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우(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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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90년 1월 10일 경상도 진주목 중안면 삼동(現 경상남도 진주시 평안동)에서 태어났다.
사립 야마자키고등측량학교 광산과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다가, 재학 중에 반일연설로 인해 체포되던 도중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일본에 유학, 니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재화(金在華)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 독립선언문과 교유문(敎喩文) 수백매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사전에 배포한 뒤 3월 18일 진주군 진주면의 장날을 기하여 시장에 운집한 수천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 직후 그는 강달룡을 비롯한 30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강우는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니혼대학을 졸업했고, 곧 귀국하여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現 진주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후 진주시립근로학원장에 취임해 재직하다가 광복 직전에는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잠깐 동안 광산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진주부에 출마해 당선되어 헌법정부조직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유덕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때 납북당했고 이후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4.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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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령대군파 18세 강(康) 항렬. 손자 이정환씨는 20세 정(廷) 항렬이다.[2] 1977년 작성된 역대국회의원총람에는 1889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류성갑,김옥주,김준연, 오석주,윤석구,신현돈,백관수,오용국,최규옥,김명인,이종린,이훈구,류홍렬,연병호,서상일,조헌영,김익기,정도영,김상덕,이강우,허정,구중회,박해극,김효석,김병회,홍익표,서성달,조봉암,이윤영,이청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