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룡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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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정변
神龍政變

시기
705년
장소
무주의 수도 낙양
원인
측천무후 재위기의 폐단에 대한 신료들의 불만
교전세력
측천무후 파벌
환언범 파벌
지휘관
황제 무조
장역지
장창종
환언범
장간지
경휘
원서기
최현위
태자 이현
이다조
양원염
결과
측천무후의 퇴위
중종의 제위 복위
영향
무주의 멸망
당나라의 부흥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짐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공신들의 어이없는 최후
5. 신룡정변 이후
6. 기타



1. 개요[편집]


神龍政變

705년 장간지, 최현위, 경휘, 원서기, 환언범 등의 대신들이 측천무후를 퇴위시키고, 태자인 이현을 복벽시켜 당나라를 부흥시킨 궁중 쿠데타이다.


2. 배경[편집]


683년 제3대 황제인 당고종이 죽고, 고종의 태자인 이현이 제4대 황제인 당중종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중종의 모후인 측천무후가 섭정을 맡았는데, 중종은 장인인 위현정을 시중으로 내정하는 문제로 대신들과 대립하다가 측천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다. 측천무후는 중종의 아우인 상왕 이단을 제5대 황제인 당예종으로 앉히고 섭정을 하다가, 690년에는 무주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여성 황제의 시대를 열었다.

측천무후는 공포 정치 속에서 안정적으로 내치를 정비하였지만, 측근 관리에는 실패하여 각종 폐단이 발생하였다. 특히 측천무후의 측근들 중 장역지, 장창종 형제는 측천무후로부터 받은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705년 측천무후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장역지, 장창종 형제는 이 틈을 타서 더더욱 전횡을 부리게 되었고, 대신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3. 전개[편집]


신룡정변의 주도자격 인물인 장간지는 적인걸과 요숭의 추천을 받아 측천무후의 재상이 된 인물이었다. 장간지는 장역지, 장창종 형제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궁중 쿠데타를 모의한다. 장간지는 믿을만한 인물과 우림군의 장령들과 연락을 나누어 주도자들을 모으는데, 이들이 바로 경휘, 환언범, 원서기, 최현위 등이었다. 당시 무주의 태자였던 당중종이 북문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장간지 등은 중종과 연락을 주고받아 당나라 부흥 계획을 모의하였고, 중종이 여기에 동의하였다.

장간지와 환언범은 경휘와 함께 이다조, 양원염 등 우림군 장병들을 이끌고 쿠데타 준비에 착수하였고, 동궁으로 가서 중종을 맞이한다. 측천무후가 영선궁에서 병을 요양하고 있던 와중에, 장간지와 환언범 등은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를 주벌하고, 병상에 있는 측천무후에게 퇴위를 압박한다. 측천무후는 장간지 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태상황으로 물러났고, 중종은 다시 복위한다. 비록 측천무후가 당을 일시적으로 멸망시킨 장본인이나 중종과 예종의 친모이고 현종의 친조모라서 당나라 황실 혈통은 결국 측천무후의 자손들이 된다. 그렇기에 괜히 해를 끼치기라도 했다가는 친모를 핍박하고 해쳐 보위에 오른 역적이자 패륜아의 자손이라는 오명이 남는다. 그리고 측천무후 본인이 순순히 물러난데다 고령에 병까지 있어 오래 살기 힘들었으니 기를 쓰고 죽일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한편 주벌되었던 장역지, 장창종 형제는 천진교에 효수되었는데, 효수된 두 형제를 목격한 백성들은 만세를 불렀다.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더불어 주벌된 형제는 장창의(張昌儀), 변주(汴州) 자사 장창기(張昌期)와 사농소경(司禮少卿) 장동휴(張同休)였는데, 이들도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더불어 전횡을 부렸기에, 이들의 죽음에도 백성들은 기뻐해 마지 않았다. 아울러 조정에서는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관련된 관원 수십 명이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주벌된 이후 폄관[1] 당하였다.

하지만, 장간지 일파는 자신들에게 어이없는 최후가 다가온다는 것은 예측하지 못하였다.


4. 공신들의 어이없는 최후[편집]


신룡정변을 일으킨 공신들은 이후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였다. 측천무후의 조카무삼사는 환언범 일파가 무씨를 모두 제거하려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무삼사는 중종의 황후인 위황후와 합작하여, 환언범 일파를 모함하였다. 우선 환언범 일파의 작위를 군왕으로 올리고 그들을 특진으로 임명하였으며 지정사에서 파하였다. 당시 지정사는 재상에 준하는 직책으로, 특진은 명예직이었기에, 겉으로는 환언범 일파에 대한 존중을 담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실권을 빼앗은 것이었다.

환언범 일파가 실권을 잃고 얼마 뒤, 왕동교가 위황후 폐위를 꾸미려다가 계획이 누설되는 사건이 있었다. 무삼사는 왕동교의 반란 미수를 이용하여 환언범 일파가 왕동교와 공모하여 위황후를 폐위하려 했다고 중종에게 참소하였다. 무삼사는 또 황후의 더러운 행실을 따지는 벽보를 붙여, 이 벽보를 작성한 것을 환언범 일파로 돌려, 결국 환언범 일파를 완전히 조정에서 몰아낸다. 무삼사는 환언범 일파의 삼족을 멸해야 한다고 중종에게 풍간하였으나, 중종은 환언범 일파가 세운 공을 생각해서 그들을 유배 보내는 선으로 마무리지었다. 무삼사는 이들이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자신이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독단적으로 환언범 일파를 살해한다.

사실 환언범 일파의 대응에도 부족한 면이 있었는데, 유유구와 낙주 장사였던 설계창은 환언범 일파에게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죽였지만, 잠재적인 위협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무삼사 일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하지만 환언범 일파가 설계창의 조언을 듣지 않자, 설계창은 자신이 어디에서 죽을지 모른다고 한탄하였다.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주벌했다고는 하지만, 무삼사 일파를 그대로 남겨놓은 것은 환언범 일파의 실책이었다.


5. 신룡정변 이후[편집]


신룡정변의 공신들을 축출한 무삼사와 위황후는 당나라의 정국을 주물렀고, 이는 중종의 태자인 이중준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중준은 중종에 의해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위황후의 소생이 아니었고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매도를 견디지 못하여 신룡정변 1년 뒤에 궁중 쿠데타를 시도하여 무삼사와 무숭훈을 죽였으나 위황후를 죽이는 데에는 실패하고 결국 살해당했다.[2]

위황후는 신룡정변의 공신들을 축출하고 이중준을 죽인 뒤 권력욕을 드러냈고, 딸인 안락공주를 황태녀로 만들기 위하여 710년 중종을 독살하였다. 위황후는 중종의 4남인 이중무를 꼭두각시로 앉히고 황태후로 수렴청정을 하면서, 중종의 아우인 당예종태평공주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예종의 아들인 이융기는 위황후의 이런 움직임을 알아채고 태평공주와 함께 궁중 쿠데타를 일으킨다.

6. 기타[편집]


환언범, 장간지, 원서기, 경휘, 최현위는 구당서신당서 열전에서 한데 수록되어 있다. 신당서에서는 그들이 받은 작호를 따서 오왕전(五王傳)으로 한데 묶어 기록한다. 그래서 신룡정변은 오왕정변(五王政變)으로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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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천 내지 파면을 두루 일컫는 표현[2] 무측천을 퇴위시키는 데 일조한 말갈족의 후예인 이다조백제인 출신 장수 사타충의도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