崇恩)이 이끄는 2000명의 지원군을 염산현(塩山県)[54]에서 정해로 합류토록 명령했다. 그리고 임봉상과 이개방이 정해와 독류에 나눠서 주둔하는 이상 점령하기는 어렵다고 여겨 연결을 끊기 위해 정해와 독류 사이에 대규모 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임봉상과 이개방은 이 공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줄기차게 공격했으나 약 2만여 명의 군대를 가진 승보는 숫적 우위를 살려서 공사를 이어나갔고 1854년 1월 14일에 진지를 완성시켰다. 그러자 독류에 주둔하던 북벌군 수천 명이 3갈래로 나뉘어 공격을 퍼부었고 정해에 머물던 군사들도 나와서 협공했지만 공격은 실패했다. 뒤이어 1월 15일에는 독류의 북벌군이 야습을 했지만 격퇴당했다. 북벌군은 보급의 부족과 추위 그리고 새로운 청나라군의 진지에서 시작되는 포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2월 초까지 북벌군은 탈출을 위하여 승보를 공격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또한 승격림심이 왕가구(王家口)[55]에서 청나라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뒤이어 계량 역시 정해의 서남쪽으로 와서 진을 치면서 북벌군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많은 시도 끝에 2월 5일 밤, 북벌군은 깊은 어둠을 틈타서 승보를 따돌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신속한 후퇴를 위하여 경무장을 한 북벌군은 2월 6일에 자아진(子牙镇)[56]에 도착했고 뒤이어 7일에는 속성진(束城鎭)[57]까지 후퇴했고 성으로 들어가서 방어를 시작했다. 일부 북벌군은 성밖에 진을 쳐서 청나라군을 견제했다. 한편 승격림심은 북벌군을 지속적으로 추격하여 8일에 속성진에 이르렀지만 대포가 없어서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포위만을 계속했다.

2월 10일에는 승보를 포함한 지휘관들이 도착했고 포위는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12일, 북벌군은 성의 서쪽을 공격하여 포위를 풀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자 임봉상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병력을 6, 7개의 유격대로 개편했다. 당시 속성 근처는 수풀과 촌락이 우거져 있어서 식량을 제공받기 쉬웠고 게릴라 활동에 알맞았다. 임봉상은 지리적 특성을 살려서 근처 촌락에 유격대 형식으로 흩어져 진군하다가 기회를 틈타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승보와 승격림심은 속성진 근처 30리 안쪽 마을에 명령을 내려서 식량을 거둬들이고 15일에 총공격을 했다. 하지만 북벌군이 촌락에 숨어서 저격을 하며 맞섰고 청나라군 역시 대포가 500개 정도 밖에 없어서 큰 성과는 없었다.

2월 23일, 승격림심이 공격했으나 북벌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승격림심은 서릉아를 성 앞에서 대기시킨 후 자신이 직접 마을 안에 들어가 수색했고, 승보는 서남쪽과 동북쪽에 병사를 나눠 공격했다. 승격림심이 마을에 들어갔을 때 임봉상은 포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또한 동시에 동서쪽 마을에 숨어 있던 북벌군이 뛰어나와 1천 명 가량이 청나라군의 정면에 총탄을 퍼부었다. 청나라군은 대패하여 물러났고 기세를 틈탄 북벌군의 공격에 청나라군의 본진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큰 승리에도 불구하고 북벌군은 청나라의 포위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고 속성진을 점령한지 1개월이 흘러 3월 초까지 포위됐다. 약 1개월 간의 전투로 나무로 만든 방책을 포함한 성의 방어시설은 거의 수명을 다했고 인근의 촌락도 크기가 작아 식량 공급의 한계도 닥치고 있었다. 임봉상과 이개방은 며칠 이내로 성을 버리고 퇴각하기로 결정했고 때마침 3월 7일에 큰 눈이 내리자 포위망의 동남쪽을 뚫고 후퇴했다.

동남쪽으로 향하던 북벌군은 돌연 방향을 서남쪽으로 바꿨고 자아하(子牙河)[58]쪽으로 갔다. 이곳에서 근처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부교를 설치한 후 무사히 도하하는데 성공했고 부교는 부쉈다. 그 후 신속히 진군하여 청나라군이 자아하 부근에 도착했을 무렵 북벌군은 헌현(獻縣)[59]으로 들어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격림심, 승보, 달홍아(達洪阿)가 성을 포위했는데 달홍아가 서문을 공격하면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그러자 임봉상은 달홍아가 공격한 당일 밤 성의 남문을 열고 나가서 포위를 뚫고 후퇴했다. 청나라군은 후퇴하는 북벌군을 선녀교(善女橋)[60] 부근에서 따라잡았고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임봉상은 부장역(富莊驛)[61]에 복병을 둬서 반격에 성공한 후 남쪽으로 신속히 후퇴하여 부성(阜城)[62]에 도착한 후 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병사들을 거지난민으로 위장한 후 탈출시켜 남경으로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부성(阜城)은 북경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여전히 적의 수도권하북성의 경내였고 추운 날씨와 행군, 보급의 부족으로 북벌군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또한 부성에 도착한 이후 후퇴하지 않고 2개월 간 원군을 기다리면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3.7. 지원군 출발[편집]


북벌군이 고전하고 있던 1854년 2월, 양수청은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홍수전처남인 뇌한영(賴漢英)에게 명령하여 지원군을 조직하도록 했다. 뇌한영의 지시로 조성된 지원군은 증립창(曾立昌)이 사령관, 진사보(陳仕保), 허종양(許宗揚)이 부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양주, 천경, 안휘성에서 뽑아온 장병 약 1만명이 소속됐다. 당시 태평천국증국번을 상대로 호북성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천경 역시 포위 상태였기에 더 많은 군을 지원군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1854년 2월 6일, 지원군은 안경에서 출발하여 신속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북벌군과 마찬가지로 성의 함락이 아닌 신속한 북상이었다. 앞선 북벌군 및 안휘성 내의 태평천국군의 활약으로 지원군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2월 21일에 정양관(正陽關)[63]을 함락시켰다.

