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투트미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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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투트미쉬 영묘.jpg
델리 서남쪽 쿠트브 미나르 단지에 위치한 일투트미쉬 영묘

1. 개요
2. 즉위 전
3. 즉위 후
3.1. vs 일디즈
3.2. vs 카바차
3.3. vs 잘랄 웃 딘
3.4. 벵골 정복
3.5. 펀자브 정복과 칼리파의 책봉
3.6. 말기
4. 평가 : 델리 술탄국의 건설자
5. 기타


1. 개요[편집]


우르두어: شمس الدین التتمش
샴스 웃 딘 일투트미쉬

재위 1211년 6월 ~ 1238년 4월 30일
생몰 ? ~ 1239년 4월 30일[1]

델리 술탄 왕조의 3대 술탄. 창건자인 아이바크가 재위 4년만에 급사하며 붕괴되던 제국을 재통합하였다. 펀자브, 벵골 등 각지의 무슬림 / 힌두 군벌들을 소탕하였고 몽골이나 호라즘 등 외세에 슬기롭게 대처하며 북인도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을 굳혔다. 신실한 무슬림으로서 몽골 치하의 이슬람 학자들을 초빙하고 후원하며 인도 이슬람 문화의 기틀을 다졌다. 다만 성직자들을 존중하되 정치 개입은 차단하였고, 다른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능력을 보고 딸 라지아를 후계자로 삼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지닌 군주였다. 정치, 군사, 종교 측면 외에도 그는 통화 체제와 이크타 체제 (봉건제)의 개혁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족적을 남겼기에 델리 술탄조에 있어 사실상의 창건자로 여겨진다. 여러모로 맘루크 왕조바이바르스와 비슷한 포지션.

2. 즉위 전[편집]


12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의 일바리 튀르크 부족에서 일람 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출중한 외모와 총명함으로 유명했던 그는 세 형제들의 시기를 샀고, 형제들은 그를 기마 경기 때에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렸다. 해당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고, 쿠란유수프[2]의 일화에서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부하라로 팔려온 일투트미쉬는 현지 성직자인 사드르 에 자한에게 팔렸다.

어느날 일투트미쉬의 주인인 사드르 에 자한의 가족이 그에게 돈을 좀 주며 시장에서 포도를 사오게 하였다. 시장에 가던 중 그만 돈을 잃어버린 일투트미쉬는 주인의 처벌이 두려워 울기 시작하였다. 지나가던 한 데르비쉬 (수피 성직자)가 이를 보고는 그에게 포도를 사다주며 후에 권력자가 되면 수피들을 잘 대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어린 시절의 일부를 바그다드에서 보내며 여러 수피 지도자들과 만났다고도 한다. 한편 몇년 후 사드르 에 자한은 일투트미쉬를 부하라 핫지에게 팔았고, 다시 그로부터 자말 웃 딘 무함마드 추스트 카바에게로 팔려 가즈니로 옮겨졌다. 소문을 통해 그의 출중한 지식과 용모를 전해들은 고르 왕조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무함마드 고리)는 금화 1천닢을 주고 일투트미쉬와 다른 노예 탐가즈를 매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인 자말 웃 딘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술탄은 가즈니에서 그들을 팔지 못하게 하였고, 따라서 상단은 부하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1197년 경 자말 앗 딘은 가즈니로 돌아왔다. 막 구자라트 원정에서 돌아온 무함마드 고리의 부관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는 술탄에게 허가를 구한 후 델리에서 10만 지탈을 주고 일투트미쉬와 탐가즈를 매입하였다. 아이바크는 탐가즈를 타바르힌다의 무크타 (총독)로, 일투트미쉬를 사르 잔다르(친위대장)로 임명하였다.

곧 재능을 발휘한 일투트미쉬는 아미르 에 쉬카르(사냥 담당)가 되었고 1200년 고르 왕조가 괄리오르를 정복한 후 그 아미르가 되었으며 바란에 이크타(영지)도 얻었다. 일투트미쉬가 효과적인 통치를 이어가자 아이바크는 그에게 델리 술탄 왕조의 핵심 거점 중 하나인 바다운 (델리와 카나우지 사이의 도시)을 이크타로 하사하였다. 1206년 무함마드 고리는 코카르 반란군 진압을 위해 쿠트브 앗 딘을 소환하였다. 일투트미쉬는 주군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이를 가상히 여긴 무함마드 고리는 그에게 예복을 하사하며 아이바크에게 잘 대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술탄은 아이바크 역시 공식적으로는 노예 상태였는데도 주인에 앞서 일투트미쉬를 면천해주었다고도 한다. 원정 후 가즈니로 귀환하던 무함마드 고리가 사망하자 아이바크가 인도에 자립하였다. 그러나 4년 후 아이바크 역시 라호르에서 경기 도중 급사하였고 아들 알람 샤가 옹립되었다. 다만 벵골의 할지 부족 등 귀족들이 아이바크가 일투트미쉬를 아들로 부른 것에 기인하여 그를 추대하였다.

