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가 마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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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마속이다

파일:아! 내가 마속이다.jpg

장르
대체역사
작가
간절히
출판사
KW북스
연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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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간
2020. 07. 01. ~ 2020. 12. 24.

1. 개요
2. 줄거리
3. 연재 현황
5. 개변된 역사
5.1. 주요 사건
6. 평가
6.1. 장점
6.2. 단점



1. 개요[편집]


백제의 이름을 잇다, 조선, 봉황이 포효하다를 집필한 간절히 작가의 작품. 대체역사물, 착각물, 빙의물 속성을 가지고 있다.

왕쌍이 유성추를 사용하거나 일기토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것은 삼국지 연의를, 가정 전투에서 마속군의 군세가 1만 이하라든가 연의에서 존재감이 낮은 장예나 왕련[1] 같은 경제 관련 문관이나 연의에선 언급되지 않는 이궁의 변 등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정사와 연의를 섞은 작품으로 보인다.


2. 줄거리[편집]


※읍참마속(泣斬馬謖) :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군령을 어긴 마속에게 참형을 내리다.

등산 마니아 박선운.

등정하던 중 암벽에서 떨어지는데......

눈을 떠보니, 삼국지 시대.

"참군님, 참군 각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마속'의 몸으로 깨어난다.

"여기가 어디인가?"

"산에 오르시다가 햇살 때문이신지 갑자기 픽 하고 쓰러지셔서 모두가 걱정했습니다."

.......산?

"서둘러, 서둘러서 이 산을 내려간다!"

아! 내가 마속이라니!

결전의 그날, 과연 마속이 산에 오르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3. 연재 현황[편집]


네이버 시리즈에서 2020년 7월 1일부터 독점 연재됐다. 동년 12월 24일 201화로 완결.

이후 2021년 2월 10일 카카오페이지에도 전회차가 올라왔고 동년 4월 21일에는 리디에, 4월 28일에는 조아라에도 전회차가 올라왔다.


4. 등장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 내가 마속이다/등장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개변된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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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기본 전제. 마속이 산에서 내려와 가정을 지켜냈기 때문에 1차 북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제갈량이 울면서 마속을 참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이후로 마속이 꾸준히 활약하며 마량 생전의 업적을 한참 넘어섰기 때문에 고사성어 백미 역시 전해지지 않거나 이른 죽음을 당한 인재를 뜻하는 식으로 용법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

고대의 자연 속에서 현대식으로 등산을 하고 싶었던 주인공이 포원에게 의뢰하여 고대에 수급 가능한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현대 장비에 비하면 무겁지만[2] 산악전에 유용해서 대부분 일회성으로 쓰인 다른 현대 기술과 달리 후반 낙양 대전까지 꾸준히 활용된다. 후대에는 포원이 만든 고리라며 포원기환이라고 불린다. 특히 카라비너는 원역사에서는 근대 기병총(카빈)의 어깨끈에서 비롯된 장비인데 거의 1500년 이상 이른 시기에 어떠한 다른 기술적 연결고리도 없이 탄생한지라 후대에 진위여부를 비롯해 논란거리가 많이 나올 듯 하다.

원역사의 손권이 해상 루트로 요동의 공손연이나 고구려와 동맹 맺으려다 실패한 사례를 떠올린 주인공이 동맹을 성공시켜 오나라의 자원을 헛되이 소모하게 해주려고 촉의 뱃사람들을 고용해 실험을 거듭해서 완성시켜 전수한다. 작중에서는 요동 관련으로만 쓰이고 말지만 삼국 통일 후에는 중국 세력의 해상 교역이나 진출이 실제 역사보다 더욱 활발해질 수도 있을 듯.

