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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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중국
3. 한국
3.1. 고대
3.2. 고려
3.3. 조선
4. 유명한 사관
5. 인터넷 은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역사의 편찬을 맡아 초고(草稿)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예문관 검열 또는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이른다.[1]

2. 중국[편집]


중국에도 사관이 있었으며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남긴 사관의 사초가 역사서를 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록조선왕조실록 문서 참조.

3. 한국[편집]



3.1. 고대[편집]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기록이 구삼국사, 삼국사기 등에 남은 걸 봐서 그 원사료가 되었을 사관과 기록체계가 당시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사항이 전하진 않고 있다.


3.2. 고려[편집]


실록 제작 및 기록 보관을 담당하던 사관(史館)이란 부서가 있었다.

태조 ~ 충렬왕 때까지 이 명칭으로 존재했고, 충렬왕이 재위 34년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으로 부서명을 바꾼다. 이 춘추관 부서명이 조선시대에 그대로 이어진다. 사관의 직렬은 다음과 같다.

  • 감수국사(監修國史)
사관의 장관. 보통 중서문하성 소속의 문하시중,[2] 평장사,[3] 참지정사[4]가 겸직했다. 정원 1명.

  • 수국사(修國史)
사관의 차관. 정원 1명.

  • 동수국사(同修國史)
사관의 3급 직위. 정원 1명.

  • 수찬관(修撰官)
사관의 4급 직위.

  • 직사관(直史官)
정원 4명.

  • 서예(書藝)
정원 4명.

  • 기관(記官)
정원 1명.

이상 직렬은 부서명이 사관일 때의 직렬이며 예문춘추관 때 확 바뀐다. 이상의 직위를 가진 신하들은 통틀어 사관(史官)이라고 불렸다. 귀족 계층이 있던 고려 답게 사관직도 겸직이 가능했다.

고려시대 유명한 사관 라인업은 아래와 같다.
현종조 사관
고려 칠대사적 편찬자

감수국사(監修國史)
이부상서(吏部尙書) - 참지정사(叅知政事) 최항
수국사(修國史)
예부상서(禮部尙書) 김심언
수찬관(修撰官)
시어사(侍御史) 황주량
우습유(右拾遺) 최충
예부시랑(禮部侍郞) 주저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
현종이 시작한 고려 7대 실록 복원에 참여한 자들로 황주량이 주도, 최항이 최종 검수, 최충이 지원, 주저, 윤징고 같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이 모두 모인 최고의 드림팀이었다.

3.3. 조선[편집]


조선시대는 전직 관원도 있었지만 겸직 관원도 존재했었다. 예문관의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이 춘추관의 관원을 겸하여 매일 매일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이들 8명의 관원을 ‘사관(史官)’ 이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역사를 중요시해서 이 직책 또한 중요시되었다. 보통 사관은 춘추관의 관원과 예문관 한림이 겸직하는데 실력과 가문이 두루 좋은 인재를 뽑았다. 젊은 사관들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투철해 자연히 왕과 권력자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였으며 수난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후기 들어서면서부터는 사관도 당색에 물들어 사관들의 평가가 편파성을 띄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승정원일기를 작성하는 승정원의 정7품 주서(注書),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주서의 자리가 비었을 때 임명하는 임시직)도 넓은 의미에서 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승정원일기 특성상 '사신은 논한다'로 시작하는 사관으로서 평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관의 기록인 사초는 실록 편찬 전까지는 그 누구도 열람할 수가 없다. 심지어 왕이라고 해도. 딱 한번, 연산군무오사화 때 이를 읽어보고 사관들을 대거 숙청하였던 관계로 사초를 열람하는 것은 '폭군이나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때문에 연산군 이후에는 실록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라며 치를 떠니 감히 임금들이 행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연산군도 사초를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읽어본 것은 아니고 사초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확인해본 게 다였다. 더불어 사관들조차도 기록을 적은 왕이 승하(昇遐)한 후에야 실록 편찬의 목적으로 열람이 가능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1519년) 4월 22일의 기록을 보면 신료들이 남성인 사관이 드나들 수 없는 규문에서 기록을 담당할 여사(女史)를 둘 것을 청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 신입사관 구해령. '정말로 저 의견이 실현되어 여성 사관이 생겼다면??'하는 전개로 나가는 일종의 대체역사물이다.

