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크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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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크루거
Walter Krueger


파일:월터 크루거.jpg

출생
1881년 1월 26일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 플라토프
사망
1967년 8월 20일 (향년 86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밸리포지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898년~1946년
최종 계급
미국 육군 대장
지휘
미 제7군단장
미 제3군 사령관
남부방위사령관
미 제6군 사령관
주요 참전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
멕시코 혁명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서훈
수훈십자장
육군 공로훈장[1] 3회
해군 공로훈장[2]
리전 오브 메리트

1. 개요
2. 일생
3. 초기 생애
4. 초기 경력
8. 이후
9.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미국의 장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장성이며,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미 육군 제6군을 이끌고 남서태평양 전역, 필리핀 탈환전 등을 이끌며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사병 출신 장군으로도 유명하며 본인의 능력을 유감없이 증명하여 대장까지 진급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독일계 이민 1세대로 성공한 미군 장성이라는 독특한 이력도 있다.[3]


2. 일생[편집]



3. 초기 생애[편집]


월터 크루거는 1881년 1월 26일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의 플라토프[4]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율리우스 크뤼거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한 장교 출신 지주였으나 월터 크루거가 8세 때 사망하였다. 율리우스 크뤼거가 사망하자 월터 크루거의 어머니는 월터를 포함한 자녀 셋을 데리고 어머니의 삼촌이 정착한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로 이민하였다. 이 때 크루거의 어머니는 루터교 목사와 재혼하였다.

크루거 가족은 인디애나 주 매디슨에 정착했다. 크루거는 당초 해군 장교가 되기를 원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대장장이로 진로를 변경하였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지 나중에는 토목기사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4. 초기 경력[편집]


크루거는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1898년 병사로 입대했다. 8개월 간 점령군 업무를 수행하며 병장까지 진급했지만, 이내 1899년 제대하여 한동안은 토목기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토목기사로 겨우 4개월밖에 일하지 못했다.

1899년 6월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알고 지내던 다른 전우들을 따라 군에 재입대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때의 경력은 인정되지 않아 그는 다시 병사로 입대하였다. 그는 제12보병연대에 소속되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아버지 아서 맥아더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다시 병사로 입대하기는 했으나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금방 다시 부사관이 되었으며, 1901년에는 소위로 임관하여 제30보병연대에 부임하였다. 1904년에는 그레이스 에일린 노벨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필리핀에서 만난 사이였다.[5]

1904년 크루거는 포트 레븐워스에 있는 보병-기병 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우수 생도로 졸업하였다. 그 직후 그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바로 진학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은 고급 장교로 가기 위한 필수 코스에 가까운 것이었다. 웨스트포인트만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유망한 장교로서 장성으로 가기 위한 코스를 밟아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필리핀 파병 이후 그는 포트 레븐워스에 외국어 교관으로서 부임했다. 그가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에 모두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독일어야 그가 독일 태생이었으니 두 말 할 것도 없었고, 스페인어도 필리핀에 장기간 복무하면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어는 따로 익힌 것으로 보이는데 그마저도 능숙했다 하니 크루거의 명석함을 알 수 있는 사례다. 이 때 그는 독일어로 된 전술 교본들을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빌헬름 발크의 '전술'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 '전술'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레너드 우드 장군의 관심을 끌어서 육군 내부에서 널리 읽혔다.


5.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크루거에게 독일군 관전무관 자리가 돌아갔으나 독일인 이민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대신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방위군 제10보병연대에 부임하였으며, 존 조지프 퍼싱 휘하에 들어 판초 비야 원정에 참전하였다. 원정은 1916년 10월에 종료되었다.

1917년 미국이 협상국 측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크루거는 제84보병사단에 부임하여 프랑스에 발을 디뎠으나, 이내 전차군단의 참모장으로 발령났다. 1918년 11월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그는 점령군으로 남은 제4군단의 참모장이 되었고, 임시계급을 부여받아 대령이 되었다. 이 때의 공적으로 그는 1919년 육군 공로훈장을 1회 수여받았다.


6. 전간기[편집]


전쟁이 끝나자 귀국하며 임시 계급인 대령 계급이 회수되어 1919년 6월 29일다시 대위가 되었으나 바로 다음 날인 30일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이 때 그는 육군 전쟁대학에 입교하여 1921년에 졸업하였으나 전쟁대학을 떠나지 못하고 4년 간 교관으로서 활동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주로 지휘에 관한 내용이었다.