장안을 수복한 뒤에 마균을 채용하고 근처에서 발견된 천연 유정으로부터 석유를 수급하여 원역사보다 수백년 일찍 개발한다. 개발 과정에서 제대로 된 배합을 알아내려고 마균이 실험을 거듭하며 계속 폭발을 일으키는 바람에 주인공은 잠도 설치게 된다. 쇠뇌 같은 힘이 필요한 병기와 달리 손잡이를 돌리기만 하면 분사되므로 민간인 여성과 노인도 다루기 쉽지만 주 연료인 석유부터가 한정된 지역에서만 채취되는 관계로 딱 그 지역에서 한번만 실전투입되고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원역사에서도 불교는 이 시점에 조금씩 전파되고 있었지만 훗날의 5호 16국 사태를 걱정한 주인공이 한족과 이민족의 동질감을 빠르게 형성하려고 감택으로부터 전해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한다. 주인공이 가는 곳마다 절을 세우고 위나라의 학살을 피해 이주해온 이민족에 대한 지원도 절을 통해서 공급하면서 불교의 영향력이 본래보다 상당히 커졌다. 마속의 후손들도 불교계에 종사한다.

작품 후반 현대 지식을 다 소모했다고 느낀 주인공이 군권을 내려놓고 삼공의 하나인 사도로 물러앉았을때 천거해달라는 손님이 너무 많이 몰려와 현모양처인 아내 곽향까지 우는 소리를 하자 간단한 시험을 만들어 통과한 손님만 받는다. 국가 제도가 아니라 주인공 개인의 편의를 위해서 개발되었지만 작중 마속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후대에는 계한의 공식 제도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


5.1. 주요 사건[편집]


마속의 가정 방어가 개변되어 왕평의 뛰어난 지휘와 열류성에 배치되었던 고상의 가세, 마속과 다른 부장들의 철통방어로 장합이 일주일 넘게 가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게 된다. 결국 상규의 곽회가 장합을 지원하기 위해 성을 비우고 오던 중 위연과 오의에게 붙잡혀 벌인 회전에서 대패한데다 옹주를 함락시킨 제갈량의 촉한 본군이 장합을 상대하기 위해 가정에 도착하면서 옹주는 위나라에서 떨어져나가게 된다. 촉한군은 그대로 기세를 올리며 점차 위나라를 몰아붙였으나 오나라가 출병을 거절하며 부담이 가중되고,[3] 제갈량이 갖고 있는 충신으로서의 소극적 태도를 이용한 사마의가 조예의 친정과 함께 11만 병력으로 진군하면서 대회전 도발[4]을 걸어오자 제갈량이 교전을 회피하면서 옹주 획득으로 끝나게 된다.

