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수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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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가로 시몬 볼리바르의 절친.
베네수엘라 출신이다.
1814년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에 뛰어든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1818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고, 1821년에는 26세의 나이로 준장에 올랐으며 보야카 전투 이후 볼리바르의 참모가 되었다.
동년에 볼리바르는 수크레에게 에콰도르의 키토를 해방하는 작전을 맡겼고, 이듬해 그는 1822년 5월 24일에 피친차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1824년 8월 6일 페루의 후닌 전투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쳤으며 12월 9일 아야쿠초에서 스페인군 대부분과 부왕을 비롯한 지휘부를 생포하였다. 이후 페루와 볼리비아[1] 가 독립을 이루며 독립 투쟁이 종결되었다. 수크레는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29세의 나이에 "아야쿠초의 대원수"란 명예 칭호를 받았다.
이후 그란 콜롬비아가 독립할 때 페루와 볼리비아는 그란 콜롬비아에 가입하지 않고 따로 나라를 차렸는데 그는 해당 지역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볼리바르가 은퇴한 직후 총에 맞아 암살당했고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볼리비아의 수도 수크레와 베네수엘라의 수크레 주, 에콰도르의 옛 통화 수크레가 모두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또 위의 에콰도르 수크레는 물론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볼리비아 볼리비아노 지폐의 도안으로도 자주 등장했었는데, 2023년 기준 현재 통용중인 지폐 중 그가 도안으로 들어간 것은 볼리비아의 100볼리비아노권이 유일.
1. 개요[편집]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가로 시몬 볼리바르의 절친.
베네수엘라 출신이다.
2. 생애[편집]
1814년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에 뛰어든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1818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고, 1821년에는 26세의 나이로 준장에 올랐으며 보야카 전투 이후 볼리바르의 참모가 되었다.
동년에 볼리바르는 수크레에게 에콰도르의 키토를 해방하는 작전을 맡겼고, 이듬해 그는 1822년 5월 24일에 피친차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1824년 8월 6일 페루의 후닌 전투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쳤으며 12월 9일 아야쿠초에서 스페인군 대부분과 부왕을 비롯한 지휘부를 생포하였다. 이후 페루와 볼리비아[1] 가 독립을 이루며 독립 투쟁이 종결되었다. 수크레는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29세의 나이에 "아야쿠초의 대원수"란 명예 칭호를 받았다.
이후 그란 콜롬비아가 독립할 때 페루와 볼리비아는 그란 콜롬비아에 가입하지 않고 따로 나라를 차렸는데 그는 해당 지역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볼리바르가 은퇴한 직후 총에 맞아 암살당했고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3. 여담[편집]
볼리비아의 수도 수크레와 베네수엘라의 수크레 주, 에콰도르의 옛 통화 수크레가 모두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또 위의 에콰도르 수크레는 물론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볼리비아 볼리비아노 지폐의 도안으로도 자주 등장했었는데, 2023년 기준 현재 통용중인 지폐 중 그가 도안으로 들어간 것은 볼리비아의 100볼리비아노권이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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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알토 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