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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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익산시 CI.svg 익산시행정구역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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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O
Y
N
H
A
진국
건마국
乾馬國
BC 194
일리국
一離國
BC 194
여래비리국
如來卑離國
BC 194
감해국
感奚國
BC 194
마한
백제
금마저 · 지모밀지
金馬渚 · 枳慕密地
9
소력지
所力只
9
알야산
閼也山
3c
지량초
只良肖
4c
감물아
甘勿阿
9
웅진도독부
노산주
지모현

魯山州 支牟縣
660

보덕국
報德國
674



노산주
노산현

魯山州 魯山縣
660
통일신라
완산주
금마저군

完山州 金馬渚郡
685
완산주 금마저군
소력지현

完山州 金馬渚郡 所力只縣
685
완산주 금마저군
알야산현

完山州 金馬渚郡 野山縣
685
완산주 덕근지군
지량초현

完山州 德近支郡 只良肖縣
685
완산주 시산군
감물아현

完山州 屎山郡 甘勿阿縣
685
전주
금마군

全州 金馬郡
757
전주 금마군
옥야현

全州 金馬郡 沃野縣
757
전주 금마군
야산현

全州 金馬郡 野山縣
757
전주 덕은군
여량현

全州 德殷郡 礪良縣
757
전주 임피군
함열현

全州 臨陂郡 咸悅縣
757
후백제
완산주
完山州
892
고려
강남도 전주목
금마군

江南道 全州牧 金馬郡
995
강남도 전주목
옥야현

江南道 全州牧 沃野縣
995
강남도 전주목
낭산현

江南道 全州牧 朗山縣
995
강남도 전주목
여량현

江南道 全州牧 礪良縣
995
강남도 전주목
함열현

江南道 全州牧 咸悅縣
995
전라도 전주목
금마군

全羅道 全州牧 金馬郡
1018
전라도 전주목
옥야현

全羅道 全州牧 沃野縣
1018
전라도 전주목
야산현

全羅道 全州牧 野山縣
1018
전라도 전주목
여량현

全羅道 全州牧 礪良縣
1018
전라도 전주목
함열현

全羅道 全州牧 咸悅縣
1018
전라도
익주

全羅道 益州
1344
전라도 전주목
함열현

全州 臨陂郡 咸悅縣
1321
전라도 전주목
용안현

全州 臨陂郡 龍安縣
1321
조선
전라도
익산군

益山郡
1413
전라도 전주부
옥야현

全州府 沃野縣
1403
전라도
여산현

礪山縣
1400
전라도
안열현

安悅縣
1409
전라도
전주부

全州府
16c
충청도
여산군

礪山郡
1436
전라도
함열현

咸悅縣
1416
전라도
용안현

龍安縣
1416
전라도
여산군

礪山郡
1444
전주부
익산군

全州府 益山郡
1895
전주부
전주군

全州府 全州郡
1895
전주부
여산군

全州府 礪山郡
1895
전주부
함열군

全州府 咸悅郡
1895
전주부
용안군

全州府 龍安郡
1895
대한제국
전라북도
익산군

益山郡
1896
전라북도
전주군

全州 全州郡
1896
전라북도
여산군

全州 礪山郡
1896
전라북도
함열군

咸悅郡
1896
전라북도
용안군

龍安郡
1896
전라북도
익산군

益山郡
1906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익산군

益山郡
1914
대한민국
전라북도
익산군

益山郡
1945
전라북도
익산군

益山郡
1947
전라북도
이리부

裡里府
1947
전라북도
익산군

益山郡
1947
전라북도
이리시

裡里市
1949
전라북도
익산시

益山市
1995
※ G는 금마 일대 (現 금마면, 춘포면, 왕궁면 서부), O는 옥야 일대 (現 이리(시내 동지역), 오산면)
Y는 여량 일대 (現 여산면), N은 낭산 일대 (現 낭산면, 망성면)
H는 함열 일대 (現 함열읍, 함라면, 웅포면, 성당면, 황등면, 삼기면), A는 용안 일대 (現 용안면, 용동면)







1. 개관[편집]


통일신라 이래로 크게 여량현, 낭산현, 함열현, 금마군, 옥야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의 관할구역을 현재 행정구역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여량현: 여산면
  • 낭산현: 낭산면, 망성면
  • 금마군: 금마면, 춘포면, 왕궁면의 서부 지역[1]
  • 옥야현: 이리, 오산면
  • 함열현: 함라면, 함열읍, 용안면, 용동면, 웅포면, 성당면, 황등면, 삼기면


2. 각 시기별 역사[편집]



2.1. 철기 시대 ~ 남북국시대[편집]


철기 시대 초반에는 송국리형 문화 유형 집단의 흔적이 드러나며, 부장되는 토기들로 봐선 서북한 계열 및 동북한 계열 토기가 골고루 출토되는 편이다. 즉 한반도 이곳저곳으로 남하한 집단들이 그럭저럭 잘 어울려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이 일대에서 갑자기 기원전 250년 상한으로 하여, 주로 기원전 190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서북한 계열 토광목관묘, 세형동검 및 각종 청동제 의기류가 출현하면서 갑자기 위계 질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고고학 자료들이 나타난다. 학계에서는 이를,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밀려난 시기에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유민 집단으로 판단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마국 항목 참조.

