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1세 다르마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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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 1세 다르마냐크
Jean Ier d'Armagnac
생몰년도
1306년경 ~ 1373년 5월 16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아르마냐크
사망지
프랑스 왕국 보몽 드 로마뉴
아버지
베르나르드 6세 다르마냐크
어머니
로데즈의 세실리아
누이
마르타, 이자벨
배우자
고스의 렌느, 클레르몽의 베아트리스
자녀
장 2세, 베르나르드, 잔, 마르타
직위
로데즈와 아르마냐크 백작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로데즈와 아르마냐크 백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 후 흑태자 에드워드를 섬겼지만, 에드워드가 카스티야 원정을 치르면서 생긴 막대한 빚을 만회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에 반발해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를 따랐다.


2. 생애[편집]


1306년경 아르마냐크와 페장삭 백작 베르나르드 6세와 로데즈 여백작 세실리아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마르타[1], 이자벨[2]이 있었다. 1313년 어머니 세실리아가 사망한 뒤 로데즈 영지를 상속받았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아버지 베르나르드 6세가 섭정을 맡았다. 1319년 베르나르드 6세가 사망했을 때 13살이었던 그는 친삼촌이자 리바우르의 주교였던 로저의 섭정을 받았다.

그 후 성인이 되어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그는 푸아 백작 가스통 2세와 베른 자작령을 사이에 두고 분쟁을 벌였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였다. 이 분쟁은 1329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인 필리페 3세의 중재로 겨우 마무리되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로데즈 백국의 소유권을 놓고 어머니 세실리아의 이복누이이자 로제의 큰 딸인 이자벨과 분쟁을 치렀다. 1325년 첫 아내 고스의 렌느가 사망한 뒤 아내가 가지고 있던 로마뉴와 도비야르 자작령을 물려받았다. 이로 인해 아내의 숙모의 아들인 뒤포르의 베르나르드와 분쟁을 벌였다.

1328년 필리프 6세플란데런 백국 반란 진압 원정에 참여해 카셀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다. 1330년 이후 영지 경영을 삼촌 로저에게 맡기고 이탈리아로 가서 기벨린구엘프 사이의 전쟁에 참여했다. 133년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와 함께 페라라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적의 기습 공격으로 생포된 뒤 이듬해에 2만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원정을 치르는 것을 돕고자 6,000명의 병력을 제공했다. 1338년 7월 라 레올에서 열린 삼부회에 참석했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부터 가스코뉴와 랑그도크의 중위에 선임되었다. 그해 11월 프랑스군이 펜다제네 성을 포위 공격했을 때 1,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 결과 도시는 항복했지만 성채 수비대는 굴복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일전에 그와 분쟁을 벌였던 푸아 백작 가스통 2세가 아두르 계곡과 랜디스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원정을 벌였다. 이로 인해 아르마냐크 영지가 위협받자,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1339년 공식적으로는 푸아 백국에 속해 있던 미라몽트생사크 마을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두 사람간의 분쟁이 벌어지자, 필리프 6세가 개입해 그 마을을 공식적으로 왕의 관리하에 두기로 했다. 이에 프랑스 국왕을 따르는 것에 회의감을 느낀 그는 1340년 월 필리프 6세의 원정에 동행하면서, 처남인 에지 백작 베르나르드 4세에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자신에게 몽트리올, 메진, 콩돔 등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그를 따를 의향이 있으니 접촉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이들 중 메진만 공략했고,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의 협상이 잘 되지 않자 필리프 6세를 계속 따르기로 했다.

1340년 6월 24일, 에드워드 3세가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괴멸시키고 플란데런 백국에 상륙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투르네 요새로 진군할 준비에 착수하자, 필리프 6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병력을 소집했다. 이때 장 1세 역시 소집 명력을 받고 북쪽으로 이동해 왕과 합류했다. 이때 에드워드 3세는 로베르 다르투아에게 10,000명에서 15,000명 가량의 플란데런인과 1,0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을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여 슈보시( 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고, 프랑스와 플란데런 국경지대의 중요한 도시인 생오메르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로베르가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에드워드 본인은 플란데런에서 본군을 이끌고 투르네를 공략하기로 했다.

