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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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관계 관련 틀 파일:세르비아 국기.svg 파일:크로아티아 국기.svg 파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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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3. 문화 교류
4. 관련 문서
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삼국은 3국의 국어가 실질적으로 동일 언어(세르보크로아트어)로 분류될 정도로 유사하지만, 종교/종파 간의 차이로 서로 구분되는 민족 정체성을 지녔다.(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문서 참조) 삼국은 유고슬라비아 해체 당시에 전쟁과 학살을 겪었던 것은 물론 영토 문제로 인해 갈등이 남아있는 편이다.


2. 역사적 관계[편집]


슬라브족의 이동 과정에서 오늘날의 루마니아와 헝가리 이남에 해당하는 지역에 정착한 슬라브인들은 남슬라브인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달마티아 일대에 정착하여 베네치아 공화국 등 가톨릭 세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남슬라브인들은 가톨릭을 믿고 로마자를 사용하는 크로아티아인, 산악지대에 고립되어 보스니아 교회라는 소수종파를 믿던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이슬람을 믿고 아랍 문자를 사용하던 보슈냐크인, 그리고 동로마 제국, 불가리아와의 가까웠고, 오스만 제국 지배 하에서도 정교회를 고수했던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으로 분화되었다.[1]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속하였다. 1차대전의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들을 대부분 독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는 지역들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민족을 언어를 구분으로 분류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였던 만큼 여기에 대한 반발은 적은 편이었다. 1차대전 이전 보슈냐크인들과 크로아티아인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슬라브인 차별 및 범게르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범슬라브주의에 호응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유고슬라비아 귀속 자체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공황 이후 파시즘의 여파가 크로아티아인들에 영향을 주면서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 사이의 갈등은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점령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계 친나치 조직인 우스타샤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파르티잔들이 서로 편을 갈라 나누어 싸웠다. 나치 독일은 여기에 더해 보슈냐크인들을 반강제로 제13무장산악사단으로 동원하였으나, 호응은 시원치 않았다. 2차대전 종전 이후 공산 정권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삼국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다. 티토 시절에는 티토의 개인적인 리더쉽에 힘입어 나름 화합하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들은 티토 사후 갈라지고 분열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일어나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가 충돌하는 장소가 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우스타샤의 만행 관련한 트라우마와 결부지어 잔혹하게 진압하려 하였다. 이후 갈등이 보슈냐크인과 세르비아인 사이로도 다시 번지면서 보스니아 전쟁이라는 최악의 비극을 낳았다. 유고슬라비아가 완전히 해체된 지금도 삼국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갈등이 존재한다.#


3. 문화 교류[편집]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남슬라브족이 세운 국가였고 세르보크로아트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4. 관련 문서[편집]



5.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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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이런 민족 분류는 칼 같이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근대 발칸 반도에서 자급자족하던 농민들은 외부와의 교류가 무척 제한되어 있었고, 대부분 문맹이다보니 이슬람 교리와 기독교 교리를 구분 못해서 두 가지 이상의 종교 교리를 동시에 믿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