3월 1일에는 몽성현(蒙城県)까지 진출했는데 당시 산둥성, 안휘성, 강소성염군이 날뛰어 청나라가 신경 쓰는 사이에 지원군은 신속하게 갈 수 있었다. 몽성현에 도착한 지원군은 부교를 설치하여 회하의 지류인 과하(渦河)를 건너려 했는데 청나라군이 부교를 부숴서 건널 수 없었다. 결국 우회를 결정한 증립창은 서북쪽으로 돌아서 3월 6일에 영성(永城)[64]을 함락시키고 하남성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황하를 도하할 곳을 찾아 헤매던 지원군은 3월 14일, 번룡집(蹯龍集)[65]에서 간신히 황하를 건넜는데 3천명 정도의 병사는 청나라의 공격으로 강을 건너지 못했다. 낙오한 일부는 청나라 지방군과의 전투를 거쳐 남하하여 정양관으로 돌아왔다.

증립창은 속도를 높여서 3월 17일에는 풍현(豊縣)[66][67]을 점령했고 주위에 있는 다수의 청군을 격파했다.

당연히 청나라 역시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는데 특히 산동순무 장량기(張亮基)는 끈질기게 지원군에게 달라붙어서 공격을 해왔다. 그러자 증립창은 신속한 기동을 위하여 군대를 둘로 나눴는데 하나는 화산진(华山镇)[68]을 거쳐서 대운하를 따라 북상했고 다른 하나는 양산집(梁山集)[69]을 거쳐서 수장현(壽張縣)[70]으로 향했다.

두 갈래로 나뉜 군은 3월 25일에 수장현에서 합류했고 27일에는 수 천명의 기병을 삼분하여 동창(東昌)[71]를 공격했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양곡현(陽穀県)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산둥성에 머무르던 청나라의 선록(善祿)은 거느린 군사가 30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맞서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뒤이어 29일, 지원군은 신속하게 관현(冠縣)[72]으로 이동하여 비어있던 성을 쉽게 점령했다. 또 일부 병력을 나누어 청하현(清河縣)[73]으로 진출하여 하북성 진입에 성공했다.


3.8. 지원군의 허망한 최후[편집]


한편 산동순무 장량기(張亮基)는 이런 북벌 지원군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었는데 당시 산둥성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 태평천국과 호응했고 증립창이 이끄는 지원군은 방어가 취약한 곳을 집중하여 공략했기 때문이었다.

증립창은 관현에서 신속하게 북상하여 임봉상과 회합하기로 결정했는데 다음 목표는 임청(臨淸)[74]으로 삼았다. 당시 임청은 황하의 지류와 산동성 내의 육로가 만나는 곳으로 물산이 풍부했기에 보급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임봉상과 예하 북벌군이 포위된 부성까지는 160km 밖에 떨어지지 않아 며칠이면 도달 가능한 지척이었다.

장량기는 이 소식을 듣고 휘하 부대 2000명 중 1000명을 이끌고 임청으로 가서 방어를 시작했다. 3월 30일에 증립창이 이끄는 지원군은 임청에 도착했고 장량기 및 임청의 수비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3월 31일, 지원군은 임청의 서남쪽에 진영을 차리고 4천 여명의 군대를 동, 서로 나뉘어 몇 차례 공격을 했지만 성의 수비가 단단해 점령할 수 없었다. 단, 성 밖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포위를 굳히는데는 성공했다. 당시 증립창이 이끄는 본진은 임청 성 남문 밖의 마을을 거점으로 삼아서 주둔했고 임청의 동, 서, 남 삼면의 목책을 쌓고 총포를 설치하여 단단히 포위했다.

한편 임청이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함풍제는 부성을 포위하고 있던 승보에게 지원을 명했다. 이에 응해 승보는 7천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남하하여 4월 1일에 임청에서 약 80km 거리인 정가구(鄭家口)[75]에 도착했다.

4월 2일과 4일에 지원군은 다시 한 번 임청에 지뢰공성 병기를 동원하여 총공격을 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오히려 장량기와 승보는 군을 출격시켜서 지원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지원군은 보급 문제로 곤란에 처하게 됐다. 당시 중요한 것은 신속한 북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 보급을 해결하기 위하여 임청에 발이 묶이게 된 증립창은 임청 공격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4월 10일에 승보가 임청 성에 들어왔는데 그는 증립창이 임청의 동북과 서북에 보루를 세우고 그 사이에 주력군을 뒀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11일에 성의 서북쪽 미타사(彌陀寺)에 있는 태평천국의 군영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근처의 참호에도 상당한 피해를 안겼다.

다급해진 증립창은 12일에 총공격령을 내렸고 기어이 성의 서문과 서남쪽 성벽을 파괴하여 진입에 성공했다. 승보는 미타사에서 지원군을 보내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해낼 수 없어 도주했고 성은 점령됐다.