하지만 로베르와 에드워드가 병력을 규합하는데 시일을 지체하면서 중간에 정보가 샜고, 필리프 6세는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 휘하 1,000명을 생오메르로 파견했고, 7일 후 장 1세 휘하의 또다른 병력을 생오메르에 파견했다. 오도 4세와 장 1세는 생오메르에 로베르보다 먼저 도착한 뒤 대부분의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도시 외곽 건물들을 파괴하고 성벽을 강화하는 등 방위 준비를 신속하게 수행했다. 한편 로베르는 주민들이 자신과 에드워드 3세의 대의에 호응해 대거 가담할 거라 여기고 천천히 진군했지만, 그가 생오메르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는 뜻밖의 전개에 당황하면서도 행군을 이어가 1330년 7월 25일 생오메르의 인근 마을인 아르케스를 철저히 파괴한 뒤 셍 오메르 동쪽 외곽 평원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얼마 후, 필리프 6세가 이끄는 본군이 자신들의 후미를 쫓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로베르와 플란데런 장군들은 공성전을 벌이려 했다가는 성안의 수비대와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에 협공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닫고, 적을 성밖으로 끌어내어 섬멸해 승부를 빨리 내기로 했다. 그들은 생오메르 성 앞에 군대를 배치했다. 잉글랜드 장궁병과 브뤼헤, 이프르 출신 플란데런인들을 중앙에 배치했고, 페르네스 등지의 병사들을 좌익에 배치했으며, 베르겐 등지에서 온 병사들을 우익에 배치했다. 그 외의 플란데런 지역에서 온 민병대는 예비군으로서 숙영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오도 4세와 장 1세는 며칠만 기다리면 왕이 온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성밖으로 나가서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전의가 끓어오른 나머지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도시 밖으로 나와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 좌익을 공격했다. 이들은 곧 격퇴되었지만, 연합군은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가 도시 바로 앞까지 이르렀다. 이에 후퇴하던 기사들이 반전하여 맞서 싸웠고, 오후 내내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오도 4세와 장 1세는 성벽 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다가 연합군이 아군 기사들을 추격하느라 군대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을 보고, 각각 기병 400명을 파견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했다.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는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던 연합군 좌익을 공격해 적 대열에 구멍을 뚫었다. 플란데런인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패주하자, 아르마냐크의 부하들은 적 숙영지까지 추격했다. 그들은 무질서한 예비군을 공격해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반면 부르고뉴 백작 오도 4세의 기병대는 연합군의 신속하게 반격을 가하고 화살비를 퍼붓자 곧 압도당했다. 연합군 중앙과 우익 부대는 본진이 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적 기병들을 물리쳐서 도시 방향으로 패주시킨 뒤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생오메르 북부 교외 지역을 침공했다.

생오메르 주민들은 적이 밀려오자 민병대를 결성하여 항전했고, 로베르는 이들을 쉽사리 압도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전열을 가다듬은 수비대가 반격했고, 양자는 성문 바로 앞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자 로베르는 숙영지로 철수했고, 장 1세 역시 철수했다. 그들은 도중에 조우하여 몇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지만 어둠이 완전히 깔리자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로베르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8,000명에 달하는 플란데런인들이 죽거나 도주했고 숙영지가 초토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신속하게 운반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남겨둔 채 퇴각하여 에드워드3세와 합류했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쫓지 않았다.

생오메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그는 필리프 6세의 지시에 따라 에드워드 3세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년간의 휴전 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이 휴전은 1345년까지 연장되었다. 1345년 8월 가스코뉴의 랑그독의 중위로 선임된 그는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가스코뉴 지방의 베르주라크에 주둔한 프랑스군과 합류하려 했지만, 그 전에 헨리가 선제 공격을 가해 베르주라크 전투에서 베르주라크를 함락했다. 장 1세는 겨우 살아서 빠져나온 프랑스군을 수습한 뒤 페리쾨로 후퇴했다.

헨리는 여세를 이어가 페리괴를 포위했다. 페리괴의 방어 시설은 낙후되었지만 그곳에 모인 프랑스군 병력이 잉글랜드군과 맞먹었기에 공성전은 불가능했다. 이에 페리괴를 봉쇄하고 도시로 향하는 주요 경로를 지키는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했다. 이때 루이 1세 드 푸아티에가 남부 프랑스군이 페리괴로 진군하자, 헨리는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리보르네로 철수했다. 이후 장 1세는 필리프 6세의 부름을 받고 프랑스 북부로 이동해 왕과 합세했고, 1346년 9월 크레시 전투에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고 패주했다.

