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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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선언 내용
4. 안토니우스의 동기
5. 후폭풍



1. 개요[편집]


Donations of Alexandria

기원전 34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르메니아 왕국을 정복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대중 앞에서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녀들에게 로마와 파르티아가 소유한 땅을 나눠주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선언한 사건. 이로 인해 제2차 삼두정치가 해체되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내전이 발발했다.


2. 배경[편집]


기원전 42년 10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로마 전역을 장악한 두 사람은 로마를 지키고 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관할 구역을 삼분했다. 필리피 전투의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안토니우스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시리아 등 지중해 동방 전역을 차지했으며, 이전부터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갈리아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히스파니아를 가졌고, 필리피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이탈리아를 지켰던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탈리아는 명목상 공동 관리 구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가졌다.

동방 전역을 이끌게 된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추진하다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시행하지 못했던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군자금 확보를 위해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불러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허영심과 자부심이 대단하기로 유명한 안토니우스의 성격을 이용하여 그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로 하고, 여신이 지상에 하강한 듯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안토니우스는 곧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두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깊은 사랑을 나누었고,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낳았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밀월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 서방과 동방에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먼저, 서방에서는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아내 풀비아가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페루시아 내전을 일으켰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게 패배해 페루시아에 갇혔다.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는 사전에 별다른 지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내전이 안토니우스가 원하는 건지 확신하지 못해, 페루시아에 고립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쉽사리 돕지 않았다. 또한 동방에서는 파르티아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시리아, 유대 속주를 석권하고 소아시아까지 침공해 킬리키아를 손아귀에 넣었다.(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안토니우스는 일단 그리스로 이동한 뒤 상황을 지켜봤지만,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내전을 일으켰다가 페루시아에 고립된 동생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삼아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동맹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르티아에게 잠식되어가는 동방 쪽에도 이렇다할 방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 동생이 항복하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보내진 후인 기원전 40년 5월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으로 진군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치했다. 양측 병사들이 싸우길 원하지 않았기에 몇달간 협상한 끝에 그해 10월 브룬디시움 협약을 체결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지배는 공인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새 아내가 되었다. 여기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옥타비아누스에 맞섰다가 망명한 인사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 문제를 매듭짓고 그리스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11개 군단, 기병대, 투석병을 집결시켰다. 그렇지만 이 병력이 모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단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게 2개 군단을 맡겨 소아시아를 침략하고 있는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저지하게 했다. 시간을 벌 요량으로 보낸 것이었지만, 벤티디우스는 기대 이상의 대활약을 하여 기원전 38년까지 파르티아군을 모조리 격파하고 잃어버렸던 동방 영토를 전부 되찾았다. 벤티디우스는 로마로 돌아가 개선식을 거행했지만, 안토니우스로부터 다시는 기용받지 못했다. 혹자는 이에 대해 부관이 자신보다 높은 명성을 얻을 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침략 행위를 자행한 파르티아를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병력을 시리아로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기원전 37년 봄, 그는 타렌툼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만나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 삼두의 임기를 5년 연장하기로 했으며, 안토니우스는 시칠리아 내전을 벌이고 있는 옥타비아누스를 돕기 위해 130척의 함선을 즉시 보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대가로 시칠리아 내전을 마무리하는 즉시 2만 군단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안토니우스는 뒤이어 이집트로 가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만나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36년 초, 시리아에 자리잡은 그의 기지에 16개 군단 60,000명, 10,000명의 이베리아 및 켈트족 기병, 30,000명의 동맹군이 집결했다. 여기에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7,000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한 2만 군단병은 시칠리아 내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내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는 이 정도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여겨 옥타비아누스의 지원 여부에 개의치 않았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다.(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만약 이 원정이 성공했다면, 그는 불후의 명성을 얻고 로마 최강의 권력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35,000명에 달하는 로마군 및 동맹군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여기에 유능한 부관이었던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 플라비우스 갈루스 등이 전사했다. 안토니우스가 생존자들을 안티오키아에 집결시켰을 때, 아내 소 옥타비아가 병사들에게 줄 돈, 보급품, 옷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또한 2,000명의 완전무장한 군대를 추가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한 2만 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 또 너무 늦었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시칠리아 내전을 치르는 그를 돕기 위해 파견한 120척 중 85척만 돌려보냈다.