하지만 북벌 지원군은 상처뿐인 승리만을 거뒀는데 황하에서 임청까지 보름만에 온 반면 임청에서 무려 12일을 허비하면서 신속한 북상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청나라가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게 됐다. 또한 국지적인 승리와는 반대로 기대했던 보급은 성의 함락 직전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됐고 남은 것은 빈 성 뿐이었던 것이다. 또한 부성에 있던 북벌군은 피동적으로 지원을 기다렸을뿐 탈출이나 협공을 하지 않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임청에서 머무르던 지원군은 16일에 성의 서편에 부교를 설치하고 야간에 행군하려 했으나 청나라가 부교에 불을 질러서 실패했다. 18일에 다시 성의 서남쪽에 부교를 설치했지만 다시 청군이 불을 질러버렸다. 그러자 군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면서 통제가 어지러워졌는데 특히 새로 가입한 항복병, 도적 및 유민, 안휘성 염군 출신들이 문제였다. 이들은 태평천국의 교리를 믿어서가 아닌 이득에 따라서 움직이는 무리라서 충성심이 깊지 않았고 통제가 극히 어려워서 군율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기존 태평천국 출신은 전체 군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증립창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야간에 성의 서남쪽 포위망을 뚫고 해하(海河)의 지류인 위하(衛河)를 건너서 북상하고자 했다. 승보는 이것을 알아차리고 흑룡강성몽골 출신의 기마병을 위주로 매복을 준비했고 18일 새벽에 강을 건널 준비를 하던 지원군을 타격했다. 이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원군은 성 안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4월 20일 밤, 승보는 다시 출병하여 성 외곽을 공격하였고 증립창은 이를 간신히 막아냈다. 그리고 증립창은 300명의 기마병을 도하하게 하여, 다시 청군이 오면 협공하려고 했다.

4월 22일, 승보는 병사를 셋으로 나누어 공격하였는데 한밤 중이었기 때문에 지원군은 청군이 가까이 올 때 까지 몰랐다. 청군은 강을 건너 보루 주변에 도착하고는 맹공격을 가했다. 10여 곳의 보루에 불이 붙었고,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 판단한 증립창은 남쪽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2000 여명의 기마대가 남문을 나와서 화기를 동원하여 먼저 길을 뚫었고 뒤이어 증립창이 이끄는 본대 역시 남쪽으로 퇴각했다.

한편 청나라군은 북벌 지원군이 성을 포기하고 나갔음을 나흘이 지난 26일에 알아차렸고 곧바로 성을 점령한 후 신속히 쫓아와서 싸움을 벌였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28일에는 청수진(清水镇)[76]에서 퇴각하던 북벌 지원군은 다시 한 번 전투를 벌였지만 패했다.

한편 청나라군은 기세를 높여서 쫓아갔지만 누적된 피로와 승리로 인해 방심했고 이에 북벌 지원군은 반격하여 29일에 진사보는 정예병 1000명을 동원해 화포를 통한 화공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는 크게 승리하여 청나라군의 진영이 크게 불타고 병사와 군마들이 도망쳐서 북벌 지원군은 한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러자 증립창은 청요(清妖)[77]를 쫓아 죽이면서 방해 없이 부성(阜城)으로 가겠다. 그러면 역전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병사들에게 북진을 제의했다. 하지만 북벌 지원군의 3분의 2를 차지하던 염군, 도적, 항복병 등은 이를 반대했고 또한 부사령관인 허종양과 진사보는 신병 통제의 어려움을 들어서 역시 반대했다. 거기에 더해 진사보는 독단적으로 정예병을 이끌고 남하하는 등 군은 분열되고 있었다. 증립창은 별 수 없이 퇴각을 결정했는데 퇴각 역시 신속치 못하고 그간의 피로로 인하여 30일에는 쉴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군은 새로운 부대를 배치하여 압박을 계속했다.

5월 3일, 북벌 지원군은 관현(冠县), 양산집(梁山集), 거야현(巨野县)[78]을 거쳐 풍현(豊縣)에 도착했는데 그 사이 기간동안 추격해온 청나라군에게 연달아 패하면서 최악을 향해 가고 있었다. 북벌 지원군은 풍현 성 외곽에 목책을 세우고 사격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5월 5일에 승보는 병사를 나눠서 사면에서 풍현을 공격했고 목책이 불타면서 성은 함락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증립창은 이경(二更)[79] 쯤 군을 이끌고 성의 동쪽으로 나왔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후퇴하는 북벌 지원군의 앞에는 황하의 만구지하(漫口支河)[80][81]가 펼쳐져 있었다.

이 때 강물이 급격히 불어나서 신속한 도강은 어려웠고 병사들은 허우적 거리며 말 위에 올라타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 때 증립창은 허종양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후방을 끊어서 퇴각을 도왔다. 그리고 쫓아온 청나라군과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증립창은 죽기살기로 싸우다가 황하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7500명의 군대는 물에 빠져 죽거나 진흙탕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청군에 의해 사망했다. 남은 병사 2300여 명만이 허종양의 인솔하에 남경으로 돌아갔다.

한편 증립창에게 반발하며 단독으로 남하하던 진사보는 순조롭게 내려가고 있었다. 진사보가 거느린 부대는 전투 경험이 많은 1000 여명의 정예병이라 별 탈 없이 한 차례의 전투만을 거쳐서 황하를 건넜다. 진사보는 안휘성 경내로 진입하여 태평천국의 서정군에 합류하려 했고 봉태현(鳳臺縣)[82]에 도착했다. 이 때 봉태현의 단련(團練)[83] 무장수령(武裝首領)[84]인 왕은수(王恩綬)가 태평천국에 가담하겠다면서 편지를 보내 전구집(展沟集)[85]으로 진사보를 초대했다. 진사보는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전투력이 높고 별 탈 없이 남하하는데 성공하여 방심에 차서 초대에 응했고 왕은수가 사는 마을에 들어가서 고기를 먹고 곡식을 거둬들였다.

