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 마르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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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크라 편집위원
율리 마르토프
Юлии Мартов| Julius Martov


파일:MartovW.jpg

본명
Юлии Осипович Цедерба́ум
율리 오시포비치 체데르바움
출생
1873년 11월 24일[1]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니예
사망
1923년 4월 4일 (향년 49세)
바이마르 공화국 쇤베르크
재임 기간
전러시아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위원
1917년 4월 11일 ~ 1917년 11월 9일
국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제국"
행정구
]]
파일:러시아 국기.svg러시아 공화국 (1917~1918)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직업
정치인
정당
사회민주노동당 (1898년 ~ 1903년)
멘셰비키 (1903년 ~ 1917년)
멘셰비키 국제주의자 (1917년)[2]
멘셰비키 좌파 (1917년 ~ 1923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사회주의자가 되다
2.3. 레닌과의 결별
2.4. 혁명기의 활동
2.4.1. 참전파 멘셰비키와의 논쟁
2.4.2. 볼셰비키와의 논쟁
2.4.2.1. 2월 혁명
2.4.2.2. 7월 시위에 대한 입장
2.4.2.3. 쿠데타 반대
2.6. 말년
3. 사상
4. 여담



1. 개요[편집]


러시아의 사회주의자이자 멘셰비키의 영수. 뛰어난 이론가로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레닌보다도 지지를 받았으나 정치력과 판세를 읽는 능력에서 레닌에 밀려 숙청당한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現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3] 그의 가족은 유대인 집안으로 본래 성은 체데르바움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에 가정교사의 체벌로 다리가 부러졌는데 이후로도 절뚝거림을 갖게되며 주변의 멸시와 차별을 겪었다. 그의 집안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체데르바움은 나로드니키 운동가로 매우 유명했는데 러시아에서 이디시어로 된 신문을 처음 발행한 인물이었다. 마르토프는 국제도시 오데사에서 생활했는데 오데사에서 유대인 학살 사건이 벌어지자 마르토프의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갔다.[4][5] 그도 처음에는 할아버지처럼 인민주의 사상에 감회되었으나 인민주의의 빈약한 이론과 당대에 러시아 당국의 수탈에 의한 기근에 당시 과학적이라 여겨지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2. 사회주의자가 되다[편집]


마르토프는 어렸을때부터 세속교육을 받으며 유물론적 생각을 키우게 된다. 1892년 처음으로 반차르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할아버지가 보석금을 낼 때까지 구금된다. 그는 빌뉴스에서 추방당하고 시베리아 유배를 당한다. 유배생활이 끝난 후에는 당시 대다수 사회주의자가 그러하듯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유대인 사회주의 그룹의 수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되자 창당인으로써 사회민주노동당의 핵심기구인 신문사 이스크라의 6인의 편집위원이 된다. 대표적인 편집위원으로는 러시아의 1세대 마르크스주의자이자 1세대 마흐주의 이론가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마르토프의 평생의 동지가 되는 파벨 악셀로드, 마르토프와 같은 소장파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있었다. 이후 편집위원에 잠시 들어온 사람이 천재로 유명했던 레프 트로츠키였다. 마르토프는 트로츠키를 상당히 아끼었고 트로츠키도 레닌과 마르토프같은 소장파 그룹과 친하게 지냈다. 훗날 레닌과 마르토프가 의견충돌을 빚고 당이 둘로 갈릴 때 트로츠키는 마르토프의 편을 들며 레닌을 격렬히 비난했다.

2.3. 레닌과의 결별[편집]


1903년 2차 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이전까지 동지였던 레닌과 마르토프는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1903년 시점에서 당권은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악셀로드같은 노장파에서 레닌, 트로츠키, 마르토프같은 소장파로 바뀌었다. 레닌과 마르토프, 트로츠키는 테어난 환경부터 살아온 족적이 비슷했다.[6]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는 달랐다. 레닌은 상당히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면이 강했다. 하지만 마르토프는 부드러운 성격에 때때로 우유부단한 면을 보였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당대회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레닌은 사회민주노동당이 강철같은 규율과 상급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기반으로 하는 직업적 혁명가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부르주아에 대한 폭력적 억압말고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보호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적극적 혁명 조직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르토프와 노장파 대다수들은 그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든 계급의 해방이 마르크스주의의 목적이라면서 레닌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독일 사회민주당처럼 최소강령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정당이 되어야한다고 보았다. 당 대회 선거에서 레닌의 주장이 다수를 차지하며 레닌은 자신의 파벌을 다수를 의미하는 볼셰비키. 마르토프의 파벌을 소수파를 의미하는 멘셰비키라고 불렀다. 그러나 2차 당대회에서만 잠시 다수를 차지했을 뿐 10월 혁명 직전까지 언제나 멘셰비키가 우세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두고 당은 더욱 분열되었다. 지하정당을 완전히 청산해야한다는 청산파, 기존 제도권으로의 참여를 절대반대하는 초좌익파, 그리고 레닌의 볼셰비키, 마르토프의 멘셰비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 중간파인 메즈라이온치 등으로 나뉘었고 혁명이 진정되면서 파벌들은 멘셰비키, 볼셰비키 그리고 메즈라이온치 정도로 통합되고 나머지는 해산되거나 출당조치되었다.