안토니우스는 이에 분노했고, 소 옥타비아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온 건 그대로 보내되 당신은 로마로 돌아가라"고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누나가 받은 모욕에 복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벌이려 했지만, 소 옥타비아가 자신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자 결국 취소했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지내며 기원전 35년/34년 겨울을 보냈고, 기원전 34년 봄 원정 도중에 배신한 아르메니아를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해 15일만에 제압하고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체포해 알렉산드리아로 압송시켰다. 그 후 메디아로 진군하여 파르티아에 반기를 든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의 딸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약혼시켰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귀환한 뒤 기원전 34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전통인 개선식을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거행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로마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중 앞에서 충격적인 선언을 발표한다.


3. 선언 내용[편집]


아르메니아 군주 아르타바스데스 2세와 아르메니아인들을 전리품으로 내세운 개선식을 마무리한 뒤, 안토니우스는 시민과 구경꾼들을 알렉산드리아 체육관 앞에 집결시켰다. 그 후 디오니소스 또는 오시리스로 분장한 안토니우스와 이시스 또는 아프로디테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황금 왕좌에 앉았다. 그 뒤에는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로 분장한 카이사리온과 비슷한 복장을 한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앉혔다. 그 후 그는 대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1.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왕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과 함께 공동으로 통치한다.

2.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메디아, 파르티아, 아르메니아를 통치한다.

3.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 페니키아, 킬리키아를 통치한다.

4.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통치한다.

5. 카이사리온은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며, 이집트의 왕중의 왕이다.



4. 안토니우스의 동기[편집]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은 당대 로마인들에게 여러모로 충격적인 선언이었으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주술에 홀려 이런 짓을 했다는 주장까지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려서 별다른 생각없이 이런 선언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며, 그에게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 추정한다.[1] 또한 안토니우스에게 패배를 안긴 파르티아까지 언급한 것을 근거로, 이 선언은 당장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청사진을 밝힌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2][3]

기원전 36년 파르티아 원정을 야심차게 단행했으나 뜻밖의 참패를 겪은 뒤, 안토니우스는 패배의 원인이 아르메니아의 비협조와 배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했던 2만 군단병을 제때 보내주지 않다가, 패전 후 시리아에 도착하여 재차 요청한 후에야 10분의 1밖에 안 되는 2천 명을 누나 소 옥타비아에게 맡겨 보낸 것에 심한 모욕을 느꼈다. 플루타르코스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이후로 술독에 빠져 지내며 클레오파트라에게 더욱 의지했다고 한다. 이렇듯 속국의 왕이 배신하고 서방의 지배자 옥타비아누스는 비협조로 나오는 상황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자식까지 낳아준 클레오파트라는 더없이 든든한 파트너로 보였을 것이다.

기원전 66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착수한 후 셀레우코스 제국을 병합하고 유대를 속국으로 삼는 등 동방 질서를 자신의 뜻대로 개편하고 원로원의 승인을 받은 폼페이우스의 사례가 있듯이, 로마 공화국은 각 지역에 파견된 총독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영토를 분할하거나 합병하는 것을 대체로 용인했다. 기원전 37년 타렌툼 협약에 따라 동방에서 절대적인 통치권을 인정받은 안토니우스 역시 자기 뜻대로 체제를 개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로마법상 불법은 아니었다.[4]

