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매킨리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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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리엄 매킨리 암살 사건
Assassination of William McKin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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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를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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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발생 위치

발생일
1901년 9월 6일
유형
살인
발생 위치
미국 뉴욕 버펄로
가해자
리언 촐고시
피해자
사망
윌리엄 매킨리 제25대 미합중국 대통령

1. 개요
2. 상세
2.1. 사건의 배경
2.2. D-DAY: 대통령을 저격하라
3. 사건 이후
4. 음모론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1901년 9월 6일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버팔로에서 범미국산업박람회를 참석해다가 리언 촐고시 에게 암살당한 사건.[1] 3번째 일어난 대통령 암살 사건이다.

2. 상세[편집]



2.1. 사건의 배경[편집]


존 윌크스 부스는 남부 출신의 인기 배우였고 링컨에게 극렬한 분노를 가진 사람이었다. 당초 부스의 목표는 링컨을 납치해 남군 포로와 맞교환하는 것이었다. 1865년 3월 4일에 열린 링컨 대통령의 제2기 취임식에 부스는 애인 루스 헤일의 도움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후에 부스는 "이 날에 링컨을 죽일 수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링컨은 인기 배우인 부스를 뒤풀이 파티에 초청하기도 했지만 부스는 "링컨하고 같이 식사하느니 돼지랑 식사하는게 낫다"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3월 17일, 부스는 링컨 대통령이 캠벨 미합중국 육군병원에서 연극 공연을 볼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워싱턴 털락에 있던 식당에 있다가 돌아오는 링컨을 납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링컨은 공연관람을 하지 않고 내셔널 호텔에서 육군 140 인디애나 연대가 탈취한 남군 군기의 송정식에 참여해서 부스의 납치시도는 실패했다. 얄궂게도 부스가 내셔널 호텔로 돌아왔을 때 링컨과 대면했다(...).

4월 10일,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 장군이 북군에 항복하면서 사실상 남북전쟁은 끝났다. 링컨을 납치해 남군 포로를 구해내고 남군의 위기를 해소하겠다던 부스의 계획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링컨 대통령은 연설에서 흑인의 참정권을 보장할 생각이 있다는 발언을 했고 부스는 이를 듣고 링컨과 몇몇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4월 14일, 부스는 조지 아트제로트[2]와 데이비드 헤롤드[3] 등의 몇몇 공모자들과 모여 링컨이 포드 극장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날 링컨 대통령과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 그리고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 등을 죽이기로 결정한다.[4]

링컨이 꿈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건이 발생하기 불과 며칠전, 링컨이 꿈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관 주위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았고, 꿈 속에서 링컨이 관을 지키던 한 군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대통령께서 암살당하셨습니다"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깨어났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링컨이 살해된 직후 한 측근의 증언이었다.


2.2. D-DAY: 대통령을 저격하라[편집]



스미소니언 채널에서 재연한 링컨 암살 영상

그리고 예정대로 링컨이 포드 극장(Ford's Theatre)[5]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랜트 장군도 초청됐으나, 아이들 졸업식을 핑계로 여기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건 변명이고 실제는 그랜트 부인이 영부인인 메리 토드 링컨을 아주 싫어해서 빠졌다는게 정설. 그랜트 장군과 그랜트 부인은 잉꼬부부였던 걸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랜트 장군 대신 헨리 래스본(Henry Rathbone,1837~1911) 육군 소령[6]이 참석해 자리를 채웠다.

근처 주점에 숨어있던 부스는 몰래 링컨의 뒤쪽으로 숨어들어가 밤 10시 15분, 총성이 들리지 않게끔 사람들이 웃는 장면에서 링컨의 뒤통수에 데린저를 쏴 저격한다. 이때 좌석 출입구를 지키던 경찰관이 자리를 비운 이유가 뚜렷하지 않아서, 후술할 슈어드 음모론에서 핵심적인 떡밥이 되었다. 링컨은 전쟁 중에는 연방 보안관이나 육군 기병대의 호위를 받았었지만 이 날은 워싱턴 시에서 파견된 경찰관 한 명(...)만 따라붙었다. 오늘날처럼 시크릿 서비스 요원들의 체계화된 경호가 없던 시절의 비극이다.[7][8]

저격 직후 옆에서 래스본 소령이 그를 저지하려 하자, 부스는 권총을 던져버리고 칼로 왼팔을 여러 차례 찌르고 가슴을 찔러 중상을 입혔고, 그 칼을 든 채 밑층으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릴 때의 충격으로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피묻은 칼을 머리 위로 꺼내보이며 마치 연극인 양 무대로 올라가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전해진다.