삼국시대에 들어서며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왕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하고 지모밀지(枳慕密地) 또는 금마저(金馬渚)라 하였다고 하는데, 고고학적 지표에 의하면 적어도 삼국사기상 비류왕~근초고왕의 재위기가 되기 전까진 백제의 영향력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이와 같은 내용은 실제로는 비류왕 혹은 근초고왕 때 실현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함열 지역은 감물야현(甘勿阿縣), 여산 지역은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다. 일단 비류왕 혹은 근초고왕 시기부터 백제식 묘제들이 익산 이곳저곳에 침투하기 시작하지만 마한 건마국 시기부터 내려오는 익산 토착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익산 토착 세력이 마한 시기부터 내려오는 묘제를 완전히 버리고 백제식 묘제를 채택하는 건 다름아닌 무왕 시기로 비정되며, 이는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의 출신지로 이 지역이 추정됨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의 허락을 받아 잠깐 자치력을 유지하다가 한성 공함 시기 때 백제 수도 귀족으로 완전 편제된 옛 목지국 잔여 세력 천안 성남면 용원리 세력이 걸었던 과정과 똑같은 패턴이기도 하다. 한편 무왕 때 백제가 수도를 사비성(현재의 부여군)에서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가설도 존재한다. 실제로 익산에선 왕궁리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무왕 때 백제의 제2수도로 화려하게 개편되지만 그 과정에서, 종전 백제에게 대우받았던 익산 서쪽보다는 오히려 어느 정도 견제가 있었던 분구묘 및 옹관묘 집단이 주로 자리했던 익산 동쪽이 보다 떠오른다. 백제 왕실이 익산 전체를 키우는 과정에서 유독 여기만 더 키울 개연성은 사실 딱히 없기에, 유일하게 추측되는 건 무왕이 어려서 성장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 아니었나 하는 가능성 뿐이지만 확실하진 않다.

이렇게 익산 일대는 마한의 수장국이었다는 상징성에 더해 백제의 제2수도였다는 상징까지 획득하게 된다. 익산 일대에서 전해지는 전승이 마한왕이니 무강왕이니 무왕이니 등등으로 마한과 백제와 관련된 사실이 섞여 뒤죽박죽인 건, 익산에 자리한 건마국이 마한 최초 수장국이었다는 사실과 무왕이 백제의 제2수도를 익산에 건설한 사실이 서로 혼재되어, 지역에 구전으로 내려온 영향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

삼국통일전쟁문무왕은 금마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고 고구려의 유족인 안승(安勝)보덕국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신문왕 때 보덕국을 폐하였고 고구려 유민 대부분은 오늘날 남원, 전주, 전라도 서해안 섬들을 비롯한 전남북 이곳저곳으로 분산배치되었으며, 또 다른 많은 일부는 서라벌로도 이주조치되었다. 이 때 감물야현이 노산(魯山)으로 개칭되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금마군은 옥야현, 낭산현(과 우주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노산은 함열현으로 개칭되어 임피군의 속현이 되었다. 여량현은 덕은군[2]의 속현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왕궁리 유적은 석탑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가 통일신라 대의 것이다.

이후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땅이 되자 바로 근처 완산주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한 견훤이 이 지역에 주목한다. 견훤은 처음 완산주에 입성할 때부터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 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 년을 지냈다"고 해서 금마산 즉 익산을 주목했다. 익산의 대찰이었던 미륵사 석탑이 개탑된[3] 것이 922년의 일인데, 고려 초기의 승려로 광종 19년에 국사가 되었던 혜거국사는 917년에 금산사에서[4]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922년에 미륵사 개탑을 계기로 선운사에서 열린 선불장에 참석했었다고 갈양사 혜거국사비에 언급되어 있는데, 선불장이 열릴 정도였다면 미륵사 개탑이 꽤 큰 규모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미륵사지에서 나온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걸친 기와 및 금속 공예품들이 922년 후백제의 미륵사 개탑 때에 만들어졌으리라는 견해도 있는데, 손만 남은 청동보살상의 경우 후백제 왕실 원찰로 추정되는 완주 봉림사지 석조삼존보살상과 묘사 기법이 비슷하다는 점이 그 증거로 거론된다. # 또한 왕궁리 관관사에 많은 지원을 하였으며, 관관사에 있는 오층석탑은 후백제 시기에 견훤이 관관사를 중창하면서 세운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고구려 후계를 자처한 왕건이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중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2.2. 고려시대[편집]


고려 초 금마군을 제외한 다른 모든 현이 전주의 속현으로 들어갔다.

함열현은 1176년에 현령이 파견됨으로써 독립된 현이 되었고, 1321년에 현내의 도내산은소가 용안현으로 승격되었다.(지금의 용안면, 용동면) 금마군은 1344년에 익주가 되었으며, 여량현은 1391년 현령이 파견되면서 인접한 낭산현도 같이 다스리도록 하였다.