이렇듯 절대적인 권력을 갖춘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자식들을 위주로 동방 질서를 개편하는 건 매우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5] 아르메니아 국왕처럼 신용할 수 없는 속국 군주를 자기 자식으로 대체한다면, 그가 동방을 확고히 장악할 발판이 될 것이었다. 역사가 엘리너 휴저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할 때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을 확실히 받기 위해 그녀를 정식 아내로 인정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자신의 정치적 터전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이미 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파르티아와 메디아까지 자식들에게 분할하겠다고 한 대목은 장차 원정을 다시 일으켜 파르티아를 굴복시키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로 공인한 것 역시 중요한 대목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중에서 누가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인지를 놓고 경쟁이 줄곧 벌어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유언장에서 자신을 양자로 삼은 걸 근거로, 자신이 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6] 그런데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친아들이라고 선언해,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위상을 훼손시키려 들었다. 즉,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지위를 도용한 찬탈자에 불과하다는 주장인 것. 또한 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카이사르의 유일한 아들의 어머니라는 지위를 부여했다는 의미도 가진다.[7]


5. 후폭풍[편집]


안토니우스에게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단이었을 테지만, 이 선언은 로마인들에게 극심한 충격과 분노를 야기했다. 우선 개선식은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위인데,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한다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다른 나라나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친다는 의미였고, 이는 로마의 수호신들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또한 동방 영토는 원래부터 그에게 주어진 땅이 아니라 로마의 역대 명장과 병사들이 피땀을 흘러가며 쟁취한 것이었으며, 로마에게 있어 막대한 세입과 곡물이 들어오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와 자식들에게 분할하겠다는 것은 로마 시민들이 절대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파르티아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이전의 여론전에서는 안토니우스 파가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기원전 37년 타렌툼 조약에 따라 120척의 함대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줘서 시칠리아 내전의 승리에 기여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2만 군단병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고작 2천 명만 보내는 등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3두 중 한 명인 레피두스가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속주를 빼앗고 그를 일개 시민으로 살게 만든 점[8] 역시 안토니우스 파에게 두고두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소재였다.[9]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은 정치적 명분에서 불리한 처지였던 옥타비아누스가 역공을 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음해하는 갖가지 소문을 퍼트렸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괴상한 복장을 하고 술에 취하여 알렉산드리아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시정잡배들과 함께 희곡을 즐긴다는 설, 클레오파트라가 마약이나 마술로 남자를 최면에 빠뜨리는 요술이 뛰어난 마녀라는 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밤새도록 난잡한 섹스 파티를 벌인다는 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여기에 그들의 음란한 성관계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서 로마 시민들에게 은밀하게 배포하기도 했다.시민복지

안토니우스 진영은 이에 대항하여 옥타비아누스의 문란한 사생활을 꼬집는 갖가지 소문을 유포시켰다.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처녀나 기혼 여성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납치해 노예를 다루듯이 옷을 벗겨서 몸매를 감정한 후, 그에게 갖다 바치는 심복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둘째 아내였던 스크리보니아가 쫓겨난 이유도 그녀가 남편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질투심을 보였기 때문이며, 그가 리비아 드루실라를 셋째 아내로 성급하게 맞아들인 이유도, 결혼식 이전에 이미 은밀한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가 어렸을 때 카이사르에게 몸을 판 매춘 소년이었다는 소문까지 퍼트렸다.

이렇듯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과 뒤이은 악색선전으로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지만, 안토니우스파였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이우스 소시우스가 기원전 32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영향력은 아직 강력했다. 두 집정관은 안토니우스의 분할령을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성토하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서를 공개해, 그의 정치적 명분에 치명타를 가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문제의 유언서는 베스타 여신을 지키던 사제 처녀들에게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 진영에 속해 있다가 옥타비아누스파로 변절한 마르쿠스 티티우스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유언서가 숨겨진 장소를 밀고해서 옥타비아누스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신성모독죄를 무릅쓰고 이를 탈취해 선동의 도구로 이용했다. "내가 죽으면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유서가 진짜인지 위조된 것인지 여부는 오래도록 논란이 이어졌다. 로마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로널드 사임 교수는 이 유언서가 진본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로버트 존슨 등은 유언서가 진본이라고 주장했으며, 현재 역사학계는 유언서가 진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10]

