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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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제17대 대통령.
2. 약력[편집]
- 1829. 타운 구청장
- 1843. 제28대 하원의원 (민주당 / 테네시 제1선거구)
- 1845. 제29대 하원의원 (민주당 / 테네시 제1선거구)
- 1847. 제30대 하원의원 (민주당 / 테네시 제1선거구)
- 1849. 제31대 하원의원 (민주당 / 테네시 제1선거구)
- 1851. 제32대 하원의원 (민주당 / 테네시 제1선거구)
- 1853.10. 제15대 테네시 주지사 (1853.10.17. ~ 1857.1.3.)
- 1857.8. 제35대 상원의원 (민주당 / 테네시 제1부 / 1857.8.8.~1862.3.4.)
- 1862.3. 제15대 테네시 주지사 (집권 2기 / 1862.3.12. ~ 1865.3.4.)
- 1865.3. 제16대 미국 부통령
- 1865.4. 제17대 미국 대통령
- 1873. 제43대 하원의원 (무소속 / 테네시 광역선거구)
- 1875. 제44대 상원의원 (민주당 / 테네시 제1부)
3. 생애[편집]
3.1.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편집]
1808년에 노스캐롤라이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3살때 양복점에서 일을 배우고 애인으로부터 글쓰기를 배워 독학으로 학문을 익히고 정계에 진출하여 연방 하원의원(1843~1853), 테네시 주지사[2] , 연방 상원의원(테네시, 1857~1862) 등을 거치면서 점차 이름이 알려졌다. 1860년 링컨의 당선 이후 남부가 차례로 연방을 탈퇴했지만 그는 연방에 남아있었다. 왜 그랬는가 하면 존슨 본인은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연방 탈퇴에 반대했다.[3] 이로 인해 북부에서는 찬양받았지만 남부에서는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의 출신주인 노스캐롤라이나와 정치적 기반이나 다름없던 테네시가 모두 연방에서 탈퇴한 걸 생각해보면... 결국 이것이 뒷날 탄핵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64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국가연합당(National Union Party)으로 잠시 당명을 바꾸고 자신들에게 지지를 호소한다. 또한 링컨 대통령 또한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겠다는 의지에서 민주당 소속이었던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 당시 북부에는 민주당의 위세가 약한 편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민주당원은 남부를 지지했기 때문. 이 사례는 아직까지도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의 정당이 다른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4]
어찌되었건 그는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시작부터 영 좋지 않았다. 본인으로서도 어중간한 포지션에 있기도 하고 부담감도 있고 해서 긴장을 풀기 위해 부통령 취임식장에 위스키를 마시고 입장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주정뱅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그를 부통령으로 세운 링컨이 적극적으로 그를 감싸주었지만... 불과 1달만에 링컨이 포드 극장에서 저격당한다. 다음날 링컨은 사망하였고,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3.2. 대통령 재임 시절[편집]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슨은 초기만 해도 오히려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중 한명인 Chandler 상원의원에게 자신만큼 급진적이라는 평도 받을 정도로 (당시 압도적 인기를 가지고 있던 야당인) 공화당과 원만한 관계를 가졌으나, 지나친 남부 유화책 등으로 점점 사이가 멀어져 급진파가 장악한 의회의 인권법 등 여러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에 급진파는 압도적인 의석수로 대통령의 거부권을 찍어누르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을 반복하였다.
실제 존슨은 자유민은 되었지만 여전히 차별받던 흑인들의 실상에 대해서는[5] 무관심했다. 해방노예국 기한 연장 거부 등 해방 노예들에 대한 지원 법안을 무르고[6] , 심지어 KKK 같은 인종 차별주의를 근간에 둔 불법 폭력 집단의 준동을 방치하는 등 흑인들을 사실상 2등 국민 취급하였다. 존슨은 위에서 보았듯 스스로도 노예를 소유했던 인물이었고 노예제 찬성론자였으며 노예 지원 법안 폐지에 관한 발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1865년 1월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은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을 마치고 군정장관 자격으로 40만 에이커에 달하는 백인 농장주의 토지를 몰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나눠 노예였던 흑인 난민들에게 땅 40에이커와 노새 한마리씩을 분배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존슨은 재건 법령 제1조로 이를 전면 무효화시키고 토지를 백인 농장주들에게 반환했다. 흑인들은 생계를 위해 소작농이 되어 예전과 똑같이 가혹한 착취를 겪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66년 남부 홈스테드법으로 남부의 공유지를 흑인들과 백인 연방주의자들에게 판매했으나 가난한 흑인 소작농들에게는 토지 구매 비용이 없었고 결국 군정 해제와 함께 법도 폐지되었다. 공유지는 백인 투기꾼들과 목축업자에게 돌아갔고 결국 남부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흑인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할 토지개혁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화당에게는 '인종차별주의자, 인간 쓰레기, 당의 배신자'라 불렸다. 그렇다고 민주당을 비롯한 남부에게 지지를 받았냐면 그것 역시 아닌게 사실상 공화당에 붙은 '남부의 배신자' 등의 소리를 들으며 남부쪽의 지지도 영 시원찮았다. 이렇게 양 당 모두에게 찍힌 존슨은 국방부장관 에드윈 스탠턴이 헌법은 '모든 권력은 의회에 있다'고 적혀있으니, 자신의 충성 대상은 대통령이 아닌 의회에 있다고 선언한 '스탠턴 사건'을 통해 자멸했다.