4. 유명한 사관[편집]


국왕 태종: "사관의 붓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전 밖에 있더라도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史筆宜直書. 雖在殿外, 豈不得聞予言?

사관 민인생: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臣如不直, 上有皇天.

- <태종실록>, 태종 1년(1401년) 4월 29일. 태종이 왕이 평소에 기거하는 편전까지 사관이 입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이를 두고 태종이 민인생과 논쟁을 하는 기록이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


사관 중에서 가장 네임드를 꼽으라면 역시 맨 위의 어록을 다 적은 태종 시대의 민인생(閔麟生)[5]이다. 실록을 쓰려고 고위 관료만 참석할 수 있는 연회 때 몰래 따라가고, 얼굴을 가리고 태종의 사냥을 쫓아가는 등 거의 사관이라기보단 스토커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다. 그러다가 하도 당한 태종이 편전입시를 허락하지 않아 휘장 안에 숨어 엿본 것이 발각나 귀양을 가게 되면서 결국 그 전설의 막을 내린다. 이 내용 또한 실록에 작성되면서(...) 후손들에게 전달되고 말았다. 태종의 이미지 실추는 덤. 조선왕조실록과 사관들의 비범함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왕께서 말에서 떨어졌는데 사관 보고 이를 쓰지 말라고 하였다'라는 기록도 바로 태종 때의 기록이다.[6] 또한 태종도 민인생이 어지간히 싫었는지 그를 직접 욕한 것을 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


천일야사에서 묘사한 민인생과 태종의 갈등. 이미 썸네일부터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태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기록하는 민인생의 집념과, 그런 민인생에게 시달리며 고통받는 태종의 분노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여담이지만 실록에서 검색해보면 민인생은 귀양갔다 돌아온 이후로도 금성 현령이나 한성부 판관 등을 역임하다 이런 저런 사유로 파면 혹은 강등당하는 등 순탄치 못한 벼슬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7][8]

5. 인터넷 은어[편집]


인터넷의 사건을 나무위키에 기록하는 위키러(이른바 '나무위키니트')들을 위키 외부에서 지칭하는 별명.

2015년경 여성시대 해명글 조작 사태가 진행되면서 이 사건을 다루던 나무위키의 문서들이 무도갤에 알려졌고, 이에 무도갤러들이 나무위키니트들을 사관이라 부른 것이 그 유래이다.

이후 나무위키니트의 모에화이루어졌다.[9] 오늘의유머에서 내리는 최고 형벌이 모에화형이라 저게 진짜 칭찬인지 헷갈릴 수 있겠지만, 오유인들에겐 최고 칭찬도 모에화기 때문에...

사실 사관의 이미지가 퍼지기 전인 리그베다 위키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기록하던 습관은 줄곧 이어져 오고 있었다. 각종 사건사고 문서에서 사건 일지와 관련 서술 등이 체계적으로 작성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나 해당 문서에 대한 반달리즘이 시작되면 더 악착같이 다 기록하고 보존해 놓아서, 오히려 반달 전보다 더 방대하고 세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래도 반달이 계속되면 반달 방지를 위해 동결처리로 묶어버려서 더 이상의 기록이 불가능할지언정 훼손되지 않게끔 해 두곤 했다. 단지 여성시대 사건 이전에는 이것을 두고 "니트들의 잉여력 발산" 이라며 자조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는 아카이브까지 이용해서 확실하게 기록을 남겨놓는지라 그 덕분에 박제사라는 별칭도 생겼다.

나무위키 입장에서는 상당한 홍보 및 이미지 마케팅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좋다구나 하고 사관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특별한 호칭은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남들과는 다르다는 착각에 빠지게 해서 완장질이나 친목질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을 자칭하며 스노비즘에 빠졌던 과거의 폐해는 지금도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다.