2.4. 혁명기의 활동[편집]



2.4.1. 참전파 멘셰비키와의 논쟁[편집]


취리히에서 망명 생활 중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적십자의 도움으로 기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7] 레닌이 볼셰비키들을 휘어잡은 것과 반대로 멘셰비키는 마르토프의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마르토프는 이전부터 강경하게 반전을 주장했는데 표도르 단을 비롯한 본국의 멘셰비키들은 임시정부와 함께 전쟁 지지를 표명하는 의견불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결국 멘셰비키 중앙은 마르토프와 악셀로드를 쫓아내버린다. 이들은 끝까지 국제주의 노선을 주장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전쟁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볼셰비키와 동일했으나 소비에트 의석에서 멘셰비키보다도 적은 의석을 가졌다. 마르토프는 이론가였으나 정치적 능력은 전무했고 이를 보완해줄 인물도 없었다. 볼셰비키가 민중의 요구가 평화임을 파악하고 그에 맞추어 그런 주장을 취한 정치적으로 유능한 모습을 보였다면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은 이론적인 이유로 반전을 주장했었다.

2.4.2. 볼셰비키와의 논쟁[편집]



2.4.2.1. 2월 혁명[편집]

임시정부와 임시평의회(임시 입법부)에 대해서 마르토프는 대다수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이행기에 필요한 정부라고 여기며 대연정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그에게 부르주아 식민전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주장하며 러시아가 무의미한 전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독일의 지원으로 국외 정당들 중 가장 먼저 러시아에 당도한 볼셰비키는 레닌의 강력한 주장대로 4월 테제를 발표하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옮기며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와의 연을 끊을 것을 주장했는데 이같은 주장은 2월 혁명을 자축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언졌고 마르토프를 위시로한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은 그의 주장이 대단히 위험할 뿐더러 임시기구인 소비에트를 권력기구화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2.4.2.2. 7월 시위에 대한 입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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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의 기관총 사격을 피해 도망치는 페트로그라드의 시위대
게오르기 리보프 총리의 임기 만료일이 다가오면서 페트로그라드에도 일종의 레임덕이 찾아온다. 그 시점에서 페트로그라드와 주요 도시의 시민들은 전쟁의 중단과 즉각적인 평화협상을 주장했다.[8] 이들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 사태를 7월 시위 내지는 7월의 날이라고 부른다. 시민들의 자발적 시위에 온건파가 집권해있던 소비에트 중앙위원회는 난색을 표하고 4월 테제로 먼저 소비에트 국가를 내새운 볼셰비키도 아직 혁명역량이 불충분하다면서 무력 행동에 나서기를 꺼렸다.[9] 그러는 사이 임시정부와 임시평의회는 폭력화된 시위대를 카자크을 동원해 진압했다. 그리고 이런 폭동적 시위와 폭동적 시위진압에 마르토프는 임시정부의 결정을 옹호한 멘셰비키사회혁명당과 달리 시위대를 옹호했다. 그리고 혁명역량을 핑계삼아 시위대를 유기한 채 도망을 간 볼셰비키를 규탄했다.

2.4.2.3. 쿠데타 반대[편집]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고 2차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를 소집한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 멘셰비키 국제파, 사회민주노동당 국제파[10]는 볼셰비키의 일방적인 표결 강요를 비난했다.[11] 마르토프는 소비에트 중심의 신정부로의 평화적 정권이양을 주장하며 폭력혁명 반대파와 무당파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어디까지나 필리버스터로 역할을 했을 뿐 마르토프는 멘셰비키에서도 입지가 불안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주장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이런 필리버스터 시도에 트로츠키는 다시 한번 말발로 이들을 밀어 붙였다.

당신들은 불쌍한 고립된 개인들입니다. 파산자, 당신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속한 곳으로,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십시오!

이 말에 마르토프는 격분하며 받아쳤다.

그럼 어서 가자!

그리고 말도 없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당원들도 마찬가지로 표결을 끝까지 거부했다. 마르토프가 나가던 도중 젊은 볼셰비키 당원 하나 마르토프에게 당신만은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엔 당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에 가담했는지 알게 될걸세.