3. 즉위 후[편집]


일투트미쉬는 알리 에 이스마일의 지지를 받아 델리로 진군, 바그 이 주드에서 알람 샤를 격파하고 술탄이 되었다. (1211년 6월) 그는 울라마(이슬람 지식인 계층)를 통해 노예 신분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된 후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일투트미쉬는 아이바크의 딸과 결혼해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지만, 아이바크 사후 자립한 제후들 중에서는 반대하는 이가 많았다. 따라서 그는 제국의 핵심인 힌두스탄부터 평정에 나서 바라나시에서 반기를 든 카이마즈와 잘로르 등 힌두 영주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3.1. vs 일디즈[편집]


한편 고르 제국의 붕괴 후 가즈니를 장악한 맘루크 타즈 앗 딘 일디즈가 차트르(왕실 우산)와 두르바쉬(왕홀) 등 제후의 상징을 보냈는데, 제국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대결을 원치 않았던 일투트미쉬는 우선 이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치세 초반의 그는 술탄 대신 알 말리크 알 무아잠(대왕) 칭호에 만족하였다. 그후 호라즘 제국에게 패배한 일디즈가 가즈니를 떠나 동남쪽으로 이동, 군벌 카바차로부터 라호르와 펀자브 일대를 장악하였다. 기존 델리 술탄국의 영토를 잠식한 일디즈는 사신을 보내 자신이 무함마드 고리의 후계자로서 힌두스탄의 지배권이 있다고 명시하였다. 이에 일투트미쉬는 세상의 영토는 그러한 세습권이 아닌 강한 힘을 가진 자가 결정하는 것이라며 답하였다. 다만 그후에도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일디즈는 이를 무시하고 진군하였다. 1216년 1월, 이전에 무함마드 고리가 힌두 군대와 두 차례 격돌했던 타라인에서 이번에는 무슬림 군대끼리 격돌하였다. 승리는 일투트미쉬에게 돌아갔고, 일디즈는 화살에 부상을 당한 채 도주하다 잡혀 일투트미쉬의 거점인 바우반에서 처형되었다.

3.2. vs 카바차[편집]


이로써 일투트미쉬는 북부 인도에서의 패권을 확립했다. 한편 양측의 대결을 틈타 재차 펀자브를 장악하고 더 나아가 술탄까지 칭한 카바차는 동진하였다.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일투트미쉬는 1217년 진격, 후퇴에 나선 카바차를 만수라에서 따라잡아 격파하고 라호르를 점령했다. 일투트미쉬는 아들 나시룻딘 마흐무드를 총독으로 봉하고 귀환했는데, 이후로도 라호르와 펀자브의 지배권은 불안정했고 카바차는 물탄에서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그러던 1221년 호라즘 제국의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몽골군을 피해 펀자브를 침공, 코카르와 동맹한 후 카바차를 격파하였다. 인더스 강변까지 이르른 칭기즈 칸은 일투트미쉬에게 사절을 보내어 귀국 여정 중 인도를 관통할 수 있도록 요구했으나 곧 지형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파악하고 페샤와르를 통해 회군하였다. 다만 일투트미쉬도 잘랄 웃 딘을 돕지 말라는 칸의 당부는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3.3. vs 잘랄 웃 딘[편집]