Sic semper tyrannis!(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될 것이다!)[9]


링컨 부인과 클라라 해리스는 비명을 질렀으며, 래스본 소령의 "저 놈 잡아!" 라는 외침은 부스의 행동이 연극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자각하게 했으며, 곧 대혼란이 발생했다. 부스는 래스본 소령이 소리치는 순간 무대를 가로질러 누군가가 오기도 전에 바깥 옆 문에 대기시켜 놓은 말을 타고 도주했다.

도주한 후 그는 헤롤드의 도움으로 버지니아 주로 도망쳤고[10], 1865년 4월 14일부터 4월 24일까지 리처드 갸렛이라는 농부의 집에 머물렀다. 부스의 정체를 몰랐던 농부는 4월 24일부터 4월 26일까지 부스를 손님 대접해 주었으나, 결국 수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연방군에 신고했다. 결국 암살 11일 뒤인 4월 26일 한 헛간에서 콩거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 연방 육군 병력에게 포위된다. 헤롤드는 항복했지만 부스는 항복을 거부하여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보스턴 코벳 육군 병장이 쏜 총의 총알이 목을 관통, 4번과 5번 사이의 척수가 절단되고 전신이 마비된 상태로 있다가 총격이 일어난 날 아침 죽게 된다.

그를 부검하는 장면은 사진으로 찍혔지만, 이 사진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한편 링컨은 총격을 받은 다음날인 4월 15일 아침,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3. 사건 이후[편집]


링컨은 남북 화합을 강조했기 때문에 링컨이 살아있을 때 남부는 북군 포로 13,000여 명을 아사시킨 전범 헨리 워즈만 사형에 처해지고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북부에서는 "남부를 박살내야 한다!"라는 급진파가 힘을 얻게 되었다.[11] 그 결과 남부는 1877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군정 치하에 놓였다.[12][13] 또한 남부 출신 사람들은 연방 공직 임명에서 무조건 배제되는 불이익을 받았으며, 북부인과 달리 충성 서약을 해야만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등의 유례없는 대탄압을 받았다.[14] 이로 인해 남부 또한 링컨 암살 사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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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cnews142_01_big.jpg
암살 가담자들의 공개 처형식. 사진 좌측부터 매리 엘리자베스 젠킨스 수랏(Mary Elizabeth Jenkins Surratt)[15], 루이스 쏜턴 파월(Lewis Thornton Powell, 1844 ~ 1865),
데이비드 에드거 헤롤드(David Edgar Herold, 1842 ~ 1865), 조지 앤드류 아트제로트(George Andrew Atzerodt, 1835 ~ 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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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스가 사용한 데린저 권총은 회수되어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가 포드 극장을 당시와 같이 복원하면서 전시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1997년 한 교도소의 재소자를 통해 전시된 권총이 오리지널이 아닌 복제품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FBI는 조사를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 도난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여러가지 추적과 총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 여러 조사와 비교를 해본 결과 총은 진품으로 나왔고 재소자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16]


링컨 대통령 암살을 목격했던 마지막 생존자는 새뮤얼 제임스 시모어(Samuel James Seymour,1860~1956)이다. 당시 5세로 극장에 있던 그는, 총성이 울린 후 어떤 남자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고 아직 링컨이 암살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에, 어떤 남자가 떨어진 사실에 대해서만 염려했다고 한다.참고

이후 2번의 세계대전을 거쳐 TV 시대까지 살아남은 시모어는 1956년 2월, 96세의 나이로 게스트의 비밀을 패널들이 추리하는 <I've a Secret>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2달 후 사망했다.