유언장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안토니우스를 회복 불가능한 궁지로 내몰았다. 이 유언장은 옥타비아누스 진영이 그간 소문으로만 퍼뜨렸던 온갖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의 구실을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광범위한 정치조직을 동원하여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의 동의 없이 로마의 속국들을 불법적으로 분할했다는 주장, 정실부인인 소 옥타비아를 내쫓고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는 주장, 카이사르의 적장자로 카이사리온을 지명했다는 주장,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히고 싶어한다는 주장 등을 유포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이에 안토니우스를 마녀의 유혹에 빠진 얼간이로 여기게 되었고, 이제까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야욕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중립적인 인사들까지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기원전 32년 10월 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설득해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아테네에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안토니우스 편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안토니우스에게 로마의 악화된 여론을 전하면서,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투쟁을 로마와 이집트 여왕의 전쟁으로 왜곡시킨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저들이 자신에게 전쟁을 선포한 이상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히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전쟁은 발발했고,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참패하면서 승부는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기울어졌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고, 알렉산드라 영토분할령은 무효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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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아무리 생각이 있었다고는 해도 함부로 입 밖으로 낼 만한 내용은 아니다. 이걸 입 밖에 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토니우스는 생각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2] 사실 안토니우스 입장에서는 승부수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애시당초 아무리 세력 면에서는 안토니우스가 강력하긴 했지만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후계자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은 결코 안토니우스로서는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당장 몇 번이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충돌할 뻔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주위에서는 카이사르의 아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꺼려 말렸던 적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로 로마인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다면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명분을 훼손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또 안토니우스는 실제로 그렇게 주장했다.[3]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명분은 대단히 강력해서 이미 옥타비아누스는 이 명분만으로 삼두의 다른 한 축이었던 레피두스를 말 그대로 묻어버리기까지 했는데, 무려 레피두스의 진영 안에 직접 가서 레피두스의 병사들에게 배신을 권유했고, 이들은 정말로 옥타비아누스에게 넘어가 버렸다. 이게 안토니우스에게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고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에는 상관하지 않고 동방에만 머무르고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이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4] 물론 아무리 총독의 권한이 강력하다고 해도 웃어넘길 수 없는 한계점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힘들게 획득한 영토를 외국의 여왕에게 넘겨주고 그녀를 왕중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한계점을 넘겼다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아무리 그래도 법적으로도 허용될 수준이 아니다. 총독의 권한 또한 어디까지나 로마라는 범위 내에서나 맞는 말이지 속주를 타국의 왕족에게 증여한다는 것은 로마법 위반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그런 조항이 없다고 해도 민회 결의로 불법으로 규정되었을 것이다.[5] 물론 선택지 자체야 매력적으로 보였을 지는 몰라도 이걸 입 밖에 내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6] 실제로 이 말은 타당하게 여겨졌고 또 타당한 게 맞았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군대도 이를 당연히 여겼고 주군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를 처음부터 인정하고 지지했다. 무엇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아들이었고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부하였으므로 이 정통성에 따른 입장 차이는 쉽게 뒤집을 수 없는 것이었다.[7] 당연히 이런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쨌거나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어쨌거나 정당한 절차를 거쳐 그 지위를 갖게 된 것이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된 것이 아니다. 거기다 애시당초 카이사리온은 카이사르가 인지한 적조차도 없었고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자기 유언장에다 직접 자신의 후계자라고 명시했기 때문. 그러니 카이사르 지지자라도 카이사르가 인지하지 않은 외국인 아들보다는 카이사르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를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수밖에. 물론 속국의 여왕에 불과한 클레오파트라가 감히 로마 정치에 관여하려 드는 것은 더 꼴보기 싫었을 테고.[8] 사실 일개 시민은 아니었고 카이사르도 맡았던 사제장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거세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원로로서 존경받고 평생 부족함없이 살 수는 있는 상황이긴 했다.[9] 그게 아니더라도 사실 당시 로마의 상황은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몇 번이나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운과 정치적 술수만으로 이 풍랑을 어떻게든 헤쳐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10] 실제로 안토니우스는 이 유언장을 위조라고 주장했던 적도 없었고 또한 그 내용을 부인하지도 않았으므로 정말로 원본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