진사보가 술에 취한 것을 본 왕은수는 미리 마을 밖에 매복시킨 단련 소속 병사들에게 공격을 명했고 기습을 받은 진사보는 옷도 걸치지 못하고 병사의 손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진사보의 부하 1000 여명 중 300명 정도만이 포위를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북벌 지원군은 처음의 기세는 좋았으나 한 곳에 발이 묶이면서 동력을 상실했고 구성원들의 불화 및 의견의 불일치로 스스로 자멸하면서 북벌군의 지원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3.9. 2차 지원군[편집]


한편 북벌 지원군이 궤멸당한 것을 안 양수청은 2차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사령관으로 진일강이 임명됐다.
1853년 부터 장강을 따라 서정(西征)에 서정에 나선 석달개를 대신하여 안경에 주둔하던 진일강은 1854년 5월에 연왕(燕王)으로 임명된 후[86] 신속하게 지원군을 조성하여 북진을 시작했다.

진일강은 5월에 남경을 출발하여 무난히 북진하면서 수 만의 지원병을 얻어 군세를 불렸고 봉양부(鳳陽府), 여주(庐州)[87]를 거쳤고 1854년 6월 17일에 서성(舒城) 양가점(杨家店)[88]에 도착했다.

양가점(杨家店) 수비 장수인 진정삼(秦定三)은 120근의 칼을 다룬다고 알려진 맹장이었으며 이전에도 태평천국군과의 전투를 치른 베테랑이라 쉽게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또한 서성 인근의 단련(團練) 2만 명이 지원군으로 서성에서 함께 맞섰기에 진일강은 11일 간의 혈전을 치렀다. 청나라군은 1,200 여명을 잃었으나 진일강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결국 28일에 서성으로 물러났다. 29일에 서성의 태평군은 출격하여 수비대장 장수모(张遂谋)가 병사를 이끌고 청군 파총(把总) 오대춘(吴大椿)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지주(池州)[89]로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지원군은 태평천국의 초기 간부인 진일강이 지휘하는 등 성공할 요인이 충분했으나 실패의 원인은 작게는 청나라 장수 진정삼의 분투였고 크게 보자면 정치 싸움이 원인이었다.

태평천국 초기 수의팔왕(首义八王)[90] 중 가장 권력싸움에 매진하던 양수청은 살아 있던 왕들을 크게 견제했는데 진일강을 북벌원정군으로 보낸 것은 표면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얻고 북벌군을 구원하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를 다른 왕들과 떨어뜨려 놓는 것도 있었다.

양수청은 석달개안경에 주둔하면서 인심을 얻자 서정군 지원 명목으로 멀리 원정을 보냈고 그 자리를 진일강이 대체하도록 했는데 진일강 역시 인심을 얻자 홍수전위창휘와 결탁하는 것을 막고자 북벌에 참여시킨 것이었다.

진일강 역시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고 서성을 공략하면서 시간이 낭비되자 북진하는데 청나라 병사가 너무 많아서 쉽지 않다는 말을 하면서 주저 없이 남하해 버린 것이었다.


3.10. 부성에서 탈출[편집]


한편 1854년 3월, 북벌군은 부성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성을 고수하고 있었다. 3월 중순, 승보와 승격림심은 3만까지 불어난 청군을 이끌고 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부도통 달홍아가 부상으로 인해 전사했다.

3월 23일, 승격림심은 서문을, 승보는 동문을 공격하고 기마대를 동북쪽으로 보내어 공격했는데, 북벌군의 길문원이 앞장을 서서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때 청병이 쏜 총이 길문원에게 세 발 명중되어 낙마하여 전사했다.

3월 31일에는 승보가 북벌지원군을 저지하기 위해 7,000 명을 이끌고 산둥성 경내로 이동하여 북벌군은 부담을 덜었지만 단독으로 지휘권을 잡은 승격림심대포, 땅굴, 지뢰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 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4월 내내 북벌군은 기회를 포착하여 성의 포위를 뚫으려 애썻고 출성하여 공세를 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4월 말부터 기상 상태가 악화되면서 성밖에는 모래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임봉상은 이 때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돌파를 궁리했다. 청군 역시 순찰을 강화했고 4월 30일 야간에 시도된 북벌군의 탈출 시도는 대포지뢰로 인하여 저지됐다.

승격림심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참호를 성밖에 길게 파서 포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북벌군은 전력을 동원하여 포위를 약간 뚫는데 성공했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동쪽으로 간 북벌군은 민간의 나무를 구해와서 부교를 만들어서 장위신하(漳卫新河)의 지류인 남운하(南运河)를 건넜고 연진(連鎭)[91]을 점령했다.


3.11. 임봉상 사망[편집]


북벌군은 연진으로 이동했지만 도중에 주석곤이 전사했고 청군은 곧바로 추격하여 연진을 포위했다. 한편 이개방은 630명의 기병을 이끌고 연진 남쪽의 포위망을 뚫고 천여명의 병력을 증원했고 북벌지원군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그들이 궤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서 고당(高唐)[92]으로 가서 그곳을 점령했다.

한편 승보는 군사를 이끌고 고당으로 가서 이개방을 포위했고 승격림심은 연진에 있는 임봉상을 포위했다.