  • 위나라의 4로 병진
조예와 사마의가 계획한 위나라의 옹량주 탈환을 위한 반격. 사전에 장합과 사마의 등이 가정을 제외한 다른 길목에도 대군이 통과할 수 있도록 오랜 공사를 거친 끝에, 본인들의 압도적인 국력을 그대로 투입하는 물량전 형식으로 16만 5천이 넘는 대군을 투입해 촉한에게 반격을 시도한다. 기본적인 국력 격차를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조위였기에 촉한의 부담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촉한은 우선 마대까지 패퇴시키며 몇달간 완강히 저항하던 량주의 서막을 토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 뒤, 군사를 유지할 재정 마련을 위해 화폐 유통을 이용한 오나라와의 외교전까지 펼친 끝에 간신히 대군을 동원할 환경을 마련한다. 그렇게 촉한 역시 12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위나라에 맞대응하고, 오나라 역시 이번에는 기존의 동맹 조건대로 형주와 양주 두 방면에서 도합 10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협공을 개시한다.
출정한 4로 중 사마의와 장합이 이끄는 2로가 각자 장익과 요화, 위연을 상대로 밀어붙이며 초반에는 위나라가 우세를 잡았지만, 마속과 강유를 상대하던 곽회가 제갈량의 계책에 속아 군단이 거진 궤멸하는 큰 타격을 받는다. 이로서 전장의 균형이 무너져 촉한의 강세가 시작되는데 당시 진창성에 있던 위의 대장군인 외척 조진은 수만 병력이 하릴없이 묶여버리는 사태[5]를 피하기 위해 자기 군사를 데리고 장합이 있는 농도 전선으로 도망쳐버린다. 이에 강유와 오의는 위연을 지원하기 위해 전선으로 향하고, 마속이 7천 병력을 데리고 진창성을 포위한다. 마속은 학소를 상대로 심리전을 벌인 끝에 진창성 주민들의 봉기와 산악장비를 이용한 침투작전으로 성을 함락시켜 버린다. 이로서 한중을 향한 위협을 덜어낸 마속은 그대로 소수 병력을 데리고 산을 타고 돌아서 장안 인근 고을들에 요격전을 시도해 위나라에 심대한 충격을 준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위연을 몰아붙이던 장합과 가세한 조진은 위연, 강유, 오의라는 촉한군 최정예 장수들에게 붙잡혀서 답없는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고, 사마의는 장익과 요화의 뒤를 이어 나온 제갈량과의 회전 끝에 패배하고 후퇴한다. 이로서 장안과 촉한군 사이에 온전한 위나라 병력은 장합과 조진군을 포함해도 촉한에게 열세에 처하게 되었고 조진은 자신들이 전멸하면 낙양마저 위험해진다는 계산을 하고는 결국 하릴없이 퇴각을 명한다. 게다가 마속의 장안 요격과 위나라 전선의 패전으로 혼란해진 장안의 방어성인 옹성과 미성도 결국 넘어가게 된다. 이후 촉한군은 그대로 장안으로 진격해 역공을 시도하나 오나라가 패퇴하는 악재가 터지고, 사마의의 헌책을 받아들인 조예가 헌제를 전면에 내보낸다는 초강수를 둬 결국 진격을 멈추고 퇴각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6][7] 그래도 전쟁에서 승리한 촉한은 옹량주를 확실한 자국의 영토로 굳히는 것에 성공하고 옹성과 미성의 함락으로 장안 압박이 가능한 전선을 마련한다.


