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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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잡
申磼


파일:신잡2.jpg

출생
1541년(중종 36)
사망
1609년(광해군 1)
시호
충헌(忠獻)
본관
평산 신씨

백준(伯俊)

독송(獨松)
부모
부친 - 신화국(申華國, 1517 ~ 1578)
모친 - 파평 윤씨 윤회정(尹懷貞)의 딸
형재자매
4남 3녀 중 장남 [ 펼치기 · 접기 ]
(출처_선원록 #)
누나 - 신지향(申芝香, 1538 ~ 1622)[1]
남동생 - 신급(申礏, 1543 ~ 1592)
남동생 - 신립(申砬, 1546 ~ 1592)
남동생 - 신할(申硈, 1548 ~ 1592)
여동생 - 신단향(申檀香, 1550 ~ ?)
여동생 - 신계숙(申季淑, 1553 ~ ?)

부인
남원 양씨 - 양사근(梁思謹)의 딸
자녀
2남 3녀 [ 펼치기 · 접기 ]
(출처_선원록 #)
장남 - 신경희(申景禧, 1561 ~ 1615)
장녀 - 신경매(申敬妹, 1564 ~ ?)
차남 - 신경지(申景祉, 1566 ~ ?)
차녀 - 신경란(申敬蘭, 1576 ~ ?)
3녀 - 신말란(申末蘭, 1578 ~ ?)

1. 개요
2. 이해할 수 없는 기행
3. 당대의 평가
4. 기타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이항복, 윤두수, 이원익 등과 함께 선조의 피난을 호종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극히 평범한 조선 중기의 문신들 중 하나였을 뿐이겠지만.


2. 이해할 수 없는 기행[편집]


선조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하는 행보를 보인 좀 다른 의미로 뚝심있는 인물이였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선조이순신을 예뻐하며 폭풍 승진을 시켜 마침내 전라좌수사에까지 제수하자, 이순신을 가리포첨사에 제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발발 이후 시점에서 결과적으로 볼 때 선조의 판단은... 이순신의 파격승진을 반대한 신잡의 행동은 말이 필요없는 뻘짓이었던 셈.

정암수를 위시로 한 유생들이 이산해, 정언신, 정인홍, 류성룡 등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빡친 선조가 이 유생들을 잡아들여 국문하였는데, 신잡이 이 유생들을 실드쳤다가 빡친 정적들로부터 탄핵을 당한다.

탄금대 전투에서 동생과 아들이 전사하고 사실상 일본군들이 한양까지 무혈입성할 일만 남게 되자, 당시 조정에선 파천 논의를 진지하게 하는 중이었는데, 선조가 먼저 개성으로의 파천 의향을 내비치니 "소신 80살 넘은 모친이 계신데 만일 전하께서 파천하신다면 소신은 자진할것입니다."이라고 반대했고, 보다 못한 이산해고려 현종 때도 피난 간 적 있는데 지금이라고 못 갈 거 있냐고 좋게 설득하자 이산해도 탄핵시켜 버린다.

진짜 코미디는 이 다음인데 신잡의 고집 끝에 결국 선조가 버티고 있던 한양이 결국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종묘사직을 지켜야 한다며 한양에서 버티자던 신잡은 막상 한양이 진짜 함락되는 걸 보고 갑자기 평양으로 파천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참고로 선조가 가자 했던 곳은 상술했듯 개성이었고, 신잡이 가자고 한 곳은 평양이다. 막상 한양 함락되니 더 먼 곳으로 피난가자고 이야기했다.(...)

코미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먼 훗날 (신잡의 탄핵으로) 유배갔던 이산해가 다시 복직해서 정계에서 다시 행세하게 되자, 과거엔 이산해를 극딜했던 신잡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이산해를 두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신잡의 고집 때문에 조정이 한양에 남은 것이 희대의 실책인 건 사실이었기에 양사로부터 탄핵 주청을 받았지만, 피난 직전 당시의 신잡이 (선조가 피난 가기 전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등 상술한 개뻘짓들을 무색하게 하는 빠른 일처리들을 해내며 선조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신잡이 위와 같은 기행들을 벌이면서도 선조 눈밖에 안 났던 것은 상술한 것과 같이 의외로 할 땐 또 하는 면모들 때문이었다.