승격림심은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후연진의 사방으로 참호를 파고 폭 약 6m, 높이 약 4.5m, 두께 약 2.7m 정도의 토성 역시 만들었다. 토성 위에는 대포와 진지를 설치했는데 한 진지당 군사 10명을 배치하여 물샐 틈 없는 포위망을 만들었다.

연진에 있는 임봉상은 군사 6700명을 독려하면서 맞섰지만 포위로 인하여 연말에는 식량이 거의 다 떨어져서 콩으로 연명할 수 밖에 없었으며 3000명 정도의 북벌군이 청군에 항복했다. 그리고 사기가 떨어진 북벌군은 1855년 4월 3일, 연진의 서쪽방면을 포기하고 동쪽방면으로 이동했고 목성을 두껍게 쌓아 방어했다.

위기에 처한 임봉상은 4일에 청나라 현령 출신인 부하 소봉산(蕭鳳山)과 90여 명을 승격림심에게 위장항복 시킨 후 자신이 이끈 본대가 출격할 때 내응토록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이 발각당해 소봉산과 병사 90여 명의 부하는 처형당했다.

승격림심은 4월 22일에 총공격을 퍼부었다. 청군의 서릉아는 북쪽을 맡아 공격을 개시했고 서창(瑞昌)은 남운하의 서쪽 방향에서 부터 공격해가며 포위망을 좁혔다. 우선 청군은 목성에 화력을 집중하여 방어 시설을 부쉈고 숫적 우위를 살려 총포를 퍼부으면서북벌군을 압도했다.

몇 개월간의 포위로 식량이 부족하여 무기를 들 힘도 없을 정도인 북벌군은 이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고 임봉상은 독전 중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목성이 부서진 후 북벌군은 결사항전 했으나 대다수는 전투 중 사망했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거나 도주했다. 임봉상은 땅굴에 숨어 있다가 잡힌 후 북경으로 압송됐다. 이후 4월 30일, 임봉상은 능지형으로 처형당했고 연진의 북벌군은 전멸당했다.


3.12. 이개방 사망[편집]


고당의 이개방은 같은 시간, 승보의 공격을 받아 분전하고 있었다. 고당으로 내려가면서 북벌지원군의 궤멸을 알아차린 그는 임봉상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함께 남쪽으로 퇴각하고자 했는데 편지를 가진 자가 청군에 체포되면서 임봉상과의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개방은 식량이 풍부하고 성벽이 높은 고당에서 한동안 청군과 대치를 결정했다. 그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서쪽 성벽에 베로 줄사다리를 만들어 걸고 남문의 지하에 땅굴을 팠다. 그리고 나머지 문에는 흙과 나무로 보루를 만들고 작은 구멍만을 하나씩 둬서 통행로로 삼았다. 또한 성 밖에 울타리를 둘렀다.

한편 승보는 사이가 좋지 않던 승격림심이 성공적으로 연진을 공략하는 것을 보고 고당 공격을 서둘렀지만 크게 고전하고 있었다. 특히 1854년 5월 10일 이후부터 이개방은 야음을 틈타서 성문을 열고 기습 공격을 지속적으로 했고 승보가 이끄는 청군은 번번히 패하면서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6월 초 선록이 병사를 이끌고 승보에게 합류했지만 오히려 6월 7일에 승보의 주력인 길림성 출신의 기마대가 크게 패하여 흩어지고 이개방이 이끄는 북벌군의 기세에 밀려서 성의 서쪽부터 서남쪽 까지의 병력이 소탕당하여 본진까지 위협 받았다.

이에 승보는 20개의 운제를 만든 후 군을 4로로 나눠서 6월 10일부터 고당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개방은 청군이 근접할 때까지 기다린 후 사격명령을 내렸고 적잖은 청군이 사살당했다. 이에 청군 역시 죽기살기로 운제(雲梯)[93]를 타고 가서 성벽을 올랐지만 이번에는 이개방이 운제 쪽에 화력이 집중하여 많은 청나라 군사가 사망했고 운제와 민가가 불탔다.

그러자 승보는 고당의 동북쪽에 포대를 설치하고 공격했으나 북벌군은 성 내의 땅굴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밤에 나와 성벽을 보수했다. 대포가 먹히지 않자 승보는 16일에 다시 병사를 나눠서 공격했으나 수십 명의 병사만 잃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6월 25일, 여공차(呂公車)[94]을 만들어서 승보는 반격에 나섰지만 고당성이 높고 또한 낮고 습한 지대에 위치하여 여공차가 수렁에 빠져 써먹지도 못했다. 오히려 야간을 틈탄 북벌군의 반격에 300여 명의 병력과 팔기군 소속의 맹장인 탁극통아(托克通阿)가 전사했다. 승보가 급보를 듣고 오기 전 북벌군은 이미 북쪽 포대를 공격하였고, 시위(侍衛) 공옥(恭鈺)과 갈대평(葛大平) 등을 살해했다. 북벌군은 연이어 서, 남쪽을 공격하여 청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풀리지 않는 공격에 분노한 승보는 6월 25일에 청군과 새로 모집한 지방군을 이끌고 4면에 걸쳐 공격했지만 뜻대로 되지 못했다. 북벌군은 이제 1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랜 전투를 거쳐 숙련된 병사가 되어 있었다. 25일 전투로 인해 청군은 200여 명이 전사하였고, 지휘관도 전사했다.

승보는 6월 27일, 28일에 다시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했다.