링컨 옆에 있다 부상당한 래스본 소령은 대령까지 진급하고 독일 제국국방무관으로 파견되는등 승승장구했으나, 평생 링컨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급기야 1883년 12월 3일에는 아내(위 그림 속 왼쪽 두번째의 여인으로, 사건 당시에는 약혼녀였다.)를 칼로 찔러죽이고 두 아이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정신질환자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 독방에 30년 가까이 갇혀 있다가 사망한다.


4. 음모론[편집]


1920년대에 국무장관 슈어드[17]가 사실 암살의 배후라는 설과 창고에서 죽은 자는 부스가 아니라는 이론이 미국에서 돌았고 현대에도 많은 음모론자들이 이 학설을 믿고 있지만 사실상 신빙성은 없는 떡밥이다. 동기부여가 확실하고 범죄과정에서 딱히 의문점이 없으며 관련자들도 대부분 처형되었기 때문. 게다가 슈어드도 이때 암살 가담자 중 하나인 루이스 쏜턴 파월 암살당할 뻔했다. 케네디 암살과는 다르게 별다른 배후에 대한 심증도 물증도 없다시피 하다. 늙어 죽으면서 내가 사실 부스였다고 고백한 노인들이 미국에서는 40명이 넘는다고 한다. 한편 슈어드 이외에 당시 육군장관이었던 에드윈 스텐턴을 배후로 지목하는 음모론도 있다.

그 외에도 남부연합 배후설, 조지 샌더스 배후설 등이 아직도 거론되긴 하나 모두 논파되었다.참고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가 링컨 암살과 연계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심지어 앤드류 존슨 내각에서 제퍼슨을 이 혐의로 재판에 세우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관련 증거가 전무한 상황에서 제퍼슨 같은 거물에게 혐의를 씌우는 건 무리수였기에 흐지부지되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미드 본즈에선 등장인물 실리 부스가 이 부스의 후손이란 설정으로 나온다.[18]


  • 팀 포트리스 2 세계관에선 엔지니어의 할아버지 레디건 코내거가 부스('모자의 탑'이라고 불림)가 링컨을 암살할 것을 예감하고 특수 암살 방지 장치를 발명하여 링컨은 암살당하지 않았다. 정작 링컨은 각고의 노력 끝에 2층집을 오를 계단을 발명했지만 오르는 법이 익숙하지 않아, 평소대로 극장 2층으로 로켓 점프를 하다가 죽은 것으로 나온다.

  • 역대 미국 대통령 암살범(미수범 포함)들에 대해 다룬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 어쌔신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형식상 누가 주인공이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작품이나 굳이 따지자면 부스를 주인공으로 봐도 될 정도.


  • 미국 모험소설 사하라에서는 부스의 원래 계획인 링컨 납치 계획이 성공하여 납치된 링컨은 남군 해군 장갑함에 실려 남군 잔당이 있는 지역으로 이송되나 이를 단독으로 알게 된 국방장관 스탠턴이 '차라리 링컨이 죽은 것으로 하면 남군 잔당이 링컨을 내세워 요구를 할수 없게 된다.'고 판단, 대역을 내세워 암살사건을 연출하여 링컨은 공식적으로 암살당한 것이 되고, 이제 미국에서는 어디로도 갈수 없게 된 남군 장갑함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프리카로 갔다가 사하라 사막의 강이 말라붙으면서 고립되어 링컨을 비롯한 전 승조원이 굶어죽게 된다... 현대에 와서 말리 공화국 독재자와 결탁한 악덕 폐기물 처리업자와 싸우던 주인공 일행이 말리 군에 쫒겨 달아나다가 장갑함을 발견하게 되고, 모든 일이 해결된 후 사막에서 진짜 링컨의 유해를 모셔와 링컨 기념관에 안치하게 된다.

