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국번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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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증국번(曾國藩)[1][병음]
출생
1811년 11월 26일 청나라 후난성 창사
사망
1872년 3월 12일 청나라 장쑤성 난징
본명
증자성(曾子城)

백함(伯函)

척생(滌生)
시호
문정(文正)
군사 경력
군복무 : 청나라
복무기간 : 1853년 ~ 1872년
소속 : 상군
참전 :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 톈진 교안
역임 지위
양강총독 1860년 ~ 1868년, 1870년 ~ 1872년
직례총독 1868년 ~ 1870년

1. 개요
2. 생애
2.1. 태평천국의 난
2.2. 말년
3. 여담



1. 개요[편집]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군인-학자이다. 호남성(후난성) 출신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의병대장이며, 같은 호남성 출신 의병대장인 좌종당,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이홍장등과 함께 양무운동을 추진했다.

'중국'번이 아니라 '증'국번이다.


2. 생애[편집]


후난성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머리가 너무 안 좋았다고 한다. 한 일화로, 밤을 새서 한 문장을 외우고 있었는데 도둑이 공부하던 증국번 때문에 숨어 있었다가 밤을 새도 한문장을 외우지 못하는 증국번이 답답해서 뺨을 때리고 그런 머리로 공부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나왔다. 그러나 증국번은 열심히 공부해 여러 단계를 통과하는 과거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진사[2]에 임용되었다. 조선의 과거도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지만, 청나라는 그보다 인구가 20배가 넘게 많기 때문에 대단한 학식이 없으면 이렇게 과거에 급제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과거급제자의 경력코스이자 일종의 관립 학술기관인 한림원[3]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좀 더 갈고 닦았다. 이때 성리학에 대한 여러편의 논문을 남겼는데, 이 글들은 학문적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후의 캉유웨이와 함께 공양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증국번은 학자로서도 무시못할 업적을 남겼다.

이후 예부 우시랑에 제수되어으나, 1849년 모친이 별세하자 3년상을 지내려 고향에 돌아갔다.


2.1. 태평천국의 난[편집]


3년상을 지내는 도중, 1850년에 봉기한 태평천국이 세력을 뻗어 강남을 휩쓸게 되자,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보았던 함풍제의 어명을 받고 곧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때 제자인 이홍장뿐만 아니라 호남성에서 초야에 묻혀있던 좌종당을 발탁하여 지휘관으로 삼았다.

그가 모집한 의병은 상군(湘軍)이라고 하는데, 湘은 호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호남군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리하여 영어권 자료에서는 Hunan army라고도 표기 된다. 어쨌든 그는 한족에게 군권을 주는 것을 꺼리는 만주족 고위 관리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태평군을 상대로 맞서싸운 공로로 양강총독 겸 강남 지역 군 통솔권을 가진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태평천국 토벌을 이끌게 된다. 이들의 일부는 이후 상계군벌로 이어졌다.

또한 그는 제자인 이홍장에게 안휘성으로 가서 회군(淮軍)을 조직하도록 했다. 회(淮) 또한 안휘성을 가는 한자이다. 어쨌든 상군과 회군은 거의 쓸모 없어진 청나라의 관군인 팔기군 대신 태평천국의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태평천국의 본거지인 남경을 함락하였다. 이후 대륙에서 일어난 반청운동인 염군(捻軍)의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을 진압하여 구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단순한 수구파는 아니었고, 세금을 덜고 탐관오리를 척결하여 민생의 어려움을 개선하려는 등, 정치의 쇄신을 적극 주장했다. 즉 증국번은 타락한 수구가 아닌 온건 보수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이후 천하를 두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던 장제스마오쩌둥조차도 모두 증국번을 존경했다고 한다.