이 때, 임봉상은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내 이개방에게 연진으로 돌아와 함께 남쪽으로 퇴각하자고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이개방은 이 편지를 받지 못했고, 쌍방은 모두 자기 자리에서 원군을 기다리기만 했다. 병사를 나누어서 청군을 서로 견제할 때는 좋았지만, 전세가 기울자 이 조치는 자충수가 되었다.

고당에서의 전투는 한여름을 지나서도 계속되었다. 10월 26일, 승보는 다시 3로로 병사를 보내 공격했다. 북벌군은 총탄을 쏟아붓고, 동시에 동, 서 양쪽의 대포를 동북쪽으로 옮겨와서 연속 포격을 했다. 청군은 큰 피해를 입어 감히 북벌군의 진지 안으로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승보는 성밖에 굴을 파고 화약을 매설하여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했는데, 서남풍이 갑자기 불어와 연기가 날렸고, 청군은 연기 때문에 전진할 수 없었다. 청군은 간신히 일부 성벽을 파괴했지만 북벌군은 크고 작은 나무를 모아 갈라진 틈을 매웠다.

그러자 함풍제는 분노에 차서 “몇 개월 이래 아무 진전이 없다니, 무능한 녀석”이라며 승보를 꾸짖었다.

강하게 꾸짖은 후 함풍제는 원병 2천 명을 승보에게 더해줬다.

12월 14일, 이개방은 남북 양로로 나누어 청군 진영을 기습공격했고, 16, 17일에도 야습을 감행했다.

1855년 1월 7일, 서남풍이 크게 불자 승보는 서문으로 가서 지뢰를 매설하려 하다가 북벌군 백여 명이 나와 쫒아내었다.

승보는 고당을 함락시키기는 커녕 북벌군이 성밖으로 30번 정도 나와 공격하는 동안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진이 함락된 후 1855년 3월 11일에 함풍제는 성과를 내지 못한 승보를 질책하여 북경으로 송환하여 귀양 보냈고 승격림심을 지휘관으로 삼았다.

승격림심은 정예병 8000명을 이끌고 고당에 도착했으며 즉각 병력을 20000명까지 충원했다.

이개방은 승격림심이 도착한 것을 보고 연진의 임봉상 부대가 전멸한 사실을 알아챘고 포위망을 뚫어 탈출 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포로에게서 이개방이 남쪽으로 탈출을 도모한다는 사실을 자백 받은 승격림심은 3월 17일 밤에 남쪽의 포위망을 느슨하게 했다. 이개방은 자정 무렵 5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동문을 나와 말을 탄 후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제녕(濟寧)[95]을 거쳐서 풍현(豊縣)[96]으로 간 후 황하를 건너 천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18일 새벽, 고당에서 남쪽으로 4, 50리 정도 떨어진 치평현(茌平縣) 풍관둔(溤官屯)[97]까지 이개방은 도달했지만 승격림심은 500명의 기마대를 이끌고 곧바로 추격했다.

승격림심은 주력인 기병을 이끌고 우선 풍관둔을 포위한 후 보병을 동원하여 숫적 우위를 확보한 후 대포를 동원해서 폭격을 가해서 대다수의 민가를 무너뜨렸다.

그러자 이개방은 궁여지책으로 풍관둔에 참호를 원 모양으로 세 바퀴를 판 후 참호들을 연결시켜 청군이 접근하면 사격을 하도록 하여 수비했다. 또한 참호 밖에도 작은 구멍을 뚫어서 적을 관찰하거나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참호 때문에 적잖은 병사를 잃은 승격림심은 4월 19일부터 제방을 만들면서 풍관둔에서 100리 정도 떨어진 한하(汉河) 운하의 물을 끌여들여서 수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개방은 서남쪽 방향의 청군 포대를 향해서 땅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북벌군은 4월 23일에 서남쪽의 포위망을 향해 돌격하여 돌파를 시도하는 척했고 청군이 반격을 하자 패배한척 척하며 신속하게 후퇴했다. 한 차례의 승리를 거둔 청군은 서남쪽의 방비가 철저하여 북벌군이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서 방비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벌군은 다음날인 24일에 땅굴을 완성시킨 후 지뢰를 매설하여 포대 주변의 참호벽을 무너뜨린 후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이 날의 전투로 청군은 상당 수가 사망하거나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북벌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승격림심이 포대 밖에 만들어 놓은 참호를 메우기 시작했는데 승격림심도 보고를 받고 즉각 병사를 이끌고 달려와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승격림심은 숫적 우위를 살려서 북벌군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적잖은 대포와 군기(軍器)를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함풍제가 군기대신을 통해 "병용의 사상이 심하고 포위를 잃어 정형이 이와 같다, ……만 여 병용으로 수 백의 역적을 포위해 온갖 계모로 경영했으면서 지금까지 파악 못 하고 있으니 짐의 마음이 몹시 애타도다(甚至伤亡兵勇,遗失炮位,似此情形,……以万馀兵勇,围数百之贼,百计经营,迄无把握,朕心宝深焦灼)"라고 할 정도로 청군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전과였다.

결국 승격림심은 직접적인 전투 대신 수공에 공을 들였고 결국 4월 28일에 물을 끌여들여서 북벌군의 진지를 향해서 방류했다. 이 물로 인하여 북벌군 참호의 높은 곳에는 물이 서너 자, 낮은 곳은 5, 6척까지 물이 찼고 참호 속의 식량과 화학 절반이 물에 젖어서 쓸모가 없어졌다.