한편 신드에 자리잡은 잘랄 웃 딘은 일투트미쉬에게 사절을 보내어 대몽골 동맹을 제안하고 안식처 제공을 요구하였다. 며칠간 고민하던 일투트미쉬는 자신의 왕국 내에는 그에게 적합한 기후나 주민을 지닌 곳이 없다며 거절하였다. 더 나아가 사절을 죽인 후 잘랄 웃 딘에게 (본래 복속했다가) 반기를 든 카바차에게 원군을 보내었다. 이후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는데 잘랄 웃 딘 역시 나섰으나 양측은 서로 호의적인 서신만 주고받은 후 물러났다. 잘랄 웃 딘은 구자라트 등지를 공격했으나 델리 방면은 넘보지 않은 채로 1224년 몽골군이 물탄의 카바차를 포위하자 그해 인도를 떠났다. 혹은 일투트미쉬, 카바차가 다른 힌두 왕공들과 그에 대한 동맹을 결성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인더스 강변에 출몰하는 몽골에 대해서 일투트미쉬는 우선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3.4. 벵골 정복[편집]


일투트미쉬가 펀자브와 신드에 신경쓰는 동안 벵골의 기야스 웃딘 샤는 술탄을 칭하곤 인더스 중류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에 1225년 일투트미쉬는 벵골로 친정하였고, 기야스 웃딘도 반격에 나섰으나 이내 싸움 대신 복속하고 연공 납부를 약속하였다. 이를 수용한 일투트미쉬는 말리크 자니를 비하르 총독으로 봉한 후 귀환하였다. 이듬해 술탄은 중북부 인도의 난공불락의 성채로 여겨지던 힌두 반란군의 란탐보어 (아그라와 코타 사이에 위치)를 함락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라자스탄의 만도레 요새를 함락하며 북인도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그 틈에 기야스 웃딘은 재차 비하르를 점령하였고, 일투트미쉬는 힌두스탄의 아요디야 총독인 나시룻딘 마흐무드에게 벵골 원정을 명령하였다. 나시룻딘은 기야스 웃딘이 아삼 원정으로 벵골을 비운 틈에 그의 수도 라크너티를 점령하였다. 이에 기야스 웃딘이 복귀했지만 패하고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인도의 가장 풍요로운 지방인 벵골은 이처럼 상당히 수월하게 통합되었다.

3.5. 펀자브 정복과 칼리파의 책봉[편집]


벵골이 정복되자 자신감을 얻은 일투트미쉬는 호라즘, 몽골의 침공으로 약해진 펀자브의 카바차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손쉽게 라호르를 접수한 일투트미쉬는 부관 아이테무르에게 물탄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3개월의 포위전 끝에 1228년 5월 우츠를 점령하였다. 바카르로 도주한 카바차는 아들 바흐람을 보내 평화 협상을 청하였다. 이에 일투트미쉬는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했으나 카바차는 그러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인더스 강에 몸을 던졌다. (5월 26일) 그후 일투트미쉬는 펀자브 전역뿐만 아니라 서쪽의 마크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에 신드 해안의 왈리 (태수) 말리크 시나눗딘 역시 그에게 복속하였고 카바차의 아들들과 그 잔존 세력 역시 뒤따랐다.

한편 1221년 아바스 칼리파 알 나시르가 인도 출신 라디 앗 딘을 델리에 사절로 보냈는데 그는 일투트미쉬의 환대를 받은 후 1227년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그새 신임 칼리파가 된 알 무스탄시르 1세는 라디 앗 딘을 통해 일투트미쉬에게 예복과 함께 야민 칼리파툴라(신의 대리인의 오른팔) 및 나시르 아미르 알 무미닌(신도들의 지휘관의 조력자) 칭호[3]를 내리고 인도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사절단은 1229년 2월 18일 큰 환영과 함께 델리에 당도하였다. 이로써 델리 술탄국은 공식적으로 칼리파의 인정을 받은 독립국가가 되었고, 한세기 후 이븐 바투타 역시 일투트미쉬를 델리의 첫 독립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일투트미쉬는 칼리파의 책봉을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인도 군주였다.

3.6. 말기[편집]


