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라이히

덤프버전 :

파일:빌헬름라이히.jpg
이름
Wilhelm Reich
빌헬름 라이히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출생
1897년 3월 24일
출생지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도브자우
도브리아니치(Dobrianychi)[1]
사망
1957년 11월 3일(60세)
사망지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펜실베이니아
루이스버그(Lewisburg)
종교
무종교
학력
빈 대학교 의학부[2]
1. 개요
2. 생애
3. 이론
3.1. 오르가즘 이론
3.2. 오르곤 이론
4. 평가
5. 여담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제자로 알려져있다.


2. 생애[편집]


18세 때인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이탈리아 전선에서 2년여 동안 싸웠다. 전쟁에서 무공이 뛰어났는지 2년 후에는 소대장으로 휘하에 40여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1918년말 전쟁이 끝나면서 제대했고 1919년 빈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1학년때 지그문트 프로이트 교수의 정신분석학에 흥미를 느껴 의학과로 전과했고, 프로이트의 지도하에 정신분석학을 깊이 공부하게 되었다. 1922년 졸업 후 프로이트 클리닉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들의 셸쇼크 환자가 많아 클리닉은 성황을 이루었다. 1922년 자신의 환자였던 애니 핑크(애니 라이히)와 결혼했다.

라이히는 성적 억압히스테리의 원인이라는 프로이트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오르가즘을 긍정하여 프로이트와 이론적 간격이 생겨났다. 그는 성기의 오르가즘을 통해 노이로제에서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계는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1929년 직접 소련을 방문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본 소련은 이상적인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인민을 극도로 억압하는 권위주의 체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고 돌아온다.

이후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기계론적 관점의 한계를 비판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목한 섹스-정치(Sex-pol)를 주창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공산당의 계급 투쟁 노선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모독으로 받아들여져 공산당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파시스트라고 비판하며 맞섰고, 이에 극도로 분노한 공산당은 그를 영구 제명, 추방당했다.

아울러 학계에서도 성기와 성행위, 오르가슴에 탐닉하는 그에 대해 괴짜, 사이비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의 결합을 주창하자, 정신분석학회는 정신분석학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에도 그는 열렬한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했지만, 현실사회주의자(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리고 독일 공산당에서 자신을 암살할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1932년 엘자 린덴베르크라는 댄서와 가까워지면서 결혼 생활이 파탄났고, 1933년 애니와 이혼했다.

라이히가 이혼하기 몇달전에 나치당이 집권을 시작했고, 1933년 3월 나치당 신문에서 라이히의 섹스-정치를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이혼 소송이 마무리된 후 라이히는 엘자 린덴베르크와 함께 덴마크로 이주했다. 1933년 11월 덴마크 공산당은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전력을 들어 반혁명적이며 십대들의 성행위를 조장한다는 이류로 그를 덴마크에서 추방했다. 심지어 라이히는 덴마크 공산당에 가입한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위협을 느낀 라이히는 결국 1934년 린덴베르크와 노르웨이로 이주했다. 노르웨이에서 지인인 심리학자 하랄 슈옐데루프의 도움으로 그는 섹스와 오르가즘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붙인 섹스 실험 참가자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온 독일인 연인이 있었는데, 나중에 서독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와 그의 내연녀인 게르트루트 마이어(게르트루트 가슬란드)였다. 섹스에 매우 강한 흥미와 집착을 보이던 브란트와 매우 친해졌고 그의 동거녀인 게르트루트는 아예 라이히의 비서이자 오르가즘 실험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라이히는 몇몇 여성 환자들과 깊은 관계를 가졌고 이로 인해 1930년대말 엘자 린덴베르크와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1939년 엘자 린덴베르크와의 관계를 끝내고, 노르웨이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비서이자 조교인 게르트루트로 함께 미국으로 갔다. 한편 빌리 브란트는 동거녀인 게르트루트가 만류를 뿌리치고 라이히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자 큰 실의에 빠졌다.