  •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에서도 암살 장면을 그린 벽화가 등장한다. 작품의 세계관이 되는 컬럼비아의 경우 인종차별이 극심한 동네라, 링컨을 악마처럼 묘사하고 그 뒤에서 권총을 들고있는 부스를 천사처럼 그려놓았다. 또한 본작에 적으로 등장하는 기계 애국자 중에는 링컨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 있는데, 이 링컨 기계 애국자는 뒷통수가 없다.
[1] 6일에 총에 맞았고, 14일에 숨을 거두었다.[2] 이 사람은 이 날 부통령 앤드루 존슨을 납치해 죽일 기회를 가졌지만 쫄아서 결국 하지 못했고, 그 후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교수형당하게 된다.[3] 슈어드를 죽이기로 했던 자로, 9일 전인 4월 5일 마차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은 슈어드의 자택에 의사인 척 들어가 칼로 살해하려 했으나, 턱 보호대 덕분에 뺨에 상처만 입힌 채 실패하고 도주 중 투항하게 된다. 그 뒤는 물론 교수형.[4] 슈어드도 링컨과 비슷한 시간에 해롤드에 의해 정말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남았다.이후 알래스카 산거 생각해 보면 죽었으면 알래스카는 누구 땅이 되었을지... 그랜트 장군은 훗날 대통령이 된다.[5] 1832년 2월에 건립된 워싱턴 DC의 10번가 511번지, NW에 위치한 극장이다. 원래는 침례교회 건물이었다.[6] 위 그림 속에서 부스를 향해 팔을 뻗는 육군 장교.[7] 이 사건 이후에도 대통령에 대한 체계화된 경호는 한동안 없었고, 그 결과 제임스 A. 가필드윌리엄 매킨리도 암살당했다. 매킨리 암살 사건 이후 전문적인 경호가 필요함을 느낀 미 정부가 시크릿 서비스에 대통령 경호를 맡기게 되었다.[8] 참 기묘하게도 링컨이 암살되기 바로 전날 한 일 중 하나가 시크릿 서비스 창설 기획안 승인이었다. 물론 시크릿 서비스는 당시 재무부 산하 단속국이었고, 대통령 경호를 맡게 된건 전 각주에 나와있듯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9] 이것도 목격자마다 다르다. 라틴어로 외친 이유는 그가 연극배우였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극의 한 장면을 재연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이 말은 그가 도주한 버지니아 주의 표어이다.[10] 이 와중에 부스를 치료해준 의사는 후일 불고지죄 혐의로 연방군에 체포된다.[11] 실제로 이 때 부스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테러를 당했다고 전해진다.[12] 독립 이후 미국 본토의 특정 지역이 군부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13] 그나마 군정이 끝난 이유도 1876년 대선이 좀 찝찝하게 끝나고 남부에서 반발하자, 당선인인 헤이스가 남부를 달래준다고 군정을 종료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남부 입장에서는 군정이 비극이었지만, 그곳에 살던 흑인들에게는 필요한 군정이였다. 노예해방선언 이후와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이겼다고 해서 흑인에 대한 인식은 달라질리 없었고, 외려 KKK같은 작자들만 판치는 상황에서 군정은 어느정도 필요악이었다. 실제로 군정 시기에도 흑인에 대한 대우가 크게 나아지지 못했고, 1876년 대선 역시도 남부의 백인들이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하기 일쑤였다. 결국 그 군정마저 끝나자 흑인들의 권리는 군정 시기보다도 더 추락하여 100년 뒤 흑인 민권 운동의 시대가 올때까지 짓밟힌다.[14]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12년 뒤 군정이 종료될 때 같이 사라진다.[15] 회합 장소 제공과 여러 도움을 준 여관집 여주인으로, 부스와 공모해 링컨을 납치하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석방되었던 존 서랏의 모친이다. 로버트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음모자가 그녀에 대한 재판을 다루고 있다. 미국 형사에서 최초로 직접 가담자가 아닌데도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된 사례이다. 생몰은 1820 ~ 1865[16] 거짓말을 한 이유는 추측건대 복제품을 만들어 진품처럼 속여 팔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17] 알래스카 조약을 체결할 때 국무장관이었던 그 슈어드다.[18] 마침 이 후손이 드라마 설정상으로는 전직 저격수이다(...)왜 하필 저격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