일부 타 웹사이트에서는 위키러들이 사관 사관 거리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웃기지도 않는 별칭을 달고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고 하하거리는 꼬라지가 보기 좋지는 않기 때문. 애당초 사관이라는 별칭을 수여한 디씨인사이드를 비롯한 여타 커뮤니티에서도 이미 위키니트들이 사관을 자칭하는 것이 건방지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디씨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여성시대와 적극적으로 싸우던 갤들 한정일 뿐이고, 그 무도갤러들중 위키 기여활동 사실을 밝히거나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중이짓 내지는 자화자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위키 내에서도 사관이라는 호칭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유저들이 예전부터 줄곧 있어왔다.[10]

무엇보다 사건/사고를 기록하는 것만이 나무위키를 이용하는 위키러들의 목적은 아니다. 나무위키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정보의 제공이다. 나무위키에는 수십만 개에 달하는 문서가 있으며, 그 수집한 막대한 정보를 토론을 통해 가공하는 것이 주활동이다. 사관이란 단어는 해당 사이트들에서 흔히 나오는 말처럼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위키러 전체를 표상하기엔 적절치 않고, 나무위키에 대한 오해가 담긴 표현이며, 자칫 이러한 오해를 확대시킬수도 있는 단어이다. 그러니 사관이란 단어에 위키러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를 부여하거나 재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위키 작성은 돈이 나와서 하는 것도 아니고, 위키니트들이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작성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발적인 취미생활로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무위키 측에서 사관이라는 호칭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걸 알았는지, 더 민망한 호칭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11]

물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선발된 사관들만이 기록할 수 있었던 실록"[12] 과 달리 "누구나" 자유롭게 글을 적는 위키 특성상 특정인물을 싫어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들이 "반대 그 자체만을 위한 프로불편러적 시각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논리에 일방적으로 함몰되어 편향되게 적어주는 경우가 매우 많다. 심지어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위키에 링크를 찍고 집단으로 난입하는 경우들도 자주 발생한다.[13]

반면 나무위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사관이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반어적으로 비꼬는 의미. 특히 이는 디시 계열 사이트에 팽배해 있는 정서이기도 하며, 나뮈병이라는 표현과 대체되면서 쓰인다.

이와 관련된 드립의 연장선상으로 한 인물이나 대상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면 그 문서를 실록, 대장경이라고 표현하는 드립도 있다. 이건 굳이 박제나 사건사고와는 상관없이 내용이 지나치게 자세하다면 나오는 드립이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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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국어사전[2] 중서문하성 서열 1위. 정원 1명.[3] 중서문하성 서열 2위. 정원 4명.[4] 중서문하성 서열 3위. 정원 1명.[5] 사실 사관은 사초를 제출할 때 익명으로 제출하거나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거의 기재하지 않으므로 대부분의 사관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유명한 인물이 사관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사관으로 유명하지는 않다. 사관으로 유명한 사람은 굵직한 사건인 무오사화 때 알려인 김일손 정도가 현재까지 민인생을 제외한 이름이 알려진 사관이다.[6]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2월 8일 기묘 4번째 기사. 참고로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인기검색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7] 여담으로 세종대왕이 태종실록을 보고자 하는 논의가 세종 13년 3월부터 있었는데 민인생의 인명이 언급되는 시기가 세종 13년 5월까지니 (후세에 재평가를 받았는지 직첩을 돌려 받았다) 대략 이 시기까지는 생존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세종이 보았다면 그의 기록벽으로 인한 태종과의 다툼, 말에서 떨어진 일화까지 기록해놓은 것을 보고 가만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8] 반면에 동생인 위숙공 민의생(생몰: 1379~1444)은 이조참판, 경기도 · 경상도 두 곳의 관찰사, 예조판서,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할 정도로 벼슬살이가 순조로웠다.[9] @위키니트들이 사관으로, 나무위키는 실록으로 모에화되었다.[10] 실제로 여성시대 관련 문서 토론방에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주제 중 하나가 사관드립을 삭제하자는 것이다.[11] 심지어는 위키니트들 스스로 자폭하는 드립으로도 쓰는 중이다.[12] 조선시대 사관들은 전문적인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학문 능력을 갖춘 엘리트 인재들이다. 이들을 선발하는데는 조건 또한 까다로웠는데 학문의 깊이는 기본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사관이 될 인물이 속한 가문에서 발생한 뇌물과 같은 부정축재여부조차도 조사가 들어갔다.[13] 로그인 사람들만 기록하게 하는 것도 사실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진 않는다. 이미 이러한 반달은 예전부터 존재했으며 나무위키는 이들로 인해 수많은 반달 사례를 겪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