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타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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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아 왕국 9대 군주
Ḥārīṯat | 아레타스 4세

파일:아레타스 4세.jpg

제호
한국어
아레타스 4세
아람어
Ḥārīṯat
그리스어
Αρέτας
라틴어
Aretas IV
별명
필로파트리스(Philopatris: 백성의 친구)
존호

생몰 년도
미상 ~ 서기 40년
재위 기간
기원전 9년 ~ 서기 40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나바테아 왕국 9대 군주.

2. 행적[편집]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아이네아스라고 한다. 기원전 9년, 오보다스 3세가 사망했다. 당시 나바테아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실라에우스는 왕이 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자신을 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와 유대 왕국의 헤로데 대왕은 손을 잡고 실라에우스가 오보다스 3세를 암살했다고 고발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처음엔 실라에우스를 왕으로 세우는 걸 고려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고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그는 나바테아로 돌아간 뒤 실라에우스를 추방했다. 실라에우스는 몇년 후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로마에서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그는 아내 훌두를 공동 여왕으로 세워서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렸다. 당시 주조된 주화에는 왕과 여왕의 형상이 함께 새겨졌으며, 왕은 월계관을 착용하고 여왕은 이시스의 왕관을 착용했다. 일부 주화에서는 그는 자신을 나바테아의 위대한 신, 왕조의 수호자, 백성의 친구로 묘사하는 비문을 잇따라 세웠고, 일부 주화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레타스(Caius Julius Aretas)라는 문구를 새겨, 자신이 로마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걸 과시했다. 16년부터는 두번째 아내 샤킬랏 1세가 공동 여왕이 되었고, 동전에 그와 함께 새겨졌다.

그는 헤로데 대왕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해 자신의 딸 파사엘리스를 헤로데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서기 35년에 파사엘리스를 내쫓고 이복 형제 헤로데 2세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에데사와 손을 잡고 지원군을 받아낸 뒤 서기 37년 헤로데 안티파스를 공격했다. 안티파스는 전투에서 패배한 뒤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를 파견하여 안티파스를 돕게 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굳이 안티파스를 위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고 보고 진압을 성의없이 하다가 그나마도 티베리우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 들렀다. 그는 나중에 비텔리우스의 중재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켰다.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다마스쿠스에서 개심하고 예수에 대해 전파하자 이에 분노한 유대인들의 의뢰를 받고 부하를 보내 바울로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40년에 사망했고, 아들 말리코스 2세와 딸 샤킬랏 2세가 공동 왕으로 등극했다. 페트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알 카즈네 영묘는 그의 영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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