또한 29일에는 북벌군이 서북쪽의 청군 포대 인근에 매설한 지뢰와 화약포대, 화약통이 물에 휩쓸려 갔다. 또한 포대 인근의 땅은 모두 물에 젖어서 화약을 통해 폭파시킬 수도 없었다.

5월 14일 이후부터는 물 때문에 참호를 건너기도 힘들었지만 북벌군은 끝까지 군기를 유지하면서 밤새 청군의 남북 방향 포대를 향해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병력의 차이로 인하여 실패했다.

승격림심은 5월 26일부터 항복을 권했는데 27일에는 150명 정도의 북벌군이 항복하는 등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이개방은 달아나기 위하여 위장 항복을 도모했다. 우선 심복이자 선봉장인 황근문(黄近文) 및 140명의 병사들에게 진지 밖으로 나가서 청군에게 위장 항복토록 했다. 승격림심은 이개방이 거짓 항복을 하려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후 우선 항복한 140명을 작은 배로 이동시켰다.

6월 8일, 아침부터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고 모래까지 날려서 방향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이개방은 이 때를 기회라 보고 승격림심에게 거짓 항복 문서를 보냈다.

승격림심은 이개방에게 우선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이개방은 병사 100여 명과 함께 중무장한채로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해온 후 무장해제를 실시하는 척 했다. 이개방은 승격림심이 황근문과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들여 방비하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고 강풍과 모래로 인해 해가 가려지고 황근문이 바깥에서 호응토록 지시하여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승격림심은 이미 이개방의 수를 파악한지 오래였고 황근문과 여하 장병들을 미리 죽여놓은 후였다. 승격림심은 이개방이 병사들과 도주를 시도하자 기마대를 보내서 좌우익을 포위했고 이개방은 부하인 황의단(黃懿端), 사금생(谢金生), 이천우(李天佑), 담유계(谭有桂), 위명부(韦名傅), 조득상(曹得相)과 함께 잡혔고 북경으로 호송됐다. 나머지 북벌군 100 여명은 사살당했다.