  • 1853년 1월: 호남성 장사에서 상군 육군 조직.
  • 10월: 형주(衡州, 현 헝양시)에서 상군 해군 조직.
  • 1854년 2월: 스승이자 호광총독(湖廣總督)인 오문용호북성 도성(堵城, 현 황강시 황저우구 두청진)에서 황주(현 황저우구) 수복 지원을 요청했지만, 증국전은 장사에서 유리하게 싸우기 위해 가지 않고, 오문용은 전사한다.[4]
  • 4월: 악주(현 어저우시)와 상음(현 웨양시 샹인현)을 점령하고 온 태평군을 격퇴시키지만, 한양(漢陽, 현 우한시 한양구)의 지원을 받은 태평군이 악주를 재점령하고 정항(靖港, 현 창사시 왕청구 징강진)으로 쳐들어오자 싸우지만, 대패하고 강물에 뛰어든다. 그러나 구출된 뒤에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상군 기지를 격파하러 태평군이 상담(현 샹탄시)으로 쳐들어 왔지만, 탑제포가 이를 격퇴해, 태평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2.2. 말년[편집]


태평천국이 진압된 후, 구질서하에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체제를 강화하려는 양무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동치제 중후반에는 청나라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이를 "동치중흥"이라고 한다. (물론 양무운동의 성과는 청불전쟁-청일전쟁 이후 쇠락했고, 청나라는 더 막장화되지만..) 한편 증국번의 상군과 회군은 이홍장이 건설한 북양군의 주축이 되며, 북양군의 지휘관들은 신해혁명 후에 민국 초반을 주름잡는 군벌이 된다. 북양군의 해군인 북양함대는 나중에 동아시아 최대의 함대가 된다. 물론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인해 중화민국에 망하게 된 뒤 북양함대뿐 아니라 북양군 자체도 쇠락해졌지만 말이다.

증국번은 몰락한 팔기군을 대신하여 청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집단이었던 상군과 회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고, 이렇게 군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한족 부하들에게 황제위에 오르라는 부추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당시 청 조정의 실권은 이미 증국번을 위시한 한족 세력에 넘어가 있었다. 증국번이 태평전쟁 진압을 지휘하면서 발탁한 각 성의 순무와 총독(주로 남중국 지역)으로 있었던 터라 이들의 반란가담은 최소한 양쯔강 이남지방에 한해서 한족 왕조가 세워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허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청조의 충신으로 남았다. 비유하자면 본인이 가진 군사력으로 청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지만, 조조 대신 제갈공명의 길을 걸어서 끝까지 청조의 충직한 신하로 남았다.

사실 아무리 부하 총독들이 가담한다 한들 거의다 군벌화가 완료된 상태이기에 언제든지 배신하고 청에 붙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거사의 기반이 될 강남 지역은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졌고 향용의 학살 행위 때문에 민심은 바닥을 찍어 이런 상태에서 거병을 한다면 삼번의 난 시즌 2를 찍을 판이었다. 더욱이 베이징에서 2차 아편전쟁을 치르던 서양 세력들이 남쪽에선 청을 도와 태평천국과 싸우는 것을 본 증국번으로써는 도저히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또한 본인이 유교경전을 뼈속까지 공부해야 급제할 수 있는 과거를 통과해 올라온 정통 성리학자였고, 청조에 반기를 드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제갈량처럼 야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설령 청 황실이 태평천국의 난이 성공할 것을 우려하거나 증국번을 미래의 반역자로 의심한 나머지 증국번을 비롯한 친청 성향 한족들을 중원에 놔둔 채 같은 만주족들만 데리고 만주로 도망쳐 망명왕조를 세운 후 중원 재정복을 보류하거나 완전히 포기하여 결국 태평천국 멸망 후 증국번이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가 된다 해도, 증국번은 본인이 칭제하여 새로운 중화제국을 세우기보다는, 공식적으로는 중국 왕조로서의 청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본인은 섭정자나 왕 칭호를 쓰고 자기 아들에게도 칭제하지 말고 자신의 섭정자 자리나 왕위를 그대로 이어받을 것을 당부하여 '증씨 정권'을 세우는 정도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5] 실제로 대만 정씨 왕조가 황제 칭호를 쓰지 않고 왕 칭호를 쓴 것도 명나라 주씨 왕조의 부흥을 위해서였다. 물론 변수에 따라서는 증국번의 후손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를 섭정자나 왕에서 황제로 격상시키고 조상인 증국번을 황제로 추존했을[6] 가능성도 있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1872년 양강총독 재직중 홍수전의 이전 거처인 남경에서 사망하였다. 1870년에 양강총독으로 갓 부임한 마신이가 장문상의 칼에 찔려 죽는 사건이 생기고 마신이가 죽은 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증국번이 양강총독으로 재부임하여 사건을 마무리한다. 살인자인 장문상은 능지형을 받고 죽게 되었으나 민심은 어수선했다. 양강총독 마신이 살해 사건은 자마(刺馬)사건이라 부르며 청나라말의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 여러 편의 영화(자마, 명장(영화) 등)로도 만들어진다. 직예총독의 자리에서 양강총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급히 마신이 사건을 수습한 증국번은 1872년에 사망하고 만다.


