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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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부여
이름
자신 (自信), 자진 (自進)
관직
달솔 → 좌평[1]
대금하 (大錦下)[2]
생몰년도
미상
국적
백제일본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백제의 왕족[3]이자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유민. 기록상으로는 성씨를 '여씨'로 축약 표기한 '여자신(余自信)' 또는 '여자진(餘自進)'으로 기록되어 있다. 귀실복신, 도침, 흑치상지백제부흥운동의 주요 인사였다.


2. 생애[편집]


660년, 백제가 멸망할 무렵에 당시 관등은 달솔이었다. 백제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혹은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4]에서 거병했다. 백제의 패잔병들을 규합하고, 신라군을 격파하여 백제 사람들은 그를 귀실복신과 함께 '좌평(佐平)'으로 높여 불렀다고 한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패퇴하자, 동년 9월 24일에 부여자신은 일본 수군과 함께 탈출해 궁례성[5]에 이르렀다. 이후 다음날인 9월 25일에 출발하여 달솔 목소귀자, 곡나진수, 억례복류 등과 함께 일본 열도로 망명했다.

669년, 부여자신은 귀실집사 등 백제 유민 700명과 함께 일본 칸자키군(神崎郡)의 서남쪽에 옮겨 살게 되었다.

671년 정월, 사택소명(沙宅紹明)과 함께 종4위 대금하(大錦下)의 관직을 제수받고 법관대보로 임명되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타카노노 미야츠코(高野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6]


3. 기타[편집]


백제부흥운동 초반부터 거병했고, 좌평직을 맡을 정도로 고위직이긴 했지만 귀실복신, 도침, 부여풍, 흑치상지보다 기록이 한참 부족한 인물이다.

백제 부여씨 왕족 출신이나 그가 활동했던 시기인 의자왕, 부여풍과의 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왕족이었음에도 일본에 있는 부여풍을 부흥군이 국왕으로 추대한 정황으로 미뤄보면, 직계 왕족이 아닌 방계 왕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난 이후에도 그가 아닌 부여선광에게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즉 백제의 왕(건길지)이란 성을 내렸다는 일본 측 기록을 보면 부여자신은 의자왕 직계는 아닌 것으로 보이며 특히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게 맞다면 31대 의자왕 대에는 당연히 이미 방계 중의 방계였다고 볼 수 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여자진(부여자신)을 도침으로 비정하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도침은 명백히 귀실복신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부여자신은 백제부흥운동 이후에도 살아남아 일본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으므로 동일인일 가능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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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좌평을 자칭했거나, 백제부흥군 내에서 좌평으로 임명되었던 걸로 추정된다.[2] 671년 일본 조정에서 하사받은 관직.[3]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간무 덴노의 생모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조상인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추정된다.[4] 각각 웅진성, 주류성으로 비정된다. 다만 백제부흥군이 웅진성, 사비성 탈환에 실패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웅진성 '부근'에서 활동했다고 봐야할 듯.[5] 지명 미상. 다만 여기서 출발해 일본으로 망명한 점을 미뤄보면 백제 서남해안 지역 중 어딘가로 추정된다.[6] 右京 諸蕃 百濟 高野 造 百濟國人佐平余自信之後也. 타카노노 니이가사와 '우지(氏)'는 '타카노(高野)'로 같은데 '카바네(姓)'가 '미야츠코(造)'로 다르다. 니이가사 가문의 경우 카바네가 '아손(朝臣)'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