1349년 나폴리 왕국으로 가서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두번째 남편인 루이지 1세에게 가세해 헝가리 왕국의 국왕 러요시 1세의 군대에 맞섰다가 생포되었지만, 몸값을 지불하고 곧 풀려났다. 1351년과 1353년에 루에르그를 침범한 잉글랜드 분견대에 맞서 항전했으며, 1353년 세번째로 가스코뉴와 랑그독의 중위로 임명되었다. 1355년 가을, 프랑스 무관장 자크 1세 드 부르봉, 프랑스 원수 장 드 클레르몽과 함께 흑태자 에드워드슈보시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아르마냐크에서 대대적인 약탈에 착수했다. 그들은 약탈과 파괴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평행하게 진군하는 3개의 종대로 나뉘었고, 11일 동안 아르마냐크 전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며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대부분의 마을은 명목상으로만 요새화되었기에 쉽게 습격당하고 파괴되었다. 세 장군은 야전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툴루즈에 웅크렸다. 그러면서 툴루즈로 접근할 때 건너야 하는 가론 강과 아리에주 강의 다리를 절단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넜고, 그 과정에 말 몇 마리와 적은 수의 병사만 잃었다.

자크 1세는 에드워드 왕자가 툴루즈로 쳐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나른 강과 기론 강의 교차점을 지키기 위해 몽토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툴루즈로 가지 않고, 이전에는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던 툴루즈 동쪽의 곡창지대로 향했다. 동시대 역사가는 툴루즈 동쪽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 풍요로운 곳을 계속해서 약탈하고 불태웠다. 강력한 요새를 제외한 모든 곳이 습격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거나 생포되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본군에서 최소 39km 떨어진 범위 내에 흩어져서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잉글랜드군이 툴루즈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카르카손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인근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이에 공성을 개시해 한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사흘간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1월 8일, 잉글랜드군은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나르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근 요새를 무시하고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고 약탈했다. 요새에 있던 프랑스군은 그들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나르본에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그는 자크 1세 드 부르봉, 장 드 클레르몽과 함께 군대의 일부를 나르본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홈프스로 이동시켰다. 이 곳은 오데 강을 건너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로 돌아갈 때 오데 강을 무리하게 건너 이들과 싸우다가 막심한 손실을 입도록 강요하려 했다.

11월 10일,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그는 당초 적군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는 홈프스를 회피하고자 북동쪽의 베지에로 향했지만, 정찰병들이 그곳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다고 보고하자 전쟁 회의를 열어서 장군들의 의견을 들은 뒤 홈프스를 무력으로 뚫기로 결의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과정에서 물이 부족해지면서 다들 갈증에 시달렸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말에게 먹일 물이 없어서 포도주를 줘야 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이 이러한 역경을 무릅쓰고 홈프스에 접근하자, 프랑스군은 막상 적과 대결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게 싫었는지 툴루즈로 후퇴했다. 에드워드는 그들을 카르카손까지 추격한 뒤 자신이 파괴해서 황량해진 진군로에서 고군분투하며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이후 그는 에드워드를 쫓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자크 1세 드 부르봉과 갈등을 벌였다. 자크 1세 드 부르봉은 적을 추격해서 행군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는 툴루즈에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다. 며칠간의 논쟁 끝에, 그는 자크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을 아르마냐크 동부에 있는 세바 강에서 차단해 적지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려 했다. 11월 20일, 자크와 장이 파견한 선봉대가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과 맞붙었다가 패퇴했다. 에드워드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 위해 11월 22일에 프랑스군 가까이에 진을 쳤지만, 자크와 장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회전을 피하기로 하고 밤중에 철수했다.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계속 행군하여 11월 28일 가스코뉴에 도착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프랑스 남부에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는 동안, 그와 장 1세 드 아르마냐크, 장 드 클레르몽은 잉글랜드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두려워 해 그 뒤를 쫓아갈 뿐 이렇다할 군사 작전을 벌이지 않아 심한 비난을 받았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는 아키텐 공작인 에드워드 왕자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베른 자작령의 지배권을 놓고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와 전쟁을 재개했다. 1362년, 그는 루나크 전투에서 가스통 3세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900명의 기사와 함께 석방되었다. 1367년 에드워드 왕자의 페드로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에 동행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귀환 후 막대한 전비를 메꾸기 위해 그가 다스리는 가스코뉴, 아퀴텐 등지의 세금을 대폭 늘려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1368년 1월 난로세를 강제 징수하기로 해 영주와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는 이에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373년 5월 16일 보몽 드 로마뉴에서 사망헀고, 아들 장이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편집]


  • 곤트의 렌느(1307/1309 ~ 1325): 로마뉴와 도비야르 자작 베르트랑의 외동딸,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조카.
  • 클레르몽의 베아트리스(1311 ~ 1364): 샤롤레 백작 장의 딸.
    • 장 2세(133 ~ 1384): 아르마냐크 백작
    • 베르나르드(1336 ~ 1359): 요절
    • 잔(1346 ~ 1388): 베리 공작 장의 부인.
    • 마르타(1350 ~ 1378): 아라곤 왕국의 국왕 추안 1세의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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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02 ~ 1364, 아릅레 영주 베르나르도 5세의 부인[2] 1347년 출생 직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