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 앗 딘 아이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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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맘루크 왕조의 (사실상) 초대 술탄.[1] 바흐리 맘루크 출신으로, 7차 십자군에 대한 승리 직후의 혼란 도중 여성 술탄 샤자르 앗 두르의 섭정 겸 남편으로 추대되었다가 곧 술탄에 올랐다. 다만 시리아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 대결 시의 낮은 정통성 때문에 곧바로 퇴위하고 아이유브 왕공 알 아슈라프를 추대한 후 실권자가 되었다. 그렇게 3년여가 흐르고 내우외환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알 아슈라프를 폐하고 재차 술탄에 오르며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를 멸망시켰다. 다만 2번째 치세가 시작된지 불과 3년만에 부인 샤자르 앗 두르의 질투로 그녀에게 암살당하였다.
2. 생애[편집]
1250년 5월 2일, 맘루크들은 아이유브 술탄 투란 샤를 살해하고 그의 의붓 어머니 샤자르 앗 두르를 추대하였다. 다만 여성 군주의 취약함에 대한 지적이 있자 12일 후 맘루크 출신 장군 이즈 앗 딘 아이바크 자샨키르 앗 살리히를 그녀의 아타베그 (섭정)으로 추대하였고, 시리아의 앗 나시르 유수프와의 대결이 다가오자 7월 31일 둘을 결혼시킨 후 아이바크를 군주로 옹립하였다. (알 말리크 알 무이즈) 카이로 저자에서 환영식을 거친 후 시타델에 입주한 아이바크는 불과 5일 후, 앗 나시르의 아이유브 왕조 복원 명분을 꺾기 위해 알 카밀의 6살 손자 알 아슈라프 무사를 술탄으로 추대하며 부인보다도 더 빠르게 퇴임하였다. 다만 실권은 여전히 아이바크의 수중에 있었다.
1250년 8월, 아이바크는 시나이 반도에 선발대를 파견했으나 와해되고 카라크의 우마르에게 투항해버렸다. 12월 말엽, 앗 나시르가 가자에 당도하자 아이바크는 이집트 내의 친아이유브 세력을 체포하고 십자군 포로들의 석방을 통해 루이 9세의 중립을 확보하였다. 1251년 2월, 카이로 동쪽 외곽에서 벌어진 압바사 전투에서 초전에 패하였으나 친히 돌격을 가하여 역전승을 거두었다. 사로잡힌 앗 나시르의 재상을 처형한 아이바크는 1252년 루이 9세와 십자군 포로 무상 석방 및 예루살렘 왕국 복원을 대가로 동맹하였다. 다만 그해 5월 추진된 연합 작전은 맘루크 장군 파리스 앗딘 아크타이와 루이 모두 시리아 군과 대치하다가 회군하며 흐지부지되었다.
2.1. 본격적인 친정[편집]
1253년 4월 칼리파 알 무스타심의 중재로 양측은 나블루스를 경계로 휴전하였고, 포로를 교환하였다. 이듬해 1월 아이바크는 휘하의 쿠투즈를 시켜 술탄 알 아슈라프의 이모와 함께 시타델에 입주한 파리스 앗딘을 암살하였고, 곧 알 아슈라프마저 퇴위시키고 술탄으로 복위하였다. 다만 파리스 앗딘 휘하의 바흐리 맘루크 부대는 바이바르스의 주도 하에 시리아로 망명하였다. 아이바크는 상이집트의 바흐리 맘루크 수장인 이즈 앗딘 알 아프람의 반란에 대처하느라 바빴지만 우유부단한 앗 나시르가 바이바르스의 설득에도 이집트 재침에 나서지 않으며 한숨을 돌렸다. 1255년에는 압바사 전투 당시 투항한 아자지야 맘루크가 앗 나시르와 내통하다 걸려 축출되었다.
동시에 십자군과 10년 휴전을 맺은 아이바크는 1256년 재차 칼리파의 중재로 앗 나시르에게 바흐리 맘루크 고용 중단을 대가로 팔레스타인과 시나이 반도를 내어주며 재차 휴전을 체결하였다. 약속대로 이듬해 바이바르스는 다마스쿠스에서 축출되어 카라크로 향하였다. 하지만 그러기 전인 1257년 4월, 아이바크는 모술의 군주 룰루의 딸과의 결혼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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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자르 앗-두르를 첫 술탄이라 보기에 어려움. 또한 샤자르와 아이바크 후에 아이유브 왕가가 3-4년간 복원되었기에 알 아슈라프 폐위 후 아이바크가 즉위한 것을 맘루크 조의 진정한 시작으로 보는 편이 깔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