  • 장완의 북벌
위나라의 2대 황제 조예가 요절하는 사건이 터지자 제갈량의 후계자로서 정권을 잡은 장완은 곧바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키워온 국력을 총동원해 대규모 북벌을 시도한다. 이에 사마의는 조예의 죽음이라는 심대한 타격을 이용해 손권을 설득하여 한오동맹의 파기를 종용하지만, 손권은 일단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 말하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허나 마속 역시 미래지식을 이용한 손권과 오나라의 성향을 오래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기에[8] 계한의 팽창을 경계하기 시작한 오나라가 계한의 뒤통수를 칠 것을 염려하고 있었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북벌에 참여하는 대신 별동대를 이끌고 교주로 잠입하여 오의 침공을 대비하는 예비 전선을 만들어 공작 및 대비를 시작한다. 이후 사마의는 오나라와의 동맹을 추진한다는 핑계로 북벌에 참여하지 않고 탁고대신인 조상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장완의 군대에 맞서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대장군이라 해도 야전 지휘 경험이 전혀 없던 조상은 대장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여러 장수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되려 위군을 혼란 속에만 빠트리고, 반대로 똑같이 경험은 없다지만 제갈량의 후계자로서 상당한 능력과 지휘력 및 결단력을 갖춘 장완은 곧바로 위군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하동 전투에서 조상의 위군을 참패시켜 유례없는 대승을 거둔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결과에 마침내 오나라는 공식적으로 한오 동맹의 파기를 결정하고 계한을 공격. 11만 대군을 일으켜 계한의 핵심 요새인 백제성과 계한과 분할한 상용을 동시에 침공한다. 북벌로 인해 전 대군을 장완이 쓸어간 상황이었기에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보였으나, 이미 이러한 상황은 마속의 예상 범위 내에 있었고 마속은 오나라가 침공하자마자 곧바로 서막, 왕준 등과 함께 인심을 장악한 교주에서 난을 일으킨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찾아온 여대, 제갈직, 위온, 육윤 등의 장수들을 교주/계한 연합군을 이끌고 격파하며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성과를 거두어 형남까지 진입하고, 마속이 미리 백제성에 주둔시켜놓은[9] 나헌의 대활약으로 백제성에서 진군이 막혀 곤혹을 겪던 형주의 오군 역시 교주를 넘어 형남을 장악하고 형북까지 돌입한 마속의 교주군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결국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만다. 상용을 공격하던 정봉과 제갈각 역시 비의와 장익의 항전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고 그 와중에 백제성의 오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결국 똑같이 무성과로 군사를 돌리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 계한은 홍농군까지 장악해 사실상 관중 일대를 전부 제압했으며, 마속의 대활약으로 교주와 무릉을 비롯한 형남 일부까지 확보하는 큰 성과를 이룩하며 위나라와 거의 대등한 국력을 손에 넣게 된다.[10] 다만 한오 동맹이 파기되었고 위오를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기에 앞으로의 북벌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11] 그래도 계한은 형남과 교주라는 안전선이 설치되어 손오를 견제하는 방어선을 설치했으며,[12] 장안 일대 역시 여러 겹의 방어선을 갖춘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기에 계한은 장안으로 천도한다. 반면 전쟁에서 패한 위나라 역시 관중을 완전히 빼앗긴 이상 더 이상 수도인 낙양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하북의 업성으로 천도하고, 오나라도 동맹을 배반했는데 역으로 영토만 잃어버린 상황이라 패전한 여러 장수들의 처분을 두고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지며 내정이 흔들리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 낙양대전
동관대전에 이은 소설의 클라이막스이자 최종 결전. 장완의 북벌 이후 국력을 크게 키운 계한이었지만 지속된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로, 위나라에서 일어난 고평릉 사변[13]에 의한 조씨의 몰락으로 북벌의 의지와 명분 역시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북벌론자인 장완 역시 병환으로 인해 서서히 차기 후계자인 비의를 중심으로 권력이 재편되고 있었고, 비의는 이제 여러가지 실리를 따져서 북벌 대신 내정을 통해 국력을 신장하자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마속 역시 자신이 빙의 초기에 가졌던 안락한 삶을 위한 모든 환경이 조성되었음에도 심란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장완과의 대화를 통해 천하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는 심리로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비의를 설득하여[14] 12만 대군을 이끌고[15] 자신 세대의 마지막 북벌을 결의한다.
마속이 채택한 마지막 한 수는 바로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하후패의 귀부. 이에 마속은 극정을 파견해 때마침 원 역사대로 정권을 잡은 사마의에게 크게 심란해하고 있던 하후패를 포섭하는 것에 성공한다. 위나라에서는 정권을 잡은 사마의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고, 오나라 역시 북벌을 틈타 군사를 내어 계한을 압박한다.[16] 기세등등했던 사마의였지만 처음에 마속의 스타일을 읽지 못해 혼란을 맛보고[17] 이 때문에 사마의가 어물거리는 사이에 계한은 여러차례 이득을 본다. 하지만 역시 사마의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기에 마속도 이후를 보장할 수 없었으나 하후패의 귀부로 인해 단번에 상황을 돌파, 낙양 인근의 진지와 군현들을 피해 없이 모두 손에 넣으며 낙양 공략을 시작한다. 먼저 사마의가 거점으로 삼은 북망산에 강유와 왕평을 투입하고 나머지는 모두 낙양을 둘러싸 공격한다. 북망산 전투에서 산악지형에 유리한[18] 계한군이 우세를 잡자 사마의는 서서히 군사를 물려 낙양으로 들어가고, 낙양 내에서 대대적인 규모의 시가전이 벌어진다. 팽팽한 공방이 이어지던 도중 장완이 이끄는 원군이 낙양에 도달하며 전황이 계한 쪽에 완전히 기울어진다. 진태, 제갈탄, 사마사가 전사하고 혈전 끝에 사마의는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퇴각한다.
낙양을 함락시킨 계한은 곧바로 인근 군현들 역시 모두 함락시키며 사예주 전체를 장악한다. 이후 위나라 본국과의 연락이 끊어진 남양까지 얻으려 했으나 사마의의 계략으로 남양이 오나라에게 넘어가며 결국 오나라와 다시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미 낙양에서의 격전으로 인해 크게 지치고 소모되는 군사비도 만만치 않은 계한군이었기에 남양을 전부 확보하지는 못하고 남양을 남북으로 분할하는 것으로 전쟁을 완전히 끝맺는다. 그리고 이 전쟁을 끝으로 마속 세대의 본편의 이야기도 마무리된다.