2.5. 러시아 내전[편집]


러시아 내전에서 처음에는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했다. 사회혁명당이 제헌의회 해산으로 뚜껑이 열려버린 데에 반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러시아를 옹호했다.[12] 마르토프도 내전만큼은 안 된다면서 사회혁명당을 설득하려 했다.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백군에 참여한 멘셰비키 우파와 연을 끊을 것을 주장했으나 마르토프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내전 동안 볼셰비키의 권위주의가 내부단속을 넘어 사회전체를 옭아매자 이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다. 전시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인민들을 극한으로 쥐어짜는 체제가 만들어지고 이후 이 비상조치들은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해제되지 못한다.[13] 그리고 야당활동도 불가능해져서 1920년 공공연한 탄압에 독일로 망명을 간다.[14] 그리고 그가 망명간지 얼마 안돼서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이 일어났고 사회민주노동당(멘셰비키 좌파)을 비롯한 모든 야당이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었다.

2.6. 말년[편집]


독일 망명 이후 자신과 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에서 활동을 하며 1차 세계대전 이후 약화된 국제주의의 촉진을 위해 노력했다. 독일에서 저술 활동을 하던 중 1923년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 전 만든 멘셰비키 신문사는 1970년대까지 해외 멘셰비키의 기관지로 쓰였다.

3. 사상[편집]



4. 여담[편집]


  • 사진에서 보듯 수염으로 인해 꽤나 노안인데 사진만 보면 무슨 레닌의 선배로 플레하노프처럼 1세대 사회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레닌보다 3살 어리다.
  • 레닌과 상당히 사적으로 친밀했다. 정적으로 돌아선 뒤에도 마르토프의 살 날이 얼마남지 않자 레닌은 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도우려다 당 실무를 담당하던 서기장 스탈린의 반대로 의료지원을 포기했다.
  • 레닌과 가족관계나 삶의 족적이 비슷했다. 둘다 거물급 인민주의자 친인척이 있었고 인민주의에서 회의를 느끼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허나 레닌은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마르토프는 절름발이라는 어렸을 적부터의 패널티 때문인지 조심스럽고 때로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이 특징들이 두 인물의 이후의 방향과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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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1월 12일[2] 멘셰비키의 여론이 찬전으로 기울자 멘셰비키를 탈당하고 창당한 정당이다. 멘셰비키의 기존 주축이었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1917년 제헌의회 선거에 앞서 멘셰비키 우파와 합당했다.[3] 이에 대해 첨언하자면 그의 가족은 상인 집안이었는데 오스만에서 무역 사업을 했다.[4] 이민자들이 많은 항구도시는 개방적임과 동시에 다양한 문화의 충돌로 피로도가 쌓여 있어 제노포비아도 자주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이 있다.[5] 당시 러시아의 반유대주의는 유럽에서 손꼽힐 정도로 극심했다.[6] 레닌과 마르토프는 모두 가족이 유명한 나로드니키 운동가였고 처음엔 나로드니키에 투신한 전적이 있으며 트로츠키와 마르토프는 모두 세속적인 유대계 출신이었다.[7] 독일 제국 측에서 봉쇄열차를 제공했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그걸 타고 귀국했으나 마르토프와 멘셰비키들은 독일 제국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면서 거부했다.[8] 케렌스키 공세의 참패도 이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9] 레닌은 좀처럼 확실한 승부가 아닌 이상 행동에 나시기를 삼가는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이 시위는 소비에트 대한 지지였어도 레닌을 지지하진 않았다.[10] 메즈라이온치와 비슷한 중간파였으나 끝까지 폭력혁명에는 반대했다. 후일 소련 측은 공산주의를 원하면서도 혁명을 거부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논평했다.[11] 그럴 만도 한게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회의를 소집한건 겨울궁전을 제외한 시내를 모두 점령한 후였다. 한마디로 "우린 혁명 일으켰으니까 어서 승인이나 하슈" 이런 태도였다.[12] 이는 서구 사회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68혁명까지 이어져왔다.[13] 대표적으로 소비에트 자유선거, 집회와 결사의 자유, 노동삼권, 당내 분파 및 민주주의. 소비에트 자유선거는 특히 스탈린 때에 들어서 직선제 최고 소비에트로 바뀌며 원천봉쇄당했다.[14] 레닌은 그를 순순히 돌려보냈다. 아마도 선전도구로써 이용가치도 낮고 매번 발목잡기 일쑤인 그를 보내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했을지도. 그래도 옛 정이 있는지 마르토프에게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