1922년부터 3년 간은 전쟁계획국에 소속되어 색부호 전쟁 계획을 작성하는 데에 일조했으며 특히 워 플랜 그린과 워 플랜 블루에 깊이 관여하였다. 워 플랜 그린은 멕시코를 상대로 한 전쟁 계획으로 판초 비야 원정에 참여했던 경력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워 플랜 블루는 미국의 내전 상황을 가정한 계획이었다. 뿐만 아니라 워 플랜 오렌지와 워 플랜 탠에도 참여하였는데 워 플랜 오렌지는 일본에 관한 것이고 워 플랜 탠은 쿠바에 관한 것이었다. 크루거는 이 때 육해군 간 합동작전을 벌이며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숙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로 그는 자임하여 해군 전쟁대학으로 파견되었고 여러 연구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1927년이 되면서 진급에 한계를 느끼고[6] 미국 육군항공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항공대 기초비행학교에 입교했을 무렵 그의 오른팔이 신경염에 걸려 당시 교관이었던 클레어 리 셔놀트[7]가 퇴교시켰다. 같은 해 12월에 그는 결국 해군 전쟁대학으로 돌아가 육해군 합동 작전에 대한 강의를 하는 교관으로 부임했다.

1932년에는 다시 제6보병연대장으로 부임하면서 대령 계급장을 달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51세로 대령 계급의 정년 퇴역을 앞둔 상태였으나 1936년 다시 전쟁계획국으로 발령받아 임시 계급으로 준장이 되었다. 1938년 9월에는 제16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39년 2월에는 임시 소장이 되어 제2보병사단장으로 진급하였는데, 당시 제2보병사단장은 미군의 새로운 편제[8]를 실험하기 위한 실험 사단의 성격이 강했다. 레슬리 맥네어가 2사단의 포병 지휘관 겸 참모장이었던 점만 봐도 보통 사단은 아니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크루거는 사단장으로서 이 새로운 편제의 개선점을 상신할 기회를 얻었다. 주요한 내용은 사단의 기계화와 신속히 전개할 수 있는 전술 등이었다. [9] 이에 실험사단은 정규 편제로 인정받았고, 이 편제가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미군의 정규 편제로 작동하게 된다.


7.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40년 크루거는 제3군 예하 제9군단장으로 부임한다. 1940년 제3군은 월터 쇼트 장군의 제4군과 모의전을 붙게 되었는데 이 때 제3군에서 차출된 것이 크루거의 9군단이었다. 크루거는 6월에 제7군단장으로 발령받았으며 이듬해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제3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 당시 그는 남부방위사령관을 겸직하였으며 이 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참모장으로 요청하여 휘하에 두고 있었다.

루이지애나 기동훈련 때 크루거의 제3군은 벤 리어 장군의 제2군과 모의전을 치렀다. 루이지애나 기동훈련은 교리와 장비의 시험대로서 고급 장교들에게 제대를 직접 기동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 때 크루거는 현대전에 완전히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전선을 급격하게 움직이는 기동전을 선보이는 한편 조지 S. 패튼의 제2기갑사단을 통해 대우회기동을 실행함으로써 리어의 제2군을 꺾었다. 크루거는 지휘에서 완전히 자신감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이 때 친구에게 쓴 편지를 보면 "내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롬멜에게 '롬멜'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기도 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There's nothing that I should like better than to have a command at the front. I should love to try to "rommel" Rommel. However, I am sure that younger men will be selected for tasks of that nature, in fact for all combat commands. I shall be 62 this coming January 1943, and though I am in perfect health, can stand a lot of hardship and people tell me I look and act ten years younger, I do not delude myself.
전선에서 지휘하는 것보다 좋은 건 없는 것 같아. 롬멜에게 "롬멜" 하는 것도 재미있을테지. 하지만 그런 건 더 젊은 사람들이 맡을 건 뻔해. 1943년 1월이면 예순둘이야. 비록 나는 무척 건강하고 남들이 말하길 내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인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속여넘길 생각은 없네.


그러나 크루거의 예상과는 달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서 제6군 사령관을 맡아 전선에 서게 되었다. 크루거는 비록 맥아더와 같이 전쟁계획국에 소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맥아더가 그를 콕 찝어 요청하자 꽤 놀랐다고 한다. 그의 제6군은 남서태평양해역군 예하로 비스마르크 군도 전역부터 투입되었다.

크루거는 제6군 사령관으로서 정보를 수집하려 했으나 해군의 협조가 미진했고, 육해군의 협조에 불협화음이 계속 발생하자 스스로 정찰대를 만들어 편성했다. 이들이 알라모 정찰대로 전쟁 기간 중 106회의 임무를 수행했다.

제6군은 뉴기니에서도 여러 작전을 동시에 전개하였으며 타나메라, 훔볼트 만, 아이타페 등에서 동시에 전투를 치렀으며 모두 승리했다.