마속 사후 20여년이 지난 에필로그 시점. 원 역사대로 사마씨가 위나라의 정권을 찬탈해 진나라를 세운다. 허나 원 역사와는 달리 연전연패한 사마의의 권위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19] 반발하는 호족들이 많아 은밀히 계한에 내통하는 이들도 많았고, 오나라 역시 손호의 폭정으로 나라가 마비에 가까운 상태였던지라 기회라고 판단한 계한은 상장군이자 관우의 증손인 관윤[20]을 평북부도독으로 삼아 25만 대군을 출격시켜 8개월만에 업성을 함락하고 진나라를 멸망시켜 기, 유, 청, 연, 예, 서주를 제패한다.
기세를 탄 계한은 손호의 극심한 전횡을 틈타 오나라 역시 토벌하기로 결의하여 관윤을 익주자사로 임명해 수군을 기르게 하여 공격 준비를 마친다. 마침내 수군을 이끄는 관윤이 익주에서, 양직이 교주에서, 독발수기능이 합비에서, 문앙과 마륭이 남양에서 진격하여 총 20만 대군을 이끌고 오멸망전을 일으킨다. 오군은 원 역사에서처럼 장강에 쇠사슬을 놓아 관윤을 막으려 했으나 마속이 과거 남겨뒀던 비단 주머니를 통해 이를 예측한 관윤은 우습게 이를 돌파한다. 이후 강릉을 점령한 관윤은 손쉽게 양번의 오군을 무너뜨리고 남양에서 진격하던 계한군과 합류한 뒤 그대로 건업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평정, 염원하던 천하통일을 완수하게 된다.


6. 평가[편집]









6.1. 장점[편집]


이 작품의 최대 장점은 단연 캐릭터성이다. 등장인물 하나하나마다 개성이 크게 살려져 있다는 평이 대다수다.

악덕 상사 제갈량, 촉한의 권신으로서의 제갈량, 과로에 쩔어 사는 완벽주의자 제갈량, 한 국가를 총 책임지는 완벽한 명재상 제갈량,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뛰어난 신산귀모의 책사 제갈량, 팔진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재 군략가 제갈량, 간간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까지 국궁진췌 사이후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고고한 사대부로서의 낭만을 보여주는 제갈량... 이렇듯 이 작품은 삼국지 대역물 가운데 제갈량 묘사를 가장 열심히 한 작품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인만 아는 정보 + 고대인 기억력 보정을 받은 주인공도 제갈량 앞에선 인품이나 능력 모두 한 수 아래인 것으로 묘사되는게 거의 대부분일 정도. 댓글을 봐도 대체로 주인공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은 좋지 않고[21] 제갈량 뽕으로 계속 달린다는게 대부분이다. 주인공은 당연히 그대로라는 문제는 있지만 그만큼 제갈량이라는 인물이 촉한에 있어서 어떤 위치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위연이나 비의를 비롯한 촉한 인물들의 욕망과 이상을 그려내며 결과적으로 이런 흥미로운 인간 군상들을 앞에서 잘 이끌었던 유비가 왜 작중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진 주인공인지 알 수 있는 대목들도 잔재미를 더해준다. 이러한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 묘사가 좋은 작품이다. 촉한의 매력이 정말 잘 드러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의 후반에 해당하는 1차 북벌에서 시작하다보니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후반기 인물들의 등장이 많은 것도 장점이다. 물론 기록이 부족한 인물들이 많아서 성향이나 특징 등에 작가의 창작도 가미되었지만 이 창작된 캐릭터들이 마치 현대의 직장인들마냥 친근하고 정겹게 묘사되어 영걸들의 쟁패전인 삼국지 초중반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6.2. 단점[편집]