파일:일투트미쉬 영묘 1.jpg
쿠트브 미나르 옆의 일투트미쉬 영묘

1229년 봄 일투트미쉬의 아들이자 벵골 총독이던 나시룻딘 무함마드가 급사하였고 그 틈에 아미르 말리크 발카가 벵골에서 자립하였다. 응징에 나선 일투트미쉬는 1230년 그를 격파, 일전에 비하르를 맡았던 말리크 자니를 벵골 총독으로 봉한 후 귀환하였다. 그 무렵 아그라 남쪽 괄리오르에서 파리하라 족장 만갈 데바가 독립을 꾀하였다. 중부 인도로의 관문으로써 전략적으로 중요한 괄리오르에 대해 1231년 출정에 나선 일투트미쉬는 11개월의 포위 끝에 1232년 12월 도시를 함락하였다. 만갈 데바는 도주하였고, 아미르 지야웃딘 무함마드와 살라르 라쉬둣딘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약 1년 후 도시는 카나우지의 아미르이자 많은 이크타를 지닌 마리크 누스스라툿딘 타이시에게 주어졌다. 곧 원정에 나선 타이시는 카주라호 부근의 칼린자르 성채를 공격, 50여일간 일대를 약탈한 후 엄청난 부를 쌓으며 귀환하였다. 그중 일투트미쉬에게 상납된 1/5만 해도 약 250만 지탈에 달하였다. 타이시는 귀환 도중 야즈바팔라의 차하다 데바의 공격을 받았지만 병력을 3분하여 격퇴하였다.

타이시의 활약과 함께 일투트미쉬 역시 힌두 파라마라 왕국령인 빌사와 웃자인을 공격, 그곳의 힌두 사원들을 파괴하였다. 전자는 300년 동안 지어진 사원으로 전해지고, 후자의 마하칼레샤와르 사원에서는 엄청난 약탈물을 얻었다. 사원의 링가는 근처 연못에 던져졌다. 다만 두 도시를 약탈만 하고 병합하지는 않았다. 그후 일투트미쉬는 아프간-인더스 일대에 남겨진 호라즘 세력들을 공격하였다. 그 아미르들 중 한 명인 오즈베그 베이는 시리아-자지라의 호라즘 잔당에게로 도주하였다. 다른 아미르 하산 카를룩은 일투트미쉬에게 항복하였는데, 이내 변심하여 몽골에게 복속하였다. 1236년 일투티미쉬는 하산 카를룩의 거점 바미얀에 대한 원정에 나섰는데, 도중 와병하여 점성술사들이 고른 4월 20일에 델리로 돌아왔다. 10일 후 일투미쉬는 숨을 거두었고 델리 외곽 쿠트브 미나르 옆에 묻혔다.

한편 1231년 괄리오르 원정을 떠나며 일투트미쉬는 장녀 라지아에게 델리를 맡겼다. 그녀는 이듬해 그가 돌아올 때까지 훌륭히 통치하였고 이에 일투트미쉬는 라지아를 후계자로 선포하는 칙령을 내렸다. 본래 후계자로 양성하던 나시룻딘이 사망한 후 실의에 빠져있던 술탄에게 그녀는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다만 임종이 임박하자 현실적으로 여왕의 통치가 힘들 것이라 여겼는지 죽기 직전에는 생존한 아들들 중 장남이던 루크눗딘 피루즈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부인 샤 투르칸이 내치를 돕도록 하였다.

4. 평가 : 델리 술탄국의 건설자[편집]


파일:일투트미쉬.jpg
파일:일투트미쉬1.jpg
1230년경 델리 술탄조의 강역
일투트미쉬의 동전. 기마 무사 그림이 캘리그래피가 아닌 버젼도 있다