이개방은 북경까지 호송되는 동안 식사를 거부하는 등 끝까지 완강했고 6월 11일에 능지형으로 처형당했으며 고당의 북벌군 역시 전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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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난징 푸커우구[2] 현재 난징 루허구[3] 현재 안후이성 추저우시에서 서쪽으로 12.5km 떨어진 관산(關山)의 중간에 위치한 칭리우관(清流关). 남쪽으로는 장강, 북쪽으로는 회수에 접했고 난징으로 통하는 북쪽의 요지였다.[4] 현재 안후이성 추저우시 펑양현(鳳陽県)[5] 현재 안후이성 추저우시 펑양현(鳳陽県) 린화이관진(臨淮関鎮)[6] 현재 안후이성 보저우시 멍청현(蒙城県)[7] 현재 안후이성 보저우시[8] 현재 허난성 주마뎬(駐馬店)시 비양현(泌阳县) 동남. 쑹자장댐(宋家場水庫)이 위치하고 있다.[9] 현재 허난성 상추[10] 현재 허난성 상추 리앙유안구(梁園区) 리우커우진(劉口镇)[11] 현재 허난성 상추 닝링현(寧陵県)[12] 현재 허난성 상푸 쑤이현(睢县)[13] 현재 허난성 카이펑 샹푸구(祥符区) 천리우진(陳留鎮)[14] 현재 허난성 카이펑 샹푸구(祥符区) 주셴진(朱仙眞)[15] 현재 허난성 정저우(鄭州)시 쭝머우현(中牟県)[16] 현재 허난성 정저우(鄭州)시[17] 현재 허난성 정저우(鄭州)시의 현급시인 궁이(鞏義)시[18] 현재 허난성 정저우(鄭州)시의 현급시인 싱양(滎陽)시 쓰수이진(汜水镇). 사수(汜水)가 본류인 황하와 합쳐지는 곳[19] 현재 허난성 친양(沁阳)시[20] 현재 허난성 지유안(濟源)시. 허난성의 최북단이며 산서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21] 현재 산서성 윈청(運城)시 위안취현(垣曲縣)[22] 현재 산서성 윈청(運城)시 장현(絳縣)[23] 현재 산서성 린펀시 취워현[24] 현재 산서성 린펀[25] 현재 산시성(산서성) 린펀시 훙둥현(洪洞縣)[26] 현재 산서성 창지(长治)시 툰리우구(屯留区)[27] 현재 산서성 창지(长治)시 친위안현(沁源縣)[28] 현재 산서성 창지(长治)시 루청구(潞城区)[29] 허베이성 한단 서현(涉縣)[30] 현재 한단 융녠구(永年区)[31] 황제숙부.[32] 가경제의 다섯째 아들.[33] 현재 허베이성 우안(武安)시[34] 현재 후베이성 사허(沙河)시[35] 현재 하북성 싱타이[36] 현재 싱타이 런현(任縣)[37] 현재 싱타이 야오샨현(尧山县)[38] 현재 싱타이 룽야오현(隆尧县)[39] 현재 스자좡 자오현(趙縣)[40] 현재 스자좡 루안첸구(欒城区)[41] 현재 스자좡 가오청구(藁城区)[42] 현재 스자좡의 지급시인 진저우(晋州)시[43] 현재 헝수이(衡水)시의 지급시인 선저우(深州)시[44] 현재 허베이성 창저우(滄州)시[45] 현재 허베이성 창저우(滄州)시 시안현(献県)[46] 현재 톈진 징하이구(静海区)[47] 현재 톈진 징하이구(静海区) 두리우진(独流鎮)[48] 현재 톈진 시칭구(西青区) 양리우친진(楊柳青鎮)[49] 톈진 시칭구(西青区) 중베이진(中北鎮) 다샤오지커우촌(大稍直口村)[50] 현재 바오딩의 지급시인 궁저우(琢州)시[51] 현재 톈진 리앙왕좡향(良王庄乡)[52] 현재 톈진 우칭구(武清区) 왕칭퉈진(王庆坨镇)[53] 만주족의 귀족 작위 중 2번째로 높은 자리[54] 하북성 창저우(滄州)시 얀샨현(塩山県)[55] 현재 톈진 징하이구(静海区) 왕커우진(王口镇)[56] 현재 톈진 징하이구(静海区) 지야진(子牙镇)[57] 현재 하북성 창저우(滄州)시의 현급시인 허젠(河间)시 슈청진(束城镇)[58] 현재 쯔야하(子牙河). 태행산맥 동쪽에서 한단으로 흐르는 부양하(滏陽河)와 산서성의 오대산(五臺山) 북부에서 흐르는 호타하(滹沱河)가 합쳐져서 톈진 쪽으로 흐르는 강이다.[59] 현재 하북성 창저우(滄州)시 셴현(献県)[60] 현재 하북성 창저우(滄州)시의 현급시인 보터우시(泊頭市) 푸젠진(富鎮鎮)에 흐르는 노염하(老塩河)에 있었던 다리. 선녀교를 건너면 푸젠진으로 진입이 가능했다.[61] 현재 하북성 창저우(滄州)시의 현급시인 보터우시(泊頭市) 푸젠진(富鎮鎮)[62] 현재 하북성 헝수이(衡水)시 푸청현(阜城県)[63] 현재 안휘성 화이난 쇼우현(寿县) 서부에 있는 정양구안진(正陽關镇)에 있는 고성. 회하 및 회하의 최대 지류인 영하(颍河)와 다른 2개의 지류가 합쳐지는 중요한 곳이었다.[64] 현재 하남성 상추의 현급 시인 융청(永城)시[65] 현재 하남성 카이펑 룽팅구(竜亭区)[66] 현재 강소성 쉬저우 펑현(丰县)[67] 당시에는 황하가 현재보다 남쪽을 향해 흐르고 있어서 풍현 역시 황하 이북에 속했다.[68] 현재 강소성 쉬저우 펑현(丰县) 화샨진(华山镇)[69] 현재 산둥성 지닝 리앙샨현(梁山県)[70] 1964년까지 산둥성, 하남성에 걸쳐 있었던 현. 지금은 분리돼서 황하의 배수하천인 진디하(金堤河) 이북은 산둥성 랴오청(聊城)시 양구현(陽穀県)에 속하며 이남은 하남성 푸양(濮阳)시 타이첸현(台前县)에 속한다.[71] 현재 산둥성 랴오청(聊城)시 둥창푸구(东昌府区)[72] 현재 산둥성 랴오청(聊城)시 구안현(冠県)[73] 현재 하북성 싱타이 칭허현(清河縣). 수호전의 등장인물인 무송의 고향이며 소설 금병매의 배경이다.[74] 현재 산둥성 랴오청(聊城)시의 현급 시인 린칭(臨淸)시[75] 현재 하북성 헝수이(衡水)시 구청현(故城県) 정커우진(郑口镇)[76] 현재 산둥성 랴오청(聊城)시 구안현(冠県) 칭수이진(清水镇)[77] 청나라 요괴라는 멸칭. 태평천국은 적대세력에 요(妖)라는 한자를 붙여서 멸칭으로 칭했다.[78] 현재 산둥성 허쩌(菏泽)시 쥐예현(巨野县)[79] 밤 9시 ~ 11시[80] 만구(漫口)는 부숴진 제방이라는 뜻이고 지하(支河)는 지류라는 뜻. 즉 부숴진 제방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류였다.[81] 당시 황하는 지금보다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82] 현재 강소성 화이난 펑타이현(鳳臺縣)[83] 청나라의 지방 민병대 조직[84] 단련(團練)의 지휘관[85] 현재 안휘성 보저우(亳州)시 리신현(利辛县) 잔거우진(展沟镇). 당시에는 펑타이현(鳳臺縣) 소속이었다.[86] 진일강은 북벌군 지원에 자신이 없었는데 홍수전양수청은 북벌군을 구원하여 연경(燕京)을 얻으면 그곳이 진일강의 영토가 될 것이라면서 격려하여 연왕의 직위를 내렸다.[87] 현재 안휘성 허페이[88] 현재 안휘성 루안(六安) 슈청현(舒城县) 보린향(柏林乡) 양디안촌(杨店村)[89] 현재 안휘성 츠저우(池州) 시[90] 태평천국 초기 간부들 중 공이 커서 가장 먼저 왕에 오른 홍수전, 양수청, 소조귀, 풍운산, 위창휘, 석달개, 진일강, 호이황[91] 현재 창저우 둥광현(東光県) 리안젠진(連鎭鎭)[92] 현재 산둥성 랴오청 가오탕현(高唐県)[93] 공성무기의 일종으로 접이식 사다리를 부착한 수레[94] 공성탑의 일종으로 총 5층으로 구성돼서 성벽과 높이가 비슷했다.[95] 현재 산둥성 지닝[96] 현재 강소성 쉬저우 펑현(丰县)[97] 현재 산둥성 랴오청 츠핑구(茌平区) 펑구안툰진(冯官屯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