미국에 정착한지 얼마 안된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적국에서 출신인 그에 대해 FBI가 며칠 동안 수사하기도 했다. 당시 FBI가 그의 가택을 수색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나의 투쟁, 블라디미르 레닌 전기, 레온 트로츠키의 자서전 나의 생애, 어린이를 위한 러시아어 교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미국에서 오르가즘 연구를 계속 진행했다. 미국에 정착한 이후 그는 그동안 계급 지배와 성적 억압을 함께 연관하려던 생각에서 계급 지배에 대한 사고를 점차 버리고 성적 억압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오르가즘을 통한 성적 억압 해방을 외치는 그의 주장에 미국 매스컴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의 주장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연구가 심화되던 194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비판적인 반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오르가즘 연구를 발전시켜 '오르곤 에너지(Orgone Energy)'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그는 오르곤 에너지를 통해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적 질환은 물론이고, 암과 같은 각종 신체적 질병까지 모두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르곤 에너지를 적용하기 위한 기구를 발명하여 특허를 출원하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이 특허 신청은 기각되었다. 그리고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50년대 이르러 그는 학계로부터 고발당했고, 1954년 그는 FDA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1954년부터 그는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고, 아들과 함께 UFO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UFO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1956년 의료사기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

1957년 11월 향년 6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이론[편집]


라이히 사후에 그에 대해선 오르가즘 이론을 제시했다는 것만 알려져있지만 미국 이민 이후론 주로 오르곤 이론을 제시하고 연구했다.


3.1. 오르가즘 이론[편집]


라이히는 <<오르가즘의 기능>> , <<파시즘의 대중심리>> 를 저술했는데 이는 권위주의로 인한 성적 억압은 인간이 자유, 평등, 박애보다는 차별,혐오,억압에 순응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파시즘을 지지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라이히가 정의하는 파시즘은 68혁명 이전까지 통용되던 국민생디칼리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유, 평등, 박애를 억압하는 인간의 심리를 의미한다.

오해하지 말 것은 라이히가 말하는 성해방은 야동, 성매매같은 성상품화난교, 비생식 성교 허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적 공상, 욕망을 양지에서 표출하지 못하고 음지로 숨겨야하는 수치스럽고 죄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것을 성적 억압 상태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성에 대한 죄책감, 수치심 때문에 사회적 사도마조히즘이 만연된 체제를 지지하여 성욕을 대리만족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현상이 나치 독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좌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와 일제 사회, 기독교 우파 사회에서도 만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권력자에 대한 숭배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참고로 현재 정치적 올바름 관점에서 호모포비아라고 지탄받을만한 주장이 있는데 당시 라이히는 동성애를 성적 억압으로 인한 현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3]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동성애는 타고난 성적 지향이기보다는 불교 승려들의 남색이나 조선 궁녀들의 대식 같이 억압적인 환경에서의 이성애자들의 성적 일탈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3.2. 오르곤 이론[편집]


라이히가 오르가즘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론인데 인간의 신체에서는 한의학에서 언급하는 기(氣)처럼 오르곤(Orgone)이라는 에너지가 존재하고 인간이 겪는 질병은 오르곤이 교란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히는 오르곤의 흐름을 바로 잡으면 내과적 질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오르곤으로 동력 장치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오르곤은 신체 밖인 우주에서까지도 존재하고 지구의 생명도 오르곤이 질서있게 흐르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르곤의 흐름을 조정해 날씨에 영향을 미치는 기계 장치인 클라우드버스터(cloudbuster)라는 물건까지 만들어가며 자신의 이론을 실제로 증명하려고 애썼다.

이는 라이히가 1957년에 당시 미국 과학계에게 고발당하는 명분이 되었고 그가 구속되었을 당시 그의 연구작들이 분서되거나 철거되었다. 당시 이 사건은 일부 지식인들에게 규탄되었지만 사후에 오르곤 이론은 대중적으로 잊혀졌다.[4]


4. 평가[편집]


그의 후기 이론인 오르곤 이론은 대중적으로 전승되지 못했지만 전기 이론인 오르가즘 이론은 1960년대 성해방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성긍정 지지자들이 자신의 이론적 근거로 빌헬름 라이히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다만 이는 라이히의 오르가즘 이론이 제대로 전승된 것이 아니었는데 당시 라이히는 사회적 사도마조히즘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지닌 성욕 표출을 허용한 것이지만 성해방 운동 당시엔 당시 주류 사회가 금지했던 야동, 성매매, 성상품화, 성소수자, 난교, 혼전, 혼외성교의 양지화를 지지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기독교 우파 같은 종교적 우파대안 우파는 빌헬름 라이히를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정의하고 매우 적대시하고 있으며 라이히때문에 성범죄, 가정해체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빌헬름 라이히의 아들 피터 라이히는 1973년 A Book of Dreams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회고록을 집필했다. 1985년 영국의 팝 가수 케이트 부시는 이에 영감을 받아 Cloudbusting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5. 여담[편집]