당시 공화당 급진파들이 주도했던 상하원에서 (존슨을 길들이기 위해) 1867년 "육군 통솔법"과 "공직 보장법"을 통과시킨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슨 대통령이 장관 등을 해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상원이 해임동의안을 의결하는데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의 의지로 스탠턴은 기어이 해임되었다.
참고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이 사람 재임 중에 발생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은 고종. 물론 민간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독단적으로 벌인 만행이기에 뒤늦게서야 이 소식을 접하고 두 번 선박을 파견해 사실 관계를 확인한다.
3.2.1. 탄핵 위기[편집]
I never thought of it that way, but it does relieve God Almighty of a heavy responsibility!
난 그런 쪽으로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만들어졌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막중한 책임을 덜어주겠는데!
1860년대 중반 친구가 앤드루 존슨이 자수성가한(self-made) 인물이라고 칭찬하자 한 공화당 급진파 지도자 새디어스 스티븐스가 비웃으면서 한 말.#[7]
Andrew Johnson is the impersonation of the tyrannical slave power. In him it lives again. He is the lineal successor of John C. Calhoun and Jefferson Davis; and he gathers about him the same supporters.
앤드루 존슨은 압제적인 노예 권력의 인격화이다. 그 안에서 노예제는 다시 살아났다. 그는 존 C. 칼훈과 제퍼슨 데이비스의 직계 후계자이며, 똑같은 지지자들을 모으고 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도전하는 거지?"라면서 하원에서[8] 탄핵안을 제출하여 찬성 126표, 반대 47표로 가결된다. 이때 하원에서는 열이 머리 끝까지 오른 공화당 뿐 아니라 존슨을 고까워하던 민주당 의원들과 남부민주당 의원들마저 탄핵 절차를 밟는 것에 찬성하며 앤드루 존슨 탄핵 과정에 동참해버리고 만다.[9]
탄핵안이 나온 것은 예전에도 몇번 있었으나 탄핵소추가 가결되어 상원까지 올라간 것[10] 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상원의원의 2/3를 넘게 차지한 공화당 대부분이 존슨의 탄핵에 동의하고 있던 상황.
그러므로 사람들은 존슨이 당연히 탄핵될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3개의 탄핵 안건이 모두 1표차로 간신히 부결. 3건 모두 찬성 35표, 반대 19표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민주당 의원 9명이 그의 탄핵을 반대한 점도 있지만,[11] 무엇보다 소수(10명)의 공화당원들이 막판에 등돌렸던 것이 컸다. 그들도 존슨을 지지한 건 아니었지만, 탄핵이 선례가 되서 의회가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 즉 삼권분립의 원칙 침해를 막기 위해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60년 뒤인 1926년, 연방 대법원에서 이 공직 보장법이 위헌이라고 판단하면서("마이어스 vs U.S" 판결) 존슨이 주장한 공직 보장법의 위헌성이 뒤늦게 입증되었다.
당연히 재선은 도전조차 하지 못했고, 존슨의 후임으로는 남북전쟁의 영웅인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취임했다. 하지만 존슨은 그랜트를 대선 후보로 내세운 공화당 급진파가 탄핵 정국을 주도한 탓에 서로 관계가 험악했으므로 취임식때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 152년 뒤 도널드 트럼프가 후임 대통령인 조 바이든의 취임식에 불참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후임 대통령의 취임식에 불참한 대통령이었다.