2.3. 조선시대[편집]


익주는 조선 태종 시기에 익산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량현은 1396년에 정식으로 낭산현을 병합한 뒤 1399년에 이름을 여산현으로 바꾸었다. 이후 1436년에 원경왕후의 외가쪽 관향이라는 이유로 군으로 승격되고, 1699년 노산군이 신원되면서 왕후의 관향이라는 이유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용안현과 함열현은 태종 때 안열현으로 합쳐졌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따라서 조선 건국 당시 지방관이 파견되어 있었던 여산, 함열, 익산, 용안은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남았다. 그러나 옥야는 전주의 속현이었던 것이 폐지되어 조선시대 내내 전주부의 월경지로 남아 있었다. 1899년과 1906년에 걸쳐 월경지와 두입지 정리 칙령에 의해 옛 옥야현 지역과 왕궁면 동부 지역이 익산군으로 편입되었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쌓았다는 기준성(箕準城)[5]이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다고 전해진다.


2.4. 일제강점기[편집]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여산군, 용안군, 함열군을 익산군에 편입하고 군청을 금마에서 익산면[6] 이리로 옮겼다.

본래 익산의 본방은 동부지역의 금마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호남선 개통과 이리역 부설로 구 이리 지역, 그러니까 현재의 중앙동과 창인동 지역이 시가지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현재까지도 익산의 주요 시가지는 구 이리시 일대에 밀집되어 있다. 대전광역시, 김천시와 같이 철도교통으로 성장한 도시가 이리였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이리 지역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전북 지역에서는 군산 다음으로 인구밀집도가 높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1917년 10월 1일, 북일면 남중리를 익산면으로 편입하였다.

이리가 속했던 익산면이 1931년 익산읍으로 승격하였다가, 얼마 안 된 1931년 11월 1일에 이리읍으로 개칭하였다.

1933년 12월 1일 일본식 동명이 생겨났다.

이리(裹里)
일출정(日出町)
굉정(轟町)[7]
욱정(旭町)
동산리(銅山里)
동산정(銅山町)
마동리(馬洞里)
마동정(馬洞町)
남중리(南中洞)
남중정(南中町)
고현리(古縣里)



2.5. 대한민국[편집]


파일:이리시 시기.svg
1995년 통합 이전까지 사용된 이리시의 깃발. 한글 '이리시'를 그대로 형상화했다.

파일:익산군기.png
익산군의 깃발. '익산'의 초성인 'ㅇ'과 'ㅅ'을 형상화했으며 위의 깃발와 마찬가지로 1995년에 통합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1946년 12월 1일, 일본식 동명을 정리하였다.

일출정(日出町)
북창동(北昌洞)
굉정(轟町)
철인동(鐵仁洞)
호남동
신흥동
욱정(旭町)
갈산동(葛山洞)
동산정(銅山町)
동산동(銅山洞)
마동정(馬洞町)
마동(馬洞)
남중정(南中町)
남중동(南中洞)

해방 후인 1947년 이리읍이 이리부(府)로 승격되고, 1949년 이리시(市)로 개칭되었다.

1957년 9월 14일, 법정동 명칭을 개칭하였다.

북창동
창인동1가(昌仁洞1街)
철인동(鐵仁洞)
창인동2가(昌仁洞2街)
호남동
중앙동1가(中央洞3街)
신흥동(新興洞)
중앙동2가(中央洞2街)
중앙동3가(中央洞3街)

1963년 황화면이 논산군으로 편입되어 논산군 구자곡면과 함께 연무읍이 되었다. 1970년 용안면 용동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4년 북일면이 이리시로 편입되었다. 1979년 함열면이 함열읍으로 승격되고 익산군청이 함열읍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팔봉면과 춘포면 석탄리가 이리시로 편입되었다. 1986년 용안면 용동출장소가 용동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익산시로 통합되어 다시 하나가 되었다. 1977년에 벌어졌던 이리역 폭발사고의 여파라는 얘기도 있다는데, 자세한 건 해당 사건 문서 참조.

[1] 완주군에 접해 있는 왕궁면 동부 지역은 우주현이라는 이름으로 완주군 삼례읍 서부 일부와 봉동읍 서부 일부와 같은 구역으로 묶여 있었다. 백제 시대에는 우소저현(于召渚縣)으로 불렸고,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는 우주현(紆洲縣)으로 개칭하여 금마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한자 하나만 바꿔 우주현(紆州縣)으로 전주에 예속, 1409년(태종 9) 이후에 임내를 혁파하는 과정에서 전주부의 직촌(直村)으로 바뀌었다. 전주에 속한 이후 우북면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석면과 우북면을 합하여 옛적에 이곳이 왕궁이 있었다는 설에 의거해 왕궁면이라 하였다.[2] 후에 은진군. 지금의 강경읍 일대.[3] 탑을 연다는 뜻으로 수리를 의미한다.[4]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견훤이 나중에 자기 아들에게 쫓겨나서 여기 구금되었다.[5] 또는 미륵산에 위치해 있어 미륵산성이라고도 불린다.[6] 1906년 이전에는 전주부 동일면과 남일면.[7] 이리역 기차의 굉음이 그치지 않는 마을이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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