일주일에 6일이라는 연재 강행군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초반부는 은근히 글이 적은 감이 있어 작가가 연참을 시전할 정도였으며 퇴고를 안하나 싶을 정도로 오타는 물론 반영 오류가 많다. 대표적으로 유비가 후한 황실의 후예라고 적지를 않나... 연의만 해도 대놓고 '한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라고 유비를 소개하는 부분이 꼭 나오는데 여기선 그게 생략되어 있다.

그 외에도 촉한(계한) 사람들이나 타 국가인들이 계한을 당시엔 부르지 않은 국가명인 '촉한'[22]이라고 호칭하거나, 225년에 죽은 왕련 대신 북벌 당시엔 여예를 넣어야 할 상황인데 아직도 왕련이 살아있거나, 사람들 이름을 직책, 이름, 자를 섞어서 뒤죽박죽으로 부르는 등의 오류가 있다.[23] 오탈자도 많아서 1할을 10할, 조진을 조예라고 쓰거나 사소한 맞춤법 및 조사 오류도 자주 보인다. 간절히 작가가 이전에도 꽤 많은 작품을 낸 작가지만 연재 스타일이 좀 허술하고 문장이 좀 유치한 데가 있는데 이 작품도 거기서 벗어날 순 없었다.

한마디로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는 전개능력은 좋은데 문장이 좋지 않고 오류가 많아서 그 장점이 희석된다. 대놓고 촉빠를 위한 헌정소설인 만큼 그들의 뽕을 채워주는 건 좋지만, 한 번만 퇴고를 하며 오류를 고쳤으면 더 뛰어난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연재분이 완결된 후에 단행본에서 대대적인 문장과 오류의 개정이 한번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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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속은 이들을 장금이,왕소금이라 부른다.[2] 이는 마속 본인이 포원에게 무게는 상관하지 말고 튼튼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다.[3] 후에 밝혀지듯이 이는 손권이 칭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칭제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기에 전쟁으로 이를 날릴 수 없었기 때문.[4] 물론 황제 조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다. 당장 촉한군 역시 9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있어 수적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기 때문. 이 때문에 조진 역시 반대했을 정도이며, 전후 장합과의 대화에서 노골적으로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다.[5] 당시 전쟁에서 사마의와 동격의 총사령관이자 황실 외척인 조진이 후방의 진창성에서 마속과 강유에게 위협당하며 전선의 위군이 느낄 부담이 매우 커질 수밖에 없다.[6] 계한은 위나라에 선양했던 헌제가 사망했다는 명분을 바탕으로 유비가 제위에 올라 성립했는데, 헌제를 무시하고 진격할 경우 (위나라에 의해) 헌제가 사실 살아있었다는 것이 알려질 위험이 있었고, 계한의 큰 축인 명분적 가치가 크게 훼손되어 버릴 위험성이 있었다.[7] 조위 역시 헌제를 내세우는 것이 마땅치 않은 상황인데, 헌제에 의해 촉군이 퇴각했다고 하면 선양을 받은 명분이 크게 훼손되는 상황이었다. 서로의 국가적인 명분 때문에 제갈량은 이 계책이 1회성에 그칠 것이라고 예상했고(이 때문에 퇴각하면서도 헌제에게 예의를 다한다.), 예상 그대로 헌제는 한의 퇴각 후 원래 몰년인 234년보다 보다 3년 빠른 231년에 갑작스레 사망하게 된다.[8] 과거 형주 공방전 때도 그렇듯이 오나라는 한쪽이 상승세를 타서 한쪽을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그 맥을 끊어버려 삼국의 정세를 유지시키는 것으로 천하통일보다는 지방에서 할거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9] 마속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낀 장완이 마속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들어주어 백제성과 상용에 일부 군사를 배치시켜두었다.[10] 작중 정확히 언급되는 국력 차이는 조위가 4, 계한이 3.7, 손오가 2.3 정도인 2강 1중 체제가 형성되었다. 