만약 앤드루 존슨이 탄핵되었다면 대통령직은 상원임시의장이 승계받게 되는 것이다.[12][13] 그러면 그때 최초로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다. 다만 약 100년 뒤에 이 사건 때문에 리처드 닉슨이 사임하면서 진짜로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 나왔다.[14]
3.3. 말년[편집]
탄핵 소동으로 인해 재선은 꿈도 못꾸고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장난 상태에서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지만, 명예 회복한답시고 계속 정계에 남았다. 결국 1875년 테네시 주 상원의원이 되었지만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4월 당선되어 7월 사망. 그의 고집불통 같은 면모는 죽기 직전에도 잘 보여줬는데, 죽기 직전 존슨은 앉아 있다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 몸 오른쪽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고통을 호소했는데, 놀란 딸이 의사를 부르려고 하자 "의사 따위는 필요 없어! 혼자 설 수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하여간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대통령.
4. 평가[편집]
학자들과 대중들에게 모두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같이 도매금으로 까이는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워런 G. 하딩은 물론 최근 이 4인방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와 비교하더라도 협상력, 연설력, 호소력 등 각종 정치력 지표가 최악이다. 2021년 발표된 C-SPAN에서는 제임스 뷰캐넌에 이어 44위, 2022년 Siena 조사에서는 뷰캐넌(44위), 트럼프(43위), 하딩(42위), 피어스(41위)를 제치고 최하위를 차지했다.
집권 전 존슨은 성실하고 정직한 이미지로 주변인들의 고평가를 받았다.
"나는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거만한 귀족들이 사실은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여러분 앞에 보여줄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돈을 버는 그들은 열심히 노동해서 자기 먹을 빵을 버는 사람들에 비하면 정말로 형편없는 사람들이지요."
ㅡ 앤드루 존슨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만큼 고통을 겪고 일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떤 면에서든지 앤드루 존슨을 평가할 수 없다.
ㅡ 에이브러햄 링컨
"만약 내가 그랬듯이 여러분이 그의 정직한 모습과 진심 어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결국 그를 믿게 될 것이다."
ㅡ 오하이오 주지사 제이콥 콕스
그러나 집권 후에 이러한 호평들은 완전히 뒤집혔다.
에 필적할 만한 술주정뱅이 짐승"ㅡ 공화당 상원의원 찰스 섬너[16]
" 저런 무례한 촌사람이 대통령 옆에 서있다니! 하나님! 링컨을 축복하고 용서하소서!"
ㅡ 뉴욕 월드지, 부통령 취임 당시[17]
"그는 자신 출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부에 관심이 별로 없었으며 칭찬과 비난에도 무감각했다."
ㅡ 남부연합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
물론 알래스카 조약처럼 나름 업적도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국무장관이던 '슈어드의[18] 냉장고'라 불리면서 의회로부터 조롱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매입은 미국에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19] 그 외에도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멕시코에서 찝적거리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세력을 몰아낸 것도 업적. 내전 이후 아메리카에서 미국이 맹주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조치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20]
결과적으로 링컨의 후임자라는 불리한 위치에서 고생만 한 대통령이 되었지만 본인 또한 좋은 정치인은 결코 아니었다. 본인이 남부 편의를 많이 봐주고, 남부 연합 가담자가 연방에 충성을 인정한다면 사면해주려고 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와의 극한 충돌로 당시까지의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많은 거부권을 난사하며 공화당 급진파는 물론 중도파와도 갈등을 빚었다. 1866년 인권 법안에 끝까지 거부권을 행사했으나 의회는 2/3을 넘는 찬성표로 거부권을 눌러버렸고,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공화당 중도파조차 존슨과 함께 일하는 것을 포기하게 할 정도였다. 186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대승하며 존슨을 압박했지만 존슨은 끝까지 양보없이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남부를 제외하면 존슨의 지지세는 크지 않았고, 현역 대통령이면서도 경선에서 뉴욕 주지사 호레이쇼 시모어에게 패배하여 일찌감치 재선에 실패했다.
위의 언급에서 보듯 스스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농장 소유주나 귀족화된 상류층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계속 자신의 출신 성분을 반영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많은 반감과 어그로를 샀지만, 그만큼 자신의 신념에 투철하고 도덕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올곧은(?) 행보 때문에 양당에 모두 왕따당하는[21] 불행한 임기를 보냈다는 동정어린 평가도 있지만(주로 남부를 중심으로), 그럼에도 오늘날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는 최하위권인 일이 많다. 특히 흑인민권운동이 자리잡은 이후로 남부 재건의 실패가 재조명되면서 존슨의 책임이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으며 고의로 재건을 사보타주한 인종차별주의자, 남부 보수파에 힘을 실어 흑인 인권을 100년 뒤로 미룬 원흉이라는 평가도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