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요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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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요시코
山口 淑子(やまぐち よしこ | Shirley Yamaguchi[1]


파일:이향란.jpg

본명
大鷹 淑子(おおたか よしこ (오오타카 요시코)[2]
중국명
李香蘭 (이향란)
출생
1920년 2월 12일
중화민국 봉천성 봉천시 북연대(北煙台)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덩타시)
사망
2014년 9월 7일 (향년 94세)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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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65cm, O형
배우자
노구치 이사무(1951년 결혼 – 1956년 이혼)
오오타카 히로시(1958년 결혼 – 2001년 사별)
정당


의원 선수
3 (참)

1. 개요
2. 생애
3. 소속 정당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만주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일본가수, 배우, 정치인.


2. 생애[편집]


야마구치 요시코는 1920년 2월 12일 중국 동북부 봉천(오늘날의 선양)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사가현 출신의 한학자였으며, 부친이 1906년 만주로 이주하여 만철의 직원으로 있었다. 중국어를 가르쳤던 부친의 영향으로 중국어에도 능통하였으며, 1933년 봉천에서 우연히 가곡 발표회에 출연했다가 일본 군부의 눈에 띄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1943년에 중국에서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아편전쟁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만세유방(萬世流芳)>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여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1938년에 배우로서 데뷔했던 곳이 만주영화협회였고, 전속배우로서 활동한 경력이 전후에 문제가 되었다.

당시 야마구치는 이향란(李香蘭)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중국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일제의 선전영화에 계속해서 출연했으니 한간(漢奸)죄가 성립했다. 그 혐의로 중화민국에 기소되어 군사재판까지 가게 된 것. 중국어 실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일본 호적을 제출하기 전까지는 모두들 중국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라는 게 확인되어 국외추방의 형식으로 귀국했다. 이 때 재판을 담당한 재판관은 '본 법정은 중국인이면서 중국을 배신한 한간을 재판하는 곳이므로 일본국적을 완전히 입증한 당신은 무죄이다. 하지만 논리상, 도의상의 문제는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중국인의 이름으로 <지나의 밤> 등 일련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다. 법률상 한간 재판과는 무관하나 본 법정은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덧붙였고,[3] 이에 그녀는 '젊어서 그런 게 아니고 생각을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고 사죄했다.

1946년 일본으로 귀국하였으며, 1950년에는 미국으로 진출하여 셜리 야마구치(Shirley Yamaguchi)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일본계 미국인 이사무 노구치와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고, 1952년부터 1958년까지는 홍콩에서 활동했다. 1958년 외교관과 결혼(재혼)으로 연예계를 은퇴했다.

이후 1969년 일본의 와이드쇼 프로그램 사회자로 방송에 복귀하였고 유럽, 중동, 동남아 지역을 다니며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고 팔레스타인 여성해방 운동을 인터뷰하는 등 세계 분쟁 지역을 다니는 준언론인으로 활동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74년, 1980년, 1986년 참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환경청 정무차관을 지냈으며 1987년 자서전 「두 개의 이름으로」를 발간하여 자신의 부끄러웠던 만주국 배우생활에 대해 고백하였다.

한편으로는 홍콩에서 배우로 활동했고 동시에 주제가 앨범이 발매되면서 다시 이향란의 이름을 중국어권에서 부활시키기도 했다.

1974년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 1992년까지 국회의원을 지냈다.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요청하면서 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에 다나카파였지만 이미 선거출마 시점에서 다나카의 지지율이 20%에 머무를 정도로 이미지가 나빴던 상황[4]이었고 결정적으로 록히드 사건 이후로는 미야자와 기이치 파로 돌아선다.

1992년에 정계에서 은퇴하고 나서는 2차 대전의 피해자들을 위한 국제 활동가로 변신해 위안부 문제 일본 측 대표 단체인 아시아여성기금 부총재를 지내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2014년 9월 7일 심부전으로 인해 향년 94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 치요다구에서 사망하였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71 - 2014
정계 입문
정계 은퇴


4. 여담[편집]


  • 우에토 아야 주연으로 2007년 야마구치 요시코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이향란(李香蘭)이 방영된 적이 있다.

  • 등려군의 노래로 알려진 夜來香(야래향)과 何日君再來(하일군재래, 님은 언제 다시 오시나)는 사실 이 사람의 원곡이다. 1990년대에는 장학우가 이 사람과 동명의 광동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5]

  • 홍콩 스타 장학우가 그녀의 이름으로 부른 곡이 대히트를 쳤다. 1990년 대히트 앨범 夢中的你(몽중적니) 수록곡으로 지금 듣기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명곡이다. 주성치가 1994년 영화 007 북경특급에서 이 곡을 피아노에 맞춰 직접 부르기도 했다.

  • 서울에는 1944년 일제의 국책영화 촬영을 위해, 1972년에 주한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방문하러 온 적이 있다.# 1975년에는 자민당 의원단의 일원으로 방북,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 2013년 9월 22일에 방영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596의 서프라이즈 시크릿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 참고로 해당회차 방영당시에는 야마구치 요시코 본인은 아직 생존해있었던 상태였다.

  • 만주 아편 스쿼드에서 이향란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되는 '리 야오리'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일본 이름은 야마우치 요코.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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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진출 당시 예명.[2] 결혼 전 본명은 예명과 동일한 야마구치 요시코.[3] 당시 이향란을 보는 중국인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리라.[4] 다나카 총리가 왜 이렇게 인심을 잃었는지는 해당 문서를 열람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결국 다나카는 이 곤두박질친 지지율을 이기지 못하고 미키 다케오에게 정권을 넘겨준다. 물론 정권만 포기했지 막후 실권 포기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일본 정계에 그림자처럼 있었다.[5] 주성치 주연의 영화 007 북경특급에서 본드걸로 나온 이향금(원영의)의 어머니라는 설정이다. 극중에서도 주성치가 전술한 장학우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