여전히 위나라가 아주 약간 더 강하긴 하지만 계한은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방어에 유리하고 하물며 이번 북벌에서 조위와 손오의 협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성과를 거뒀기에 사실상 차이는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11] 장완 역시 하동에서 위군을 대파하고 더 진군할 속셈이었으나 오나라의 배신으로 결국 관중을 얻은 것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12] 직접 익주로 쳐들어오면 교주 방면에서 후방을 교란하고, 교주로 쳐들어오면 역으로 익주에서 협공을 가할 수 있기에 오나라는 절대 계한 쪽으로 전력을 집중할 수 없게 된다.[13] 사실 장완의 북벌 이후 위나라가 낙양에서 업성으로 천도했고 사마의가 일으킨 사변 역시 업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 작품 한정으로 "고평릉" 사변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은 낙양에 있기 때문. 그렇기에 이 세계관에서 후세에 이 사건은 그냥 정시 정변이나 사마의의 난 정도로 불릴 듯하다.[14] 정확히는 마속이 인맥을 끌어모으던 도중 비의가 먼저 찾아와 흔쾌히 마속을 지지해주었다. 마속이 과거 자신을 걱정해 몰래 붙여줬던 호위 바둑기사의 건도 간파하고 있었고.[15] 총병력은 25만에 달하지만 오나라 역시 방어해야 하기 때문에 12만이 한계였다.[16] 전면전은 피하고 대치만 함으로서 계한의 군사비를 소모하게 하는 식으로 압박했다.[17] 제갈량과 육손에 대해서도 분석해낸 사마의였지만 마속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못했는데, 당연히 그 알맹이는 미래에서 빙의한 대학생으로서 미래지식을 알고 미래 명장들의 여러 전략 전술을 섞어 사용한 마속은 일정한 스타일이 없다시피 했기에 사마의가 분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속이 채택한 대부분의 전략 전술은 큰 틀에서는 제갈량과 비슷하게 안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손권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수행했던 요동 상륙이 사마의의 분석을 흩뜨리는 계기가 되었다.[18] 이 와중에 왕평은 과거 마속이 개발한 현대의 등산기구인 포원기환(카라비너)을 이용하여 등애를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19] 원 역사에서도 한-위, 위-진의 계승에는 창업자의 군공이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조가 위공에 오른 시점은 후한 13주 중 9주 가량을 얻어낸 것이 명분이었고, 실제 역사에서의 진 역시 사마소가 진공에 오른 시점은 촉한정벌전 도중이고 촉한이 멸망하자 진왕에 오른다.[20] 관흥의 손자이자 소설 오리지널 인물. 실제 역사에서는 관흥의 아들 관이가 촉 멸망 때 살해당하며 관흥의 가문은 대가 끊겼다.[21] 초반에 주인공이 발암 행보를 보인 탓이 컸다. 다만 주인공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학생이 가정 전투의 현장에 떨어진 입장이었으므로 초반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이 더 이상했으며, 실제로 후반으로 갈수록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어 점점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오히려 주인공이 갑자기 현대의 지식과 오버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무쌍을 찍는 전형적인 전생물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현대인 보정을 받았음에도 무력한 주인공과 대비되는 과거 인물들의 유능함을 잘 묘사했다는 점이 고평가받기도 한다.[22] 그냥 당시에는 촉, 아니면 한, 촉한 사람들의 경우엔 계한이라고도 불렀다. 주인공도 장안을 함락시키고는 앞으로 마음속으로 계한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긴 한다.[23] 문제는 작가도 이 점에 대해서는 구분해서 호칭해야 한다고 인지하고 있는걸로 보인다는 것이다. 작중에서 주인공 입을 빌어서 몇번 설명도 하는데 이 모양이다. 이걸 보면 작가가 고증을 아예 모르는 것은 분명 아닌데 시간이 바빠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