일투트미쉬는 그대로 분열될 뻔한 델리 술탄조를 중흥시켜 '카슈미르의 입구'에서 아라비아해, 벵골만에 이르는 영토를 보전해낸 수성 군주였다. 통치 방식에 있어 일투트미쉬는 아이바크 사후 혼란의 원인이었던 제후들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튀르크식의 이크타(봉건) 체제처럼 아미르에게 특정 봉토를 하사하는 대신, 그는 순환제로 도입, 한 아미르가 너무 오랫동안 특정 지역에 머물지 않고 임기를 채운 후 다른 지역으로 이크타를 전임하도록 했다. 이렇게 현지인들에게 동화되는 것을 방지해 세력화를 막음으로써 제국의 분열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었다. 그외에 가즈니의 고르 제국과의 봉신 관계를 청산하고, 바그다드와의 좋은 관계를 통해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책봉을 받음으로써 명분상으로도 독립적인 델리 술탄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인도의 이슬람 제국이라는 체계를 공고히 하였는데, 종파를 가리지 않은 이슬람 학문을 후원하였다. 본인 스스로도 신실한 무슬림이었던 일투트미쉬는 많은 시간을 밤중 기도에 할애하였고[4] 특히 몽골의 침공을 피해 당도한 옛 호라즘 제국령의 학자들의 정착을 도왔으며, 더 발전된 형태의 이슬람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게 했다. 다만 정치적 조언 등 내정에 관여하지는 못하게 하여 구분을 확실히 하였다. 신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비무슬림 힌두 교도들에 대해서 그는 강한 개종 권유책을 주장하던 울라마 (성직자층)의 의견과 달리 무리하게 그들을 개종시키려 하거나 샤리아 (이슬람법)를 적용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일투트미쉬는 울라마와 논의도 없이 여자인 라지아를 후계자로 선포하는 등 성직자들을 존중은 하면서도 휘둘리지 않았다. 종교와 현실 간의 중용을 택한 그는 인도 이슬람 군주의 표본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그는 큰 족적을 남겼다. 본래 인도는 은본위제였고, 고르 제국 역시 그를 따랐다. 다만 인도에는 은이 별로 없었고, 대부분 중앙아시아와의 육상 무역과 지중해권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충당하였다. 13세기 몽골의 침공으로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이 끊기고 해상 무역도 그 중심지인 구자라트가 적대적인 찰루키야 왕조의 수중에 있었기에 델리 술탄조는 은이 부족하였다. 따라서 일투트미쉬는 가벼운 은화인 탄카와와 구리 혹은 동으로 주조한 지탈로 구성된 이원화 체제를 수립하였다. 이는 향후 델리 술탄조의 통화 체제로 정착한다. 그리고 탄카는 근현대 루피의 전신격이다. 동전에는 인도 설화 데바나가리에 나오는 기사의 모습을 캘리그래피 (혹은 실사 그림)로 그려놓은 그림과 함께 그의 라카브인 '샴스 앗 둔야 왈리 딘 아불 무자파르 일투트미쉬 앗 술탄'이 새겨졌다.

정치에 있어서 확고한 결단력과 간혹 무자비함을 보였던 일투트미쉬는 사석에서는 상당히 예의가 있는 성격이었다. 한 예시로 나시리라는 한 시인이 술탄을 위한 시를 지어 그 앞에서 낭송하였다. 다만 절반 쯤 낭송했을 무렵 긴급한 군사 회의로 인해 일투트미쉬는 자리를 떴고, 술탄이 자신을 잊었다고 여긴 나시리는 좌절한 채로 있었다. 그러나 모임이 끝나고 돌아온 일투트미쉬는 시의 처음부터 자신이 기억나는 곳까지 읊으며 나시리에게 남은 부분을 낭송하도록 청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지식인들을 배려하는 군주였다. 유년기 수피 성인과의 일화처럼 일투트미쉬는 수피즘에 호의적이었고, 여러 칸카(수피 수도원)와 다르가(영묘) 건설을 후원하였다. 수피 성인 쿠트붓딘 바크티아르 카키를 위해서 바올리(계단형 우물)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쿠트브 미나르 단지 역시 아이바크 때에 공사를 시작하여 일투트미쉬의 치세에 완성되었다. 1231년에는 2년 전 사망한 아들 나시룻딘을 위해 쿠트브 미나르 단지 북쪽에 술탄 가리를 세웠다. 이는 델리에 세워진 첫 이슬람 영묘였다. 일투트미쉬 역시 그 주변의 영묘에 안장되었다.

  • 칭호
    • 마울라 물루크 알 아랍 왈 아잠(아랍과 비아랍의 대왕) - 가즈니 왕조 등에서 사용하던 라카브
    • 마울라 물루크 알 투르크 왈 아잠, 사이드 앗 술탄 앗 투르크 왈 아잠. 리캅 알 이맘 마울라 물루크 앗 투루크 왈 아잠(투르크와 페르시아인들의 대왕, 고귀한 술탄, 영혼 해방의 이맘)
    • 힌드기르(인도의 정복자)
    • 술탄 살라틴 앗 샤르크(동방의 술탄 중 술탄)
    • 샤 이 샤르크(동방의 왕)
    • 샤한샤 (왕중왕)

5. 기타[편집]


징기스칸 4에 이슬람 문화권 장수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이르투미슈’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챕터3에서 델리 술탄 왕조의 국왕으로 등장하며, 특이하게도 인도 문화권 장수가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 장수로 되어있는데 이는 상술되었듯 투르크족인 것을 반영한 것. 능력치는 정치/전투/지모 순으로 67/72/70이며, 내정 및 전투특기로 건설, 연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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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28일[2] 구약성경 창세기요셉[3] 이전에 기야스 웃딘이 자칭하기도 했음[4] 궁정 시인 아미르 루하니는 술탄을 지하드 전사, 즉 가지로 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