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숭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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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楊崇禮
(? ~ 738년 이전)

당나라의 관료. 본인의 열전은 없으나 구당서신당서에서 아들인 양신긍의 열전을 통해 그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수나라 황실의 후손으로 수문제 양견의 현손이며 증조부는 수양제 양광, 조부는 제왕(齊王) 양간, 부친은 양정도(楊政道)였다.

초명은 융례(隆禮)로 측천무후가 재위한 장안(長安) 연간[1]에 천관낭중(天官郞中)을 지냈다.

705년, 신룡정변으로 측천무후가 퇴위하고 중종이 복위한 뒤 낙주(洛州), 양주(梁州), 활주(滑州), 분주(汾州), 회주(懷州)의 자사를 역임하며 모두 청렴함과 엄정함은 물론 관리들을 살피고 은닉을 근절한 것으로 칭송받았다.

경운(景雲) 연간[2], 태자 이융기의 이름을 피휘하고자 이름을 숭례로 고쳤다.

현종이 즉위한 뒤 양숭례는 태부소경(太府少卿)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돈과 비단은 풍족했지만 양숭례는 직접 물자의 출납을 살펴서 당시 사람들은 전후로 태부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양숭례와 견줄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뒤에 양숭례는 태부경(太府卿)으로 발탁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으며 작위가 홍농군공(弘農郡公)으로 올라갔다. 양숭례는 20년 동안 태부에 재직하면서 한결같이 청렴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90대의 나이에 접어든 양숭례는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물러났다. 당시 당나라는 개원지치의 태평성대 속에 있어서 국고의 재물이 산처럼 쌓였고 사람들은 양숭례의 점검을 거친 물자들은 모두 정확하다고 여겼으며 매년 수백 만 관에 달하는 비용을 절약했다.

양숭례가 죽은 구체적인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양신긍이 738년에 상을 마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숭례는 슬하에 세 아들로 양신여(楊愼餘), 양신긍(楊愼矜), 양신명(楊愼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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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01년 ~ 705년[2] 710년 ~ 7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