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2세 헥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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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1505년 1월 13일 ~ 1571년 1월 13일
재위기간 : 1535년 7월 11일 ~ 1571년 1월 13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종교개혁을 실시하여 루터파를 받아들였으며, 프로이센 공국 상속의 기반을 마련하여 훗날 독일을 통일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기틀을 닦았다.


2. 생애[편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르덴마크-노르웨이의 엘리자베트의 맏아들로 그의 숙부는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한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푸거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빚을 져가면서 선제후 자리에 오른 알브레히트를 좋게 보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 종교개혁에 헌신한 오촌 아저씨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루터파에 호의를 보였다.

부친 요아힘 1세는 가톨릭 신봉자였으나 부인 엘리자베트와 종교개혁 문제로 충돌했고, 부인이 작센 선제후국으로 도망간데에 굴욕감을 느껴 분사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물려받은 초창기에는 루터파에 대한 탄압도, 가톨릭에 대한 지원도 하지 않고 방관하다가 1539년 슈판다우(Spandau)[1]에서 마르틴 루터의 주관으로 루터파로 개종했다. 단, 이는 개인적인 개종이었을 뿐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국가적인 개종은 보류하고 있었다. 이후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도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헝가리 왕국 전역에 참전했으나 수준 미달의 지휘력만 보이며 물러났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루터파가 공인되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국가단위 개종을 시행하였으며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튼튼히하고자 했다. 또한 오촌 아저씨인 알브레히트가 1568년 죽고 어린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즉위하자 후견인을 맡았으며 프로이센 공국의 종주권을 가진 폴란드 왕국 국왕 지그문트 2세와 협상하여 프로이센 공국 호엔촐레른 가문 가계가 단절되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협약을 체결했다.

1571년 자신이 건립한 쾨페니크(Köpenick)[2] 궁전에서 사망했으며 첫번째 부인 작센의 마그달레나와의 사이에서 얻은 요한 게오르크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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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는 베를린로 편입되었다.[2] 슈판다우와 마찬가지로 현재 베를린 외곽이며 쾨페니크 궁전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