3. 여담[편집]


태평천국의 공격으로부터 청나라를 구해낸 명장이고 대국을 보는 안목이나 전략적 능력에서 당대 중국 제일의 군략가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면 반드시 진다는 희한한 징크스를 가진 인물이다. 전투를 지휘할 때의 상대가 석달개이수성 같은 태평천국 최고의 군략가들이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징크스는 본인도 대단히 신경쓰였는지 태평천국운동 최후의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남경공략전에는 자신이 지휘를 맡지 않고 동생 증국전(曾國荃)이 총지휘를 맡게 된다.

증국번과 그 동생 증국전, 그리고 호남인이 주축이 된 상군은 반란진압 후에 가담여부를 불문하고 현지 주민을 처형하는 청나라의 전통에 근거하여, 태평천국의 난 진압후 "포로" (태평천국군도 포함되었지만 실제로는 상당수가 양민들) 들을 모두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수는 20-30만에 달한다고 추정되고 있으며[7], 그리하여 현재도 남경의 호남성 출신에 대한 인식은 100년후 비슷한 규모의 학살을 저지른 일본만큼이나 나쁘다.

증자의 70대손이다.

아들 증기택(1839-1890)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청나라의 고위 외교관으로 일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공사를 역임하였고, 야쿱 벡의 난의 와중에서 러시아와의 일리조약을 개정하여 잃었던 영토를 조금 찾아오기도 했다. 증기택은 불평등 조약의 개선에 힘썻지만 이 당시는 청나라는 반식민지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전속 요리사가 은퇴하면서 후임 요리사에게 '매운 고춧가루만 뿌리면 어떤 음식이든 좋아하시니 고춧가루만 준비하면 된다.'고 당부했다는 기록이 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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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체자로는 曾国藩[병음] Zēng Guófān, 쩡궈판[2] 조선의 진사와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 조선에서 진사는 향시에 합격한 대과응시자격이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진사는 중국 전체에서 수십명 안에 드는 수재 중에 수재였다. 즉, 조선과 비교하자면 조선의 진사와 달리 한 단계 시험(회시)을 더 통과해서 임금 앞에서 최종 순위를 가리는 전시에 올라있는 급이라고 봐야한다. 또한 중국의 진사는 일개 성을 대표하는 급의 수재였으며 벼슬에 임용되지 않더라도 진사라는 신분 자체로 지방 행정에 관여할 수 있었다.[3] 조선으로 치면 집현전이나 규장각 정도의 위치이다.[4] 다만 호북순무(湖北巡撫) 숭륜의 책임이 컸다. 오문용을 견제한 나머지, 군수물자도 지원 안해주고 핍박해 강제로 나가게 했다.[5] 이 경우 조선인들은 청 황실이 중원 지배를 포기하고 만주로 도망친 것을 병자호란의 업보로 여기며 기뻐하다가 이내 청나라가 공식적으로는 중원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증국번이 스스로를 '대청국 섭정자(혹은 왕)'로 칭하여 중국에 공식적으로 '대청국'이라는 국명을 쓰는 증씨 정권이 세워짐)을 알게 된 후 허탈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6] 이 경우 증국번은 태조라는 묘호를 얻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나라의 충신이었던 증국번 본인의 입장에서는 고인드립이나 다름없겠지만...[7]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의 인구가 100만이었는데, 전란이후 인구조사에서 50만으로 준 것에 근거.[8] 출처: 공자의 식탁, 장징 저, 박해순 역, 뿌리와이파리[9] 호남성 사람들의 특징이다. 동향인인 마오쩌둥도 매끼니 식탁에 고추를 놓을 정도로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