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크로아티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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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2.2. 근세
2.3. 19세기
2.4. 20세기
2.5. 21세기
3. 문화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관계. 양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기간에 갈등을 빚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중세[편집]


슬라브족들이 6세기 ~ 7세기부터 발칸 반도로 이주하면서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지역에도 슬라브족들이 많이 이주했다. 슬라브족들은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이주하면서 현지주민들과 통혼이 자주 이뤄졌다. 그리고 슬라브족들이 많이 이주한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슬라브화가 되었고 슬라브족들이 크로아티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등을 세웠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이주한 슬라브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정교회, 키릴 문자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리스의 영향도 받았다. 다만, 크로아티아 지역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정체성이 나뉘어졌다.


2.2. 근세[편집]


프랑크 왕국이 무너진 후 크로아티아에는 크로아티아 공국을 거쳐 크로아트 왕국이 수립되었으나, 헝가리 왕국칼만에게 정복당하면서 1102년부터 헝가리와 동군연합이 되었다. 세르비아 왕국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다가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를 정복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가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 오스만 제국 직할령인 오스만 헝가리, 헝가리인의 자치 공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3분할 되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헝가리 전역과 트란실바니아 공국, 크로아티아 왕국의 슬라보니아 지역을 탈환했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세르비아 일부 지역까지 진출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세르비아인을 모집해 슬라보니아, 헝가리 남부 국경지대[1]로 이주시켰고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은 이 지역에서 얽혀 지냈다. 1739년 벨그라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세르비아를 반환하자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피해 세르비아인 상당수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경지대로 이주했다.

2.3. 19세기[편집]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이 약화가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에 진출했다. 그리고나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2] 하지만 러시아 제국세르비아 왕국이 반발했다.


2.4. 20세기[편집]


1910년대에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러시아 제국이 세르비아를 지지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고 세르비아 왕국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선포했다. 당시 이스트리아 반도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나치 독일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점령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나치 독일에 부역하여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패전이 계속되며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에서 나치 독일을 몰아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지만,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소련과 거리를 두고 서방 국가들과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추진하며 소련과는 관계가 안 좋았다. 티토가 사망하기 전까진 유고슬라비아는 분열되지 않고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들도 친하게 지냈다.

80년대에 티토가 사망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90년대초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났다.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먼저 독립했지만,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는 90년대에 내전이 매우 격렬했고 양측간 학살이 발생했다. 95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학살이 발생되고 스레브레니차 학살까지 발생되었다.


2.5. 21세기[편집]


현재에도 양국은 갈등이 존재한다.[3] 게다가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언어에서도 세르보크로아트어가 아닌 크로아티아어라 표현하면서 차이점을 강조하는 등 견제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네오 나치 정권이라고 주장하듯이, 세르비아에서도 크로아티아를 우스타샤 정권이라고 주장할 때가 있다.#

세르비아산 초콜릿을 아이들에게 선물한 대통령이 사과를 표시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고 세르비아는 인종주의적이라고 분노했다.#

2019년 11월 14일,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측에 옛 유고연방 승계금 1억 4,850만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3. 문화 교류[편집]


종교에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과 달리 양국은 언어에서는 공통점이 많다. 특히,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가 매우 가깝다보니 세르보크로아트어라고 불리고 있다. 역사적인 이유로 세르비아는 정교회를 믿고,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을 믿는 등 종교적으로 차이가 있다. 또한, 문자에선 크로아티아가 로마자, 세르비아가 키릴 문자/로마자를 사용하고 있어서 차이가 있다.

양국은 니콜라 테슬라가 서로 자국의 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니콜라 테슬라는 오늘날 크로아티아 라카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세르비아인 정교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4. 관련 문서[편집]



[1] 현재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2] 명목상은 공동 관할이었으나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 하에 놓였다.[3] 대표적으로 다뉴브강 유역에서의 영토분쟁이 있으며, 이 지역에서의 영토분쟁으로 인해 일부 지역은 무주지로 잔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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