  • 라이히가 초기 에리히 프롬과 초기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초기에도 사실 매우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사상가로서 자신의 이론을 가지게 된 프롬과 마르쿠제는 결국 라이히를 부정하기에 이른다.[5][6] 그들은 라이히의 주장과는 다르게 성 해방은 더 이상 전복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현존 억압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7][8]

[1]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도시이다.[2] 현재 Medical University of Vienna (빈의과대학교)[3] 라이히 생전엔 성소수자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이히 사후인 스톤월 항쟁 이후로 성소수자 운동권들이 세계화된 것이다.[4] 무한동력을 믿는 일부 뉴에이저들은 오르곤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5] 프롬은 성격유형론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하던 빌헬름 라이히의 견해에 가까웠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억압되지 않은 생식기적 성욕의 해방 효과에도 라이히의 이론에 동조한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프롬은 그 뒤 몇 년 동안 라이히의 견해에 점차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치즘의 사례에서 성적 자유가 반드시 정치적 자유를 가져오지 않음이 증명됐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노명우 옮김, 동녘, 2021, p.191)[6] 마르쿠제는 라이히의 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동료 망명객(라이히)보다는 성기에 덜 고착되어 있었다. 『에로스와 문명』에서 그는 오르가즘의 양이나 질을 높이는 것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않았다. 라이히의 실수는 "개인적인 문제와 사회적 질병에 대한 만능치료제로서 성 해방"을 주장한 것이라고 마르쿠제는 지적했다. "그(라이히)의 이론에서 승화의 문제는 축소되었다. 억압적 승화와 비억압적 승화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구별도 하지 않았고 자유의 진보는 그저 성 해방으로 나타났다."(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9, p.399~400)[7] 『일차원적 인간』에서 마르쿠제는 자유로운 방종의 60년대를 칭송하기보다는 땅에 묻어버렸다. 1960년대 사회가 허용해준 것은 겉보기와 달리 엄격한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지배의 도구였다. "이 사회는 손대는 족족 모든 것을 체제 발전을 위한 잠재적 원천이자 착취와 고역과 만족, 자유와 억압의 원천으로 바꾸었다. 섹슈얼리티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마르쿠제는 썼다. 과거에는 섹슈얼리티의 좌절이 불만족의 저장고를 만들어내고 사회적 질서를 위협했다면 마르쿠제가 묘사한 사회에서는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것이 성 해방을 통해 극복되었다. 이제 성 해방은 전복적이지 않고 그보다는 현존 억압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마르쿠제는 생각했다. 헤겔의 '불행한 의식'은 가능한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성적 좌절은 불행한 의식의 한 형태이다. 하지만 억압적으로 탈승화된 사회에서 불행한 의식은 극복되었다. 일차원적 사회의 구성원들은 행복한 의식이 되어서 성적이거나 다른 방식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마르쿠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었다. (중략) 마르쿠제가 찾아낸 일차원적 사회의 악마적 천재성은 쾌락을 억압의 도구로 만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섹스와 성적 노출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일차원적 인간은 자신을 성혁명가로 생각하게 된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9, p.439)[8]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오락산업을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절망을 극복하고자 한다. 상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스릴과 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사는 맛,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이 된다. 우리의 성격 또한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해진다. 마침내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라서, 남자에게 매력 있는 여자 그리고 여자에게 매력 있는 남자는 탐나는 경품이 된다. 이들은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유쾌한 태도와 흥미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한다. 남자들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려고 하고, 여자는 몸을 가꾸고 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고자 한다. 하지만 이로서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기껏해야 '받은 만큼 준다'는 자본주의의 공정한 거래 윤리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1976(2019 개정5판))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23:59:30에 나무위키 빌헬름 라이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