이후 임진왜란의 전황이 진짜 안 좋아지자, 선조는 진지하게 명나라로 도망칠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신잡은 이때 "전하께서 명나라로 피신하는 건 상관없지만, 왕위는 세자에게 물려주고 가셔야 하옵니다"이란 식의 매우 높은 수위의 직언을 하며 반대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인다. 선조가 얼마나 냉혹한 성격이었는지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을 한 셈. 선조가 명나라로 가겠다 한 건 단순히 조선 국내에서 파천하겠다고 한 거랑 완전히 다른 얘기다. 파천은 말 그대로 작전상 후퇴고, 명나라로 가겠단 건 백성이나 종묘사직이 어케 되건 내 목숨만 지키겠다며 말 그대로 도망가는 행동이다. 신잡을 포함한 대신들이 이때 말리지 않았으면 조선은 진짜로 망했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선조가 명나라로 꺼져줬다면, 선조의 이 행동을 보고도 명나라가 제대로 돕고 싶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당대의 평가[편집]


상술했듯 이산해를 탄핵했다 두둔하는 등 이랬다저랬다하며 상당히 이해가 안 되는 행보를 보여서 당대의 평가는 몹시 낮았다. 또한 선조 자체가 백성들 사이에서 비호감으로 찍힌 왕인데, 어쨌든 선조의 옆에서 수족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당대 백성들에게 사랑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선 신잡이 배운 바가 모자라고 문반이면서 무반처럼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상술했듯 선조의 신경을 긁는 행동만 골라서 했는데도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걸 보면 의외로 일처리 능력은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일머리가 좋은 타입이란 얘기.[1]

여러 상반된 기록을 가진 인물인데, 조선왕조실록엔 집 문앞에 뇌물이 가득 쌓여 있어서 돈 받고 벼슬을 판다는 소문도 있다고 적혀있지만, 정작 조정에선 청렴결백하고 우국충정이 강하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개성유수 시절엔 다른 관료들이 지들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들을 괴롭히자 신잡이 그들의 악행을 낱낱이 폭로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농경지 등을 모두 돌려주게 하고 또다시 관료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등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신잡을 칭송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의외로 그렇게 탐관오리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4. 기타[편집]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중 둘째인 신경지는 탄금대 전투에 참전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지자 퇴각하려했으나 삼촌인 신립에게 걸려서 "니가 어찌 살려 하느냐'는 호통을 듣고는 같이 물 속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동생인 신립표준영정은 신잡의 초상화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1] 동생 신립과 신할, 신립의 아들들 신경진, 신경유 등의 행적을 보면 괄괄하고 앞뒤 가지리 않고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신씨 집안의 종특인 듯 하다. 또한 후대의 심환지나(정조의 어찰첩을 보면 정조 본인이 심환지를 같이 정국을 운영할 동료로 보고 자신의 각본대로 하라고 적혀있다.) 차지철(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하기 직전 미국의 지원이 미비한 듯 하자 여당 내에서 파병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른바 쇼를 위해 박정희가 차지철을 통해 반대 움직임을 보이라 지시했다.)을 보면 한나라의 리더가 대놓고 나서기 껄끄러운 일이나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내비추기 힘든 상황일때, 또는 너무 독선적으로 보이면 국정운영에 차질이 생기기에 사전에 밀지를 받은 심복이 리더가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 일부러 조정의 야당 행세를 하며 대신 어그로를 끌거나 왕이 하고 싶은대로 정국을 운영하고 균형을 맞추는 충실한 배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정인홍이나 조헌의 사례를 보면 선조 본인은 왕한테도 쓴소리를 잘하고 자기 고집이 센 사람을 정말 싫어했고, 못마땅해하는 사람은 끝까지 중용안하는 뒤끝이 있는 군주였는데 신잡은 끝까지 선조 옆에 호종한 것은 물론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니 신잡도 사실은 저돌적인 모습과 달리 그런 부류의 하나가 아니였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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