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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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성우(1896).jpg

李成佑[1]
1896년 음력 12월 13일[2] ~ 1965년 8월 7일[3] (향년 68세)

1. 개요
2. 생애
2.1. 출생 및 성장배경
2.2. 활동 내역
3.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본관은 함평(咸平)[4], 자는 재욱(載旭), 호는 동포(東圃).

2. 생애[편집]



2.1. 출생 및 성장배경[편집]


1896년 음력 12월 13일(양력 1월 15일)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아버지 영은(穎隱) 이두회(李斗回, 1869. 9. 27 ~ 1926. 10. 28)[5]과 어머니 함평 모씨(1870. 2. 22 ~ ?. 6. 11)[6]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이태형(李泰亨, 1841 ~ 1894. 12. 25)[7]은 1888년(고종 25) 무과에 급제한 뒤 1890년(고종 27) 고군산진 수군첨절제사(古群山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1894년 4월 16일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함평현에 입성하자, 이때부터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해 수시로 고군산진과 함평현 영풍면 주포(現 함평군 함평읍 장년리 구주포마을)를 오가며 함평현 읍내에 주둔한 백여 명의 동학농민군에게 지시를 내려 함평현, 영광군, 나주목(現 나주시) 경계를 배회하며 관군을 계속 남하하도록 유도케 했다. 그리고 후방에서 가축 및 식량 등의 군수물자를 동학농민군에 지원해주었다. 이러한 활약이 이어 발발한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는 거두는 계기가 된 것이다.[8]

그러나 이후 45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고창현감 이경인(李景寅, 1851 ~ 1895. 2. 27)[9]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되어 1894년 12월 25일 전라도 나주목(現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이경인은 동학 농민 혁명이 평정되자 1895년 2월 27일 함평현에 방문했고, 함평현 읍내 기성면 서부리(現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 서부마을)[10]에서 연회를 벌이던 중 이태형의 장남 이두회에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이때문에 세상에서는 이두회를 '의기(義氣)있는 효자(孝子)'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이태형이 처형된 후 그 후손들은 거처도 없이 조정의 탄압을 피해다녀야 했는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 이태형의 9촌 삼종질(三從姪)이자 고종 때 조경묘 참봉(肇慶廟參奉, 종9품) 및 만경군수·은율군수를 지낸 석암(石菴) 이동범(李東範, 1869 ~ 1940. 3. 2)[11]집을 지어주어 생계를 보태준 뒤에야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54년 또는 1955년에 이성우가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에서 이경인의 증손자 이정근(李正根, 1924. 3. 6 ~ )[12]을 만나 과거의 앙금을 풀고 화해했다고 하며, 이성우의 장남 이일행(李一行, 1931. 12. 5 ~ 2006) 또한 서울특별시에서 이정근을 만나 재차 화해했다고.

2.2. 활동 내역[편집]


한편, 이성우는 일찍이 상경해 경성부 중동고등보통학교(現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귀향해 수년간 농업에 종사하면서 8년간 함농사친회 회장을 지냈다. 8.15 광복함평공립농림중학교(現 함평골프고등학교) 후원회장에 취임해 지방교육사업에 종사했으며, 신문사 지국장을 5년간 맡기도 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49년 7월 29일 대한노농당입당했다. 1949년 10월 12일 제헌 국회 제4회 임시국회에서 국회 외무국방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1950년 2월 25일 대한국민당입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전라남도 함평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국민당 서상국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65년 8월 7일 사망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함평군[13]

[[무소속|
무소속
]]

10,870표 (31.93%)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함평군[14]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684표 (3.77%)
낙선 (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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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에는 李成로 등재되기도 했다.[2] 양력 1월 15일[3] 함평이씨대동보 권11 1065쪽 참조.[4] 효우공파(孝友公派) 29세 재(載) 항렬.[5] 족보명 이충범(李忠範).[6] 모종민(牟宗敏)의 딸이다.[7] 족보명 이계균(李啓均), 자는 상삼(相三).[8] 동학농민혁명 증언록 - 현직관리로 농민군에 가담한 이태형, 증손 일행[9] 현감공(縣監公) 손무(孫茂)파 26세 현(鉉) 항렬. 초명 이현인(李鉉寅), 자는 진구(珍九). 장남 이남규정미의병 당시 기삼연 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한 공로로 독립유공자서훈되었다. 1877년(고종 14) 경기도 수원유수부에서 심한 기근이 들자, 1만 냥을 의연금으로 기부하였다. 이에 대한 포상으로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종6품)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했다. 이때 또한 전라도에도 기근에 대한 의연금 2,000냥을 기부하기도 했다. 1887년(고종 24) 고창현감(高敞縣監)에 임명되었으나 1888년 총무관 겸 전운어사(總務官兼轉運御史) 홍종영(洪鍾永)의 탄핵으로 사고가 있을 때 관련 아전과 향임(鄕任)을 제때 파견하지 않아 일 처리를 그르치고, 무뢰배가 진(鎭)의 장교(將校)를 구타했음에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음이 드러나 파직되었다.[10] 지금의 함평농협본점 자리[11] 자는 경연(敬然). 이 사람이 건립해 살았던 집이 2004년 2월 13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함평 이재혁 가옥(咸平李載爀家屋,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379-2번지 소재)이다. 건립 후 자신의 차남 죽하(竹下) 이재혁(李載爀, 1893. 9. 15 ~ 1992)이 대를 이어 거주하면서 현재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 집은 '이참봉'댁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1898년경 백범 김구가 은거했었다고 한다.[12] 족보명은 이재근(李載根).[13] 제25선거구[14] 제18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