1944년 9월 크루거와 제6군은 필리핀 탈환전에 투입되었다. 10월 제6군은 레이테 공략을 나섰으나 태풍이 닥쳐 일정이 다소 연기되었고, 일본군은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실제로 일본군은 5개 사단과 2개 혼성여단이 증원되었다. 이 때까지 잘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제6군은 레이테 탈환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신속하게 기동하여 일본군을 몰아붙이는 것이 정답이었으나, 크루거는 과거 본인이 보여줬던 기동전을 선호하는 모습과 달리 신중하게 움직였고 일본군이 준비할 시간을 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레이테 섬의 공략에는 필요 이상의 희생이 발생하고 말았다.

1945년 루손 섬 탈환전에서 비로소 크루거는 자신의 장기인 대부대 지휘를 발휘할 기회를 얻었다. 이전까지는 전장이 태평양의 군도였기 때문에 대부대가 기동할 공간이 없었고 부대를 여러 갈래로 쪼개 동시에 작전을 벌이는 형태였지만 루손 섬은 가운데에 넓은 평원을 끼고 있어 대부대 지휘가 가능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루거는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전개시킨 일본군 제2기갑사단을 격파하고 일본군의 초기 저항을 완전히 꺾었다. 크루거는 야마시타의 기갑부대 운용이 어설펐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기갑사단을 미군과 정면대결 시키는 대신 방어지점 중 취약한 지점을 보강하는 방식으로 쓰는 편이 미군의 희생을 더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맥아더는 마닐라에 일본군의 병력이 별로 없을 것이라 여겨 크루거에게 마닐라 공격을 독촉했다. 맥아더의 정보 참모인 찰스 윌로비 준장이 일본군은 17만여 명만 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일본군이 마닐라를 포기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저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크루거의 정보 참모 호튼 화이트 대령은 23만여 명이 있다는 보고를 올린 상태였기 때문에 크루거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마닐라에 29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독촉에 따라 크루거는 마닐라로 진격하여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큰 희생을 치르고 말았다.

1945년 3월 크루거는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점령군으로 혼슈 서부 지역에 진주했으며, 전후 군축이 본격화되면서 1945년 12월 31일 제8군에 임무를 인계할 때까지 주둔하였으며, 1946년 1월 25일 임무가 해제되었다. 크루거는 그대로 예편하였다. 제6군을 지휘한 공로로 크루거에게 수훈십자장과 2번째 육군 공로훈장, 해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으며 일본 점령군 임무를 수행한 공훈으로 3번째 육군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8. 이후[편집]


퇴역한 크루거는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 정착했다. 그간 관사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때 처음으로 집을 한 채 장만했다고 한다. 전쟁 기간 동안 밀린 어마어마한 소득세 때문에 집을 바로 구매할 수가 없어서 그의 친구들이 기금을 조성해서 도와줬다고 한다. 퇴역한 뒤 그는 적십자 등 여러 자선활동에 참여했다. 정보 참모였던 호튼 화이트 대령이 자서전을 집필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대신 제6군의 전공을 편찬하기로 했다. 그 전공 기록은 1953년에 출간되었다.

이후로도 여러 전우들과 연락을 지속하던 크루거는 맥아더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기도 하고 육군의 여러 학교에서 강연을 하거나 시민들에게 강연하기도 하면서 지내다가 1967년 8월 20일 펜실베이니아의 밸리포지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한 후 그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9. 매체에서[편집]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 미국의 장군으로 등장. 좋은 스탯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갑 지휘관 적성이 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는 육군참모총장으로도 임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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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my Distinguished Sevice Medal[2] Navy Distinguished Service Medal[3] 독일 국적이었을 당시에는 발터 크뤼거로 불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성을 보면 Krüger이다.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Krueger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4] 현재는 폴란드 영토에 속한다.[5] 둘 사이에서는 아들 2명과 딸 1명이 태어났다. 아들 두 명은 모두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장교가 되었으며 딸 역시 육군 장교와 결혼하여 군인 집안이 되었다.[6] 미국이 전쟁에 참여할 일이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고 군축이 심각하게 이루어질 때였다. 아무리 유망한 장교라도 진급이 보장되지 못했다.[7] 후일 플라잉 타이거즈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8] 3개 연대로 사단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사단에 2개 여단을 두고 여단 아래에 2개 연대를 두어 4개 연대로 1개 사단을 구성하고 있었다.[9] 이 때 2사단에 속했던 장병들은 스스로를 "블리츠크뤼거(Blitzkrueger)"라고 불렀는데 이는 전격전의 독일식 명칭인 "블리츠크리그(Blitzkrieg)"와 크루거의 이름을 섞은 말장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