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어부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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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07년 8월 31일 당시 만 69세였던 어부 오종근이 전라남도 보성으로 여행을 온 19세 대학교 신입생 커플 김 모 군과 추 모 양에게 배를 태워 주고, 어장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말로 속여 자신의 배에 태운 후 득량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여성을 성추행하기 위해 남성을 먼저 바다로 밀어 숨지게 하고 저항하던 여성도 바다에 빠뜨려 살해한 데 이어, 9월 25일[1] 에도 같은 방법으로 24세 직장인 여성 안 모 씨와 조 모 씨도 살해한 사건. 연쇄살인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살인이 두 건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성범죄 결합 살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2]
2. 상세[편집]
1차 사건이 벌어진 후 피해자의 가족들이 당연히 실종 신고를 했고 피해자들 중 여성의 시신이 바닷가로 떠밀려와 발견된 뒤 이틀 뒤 해상 수색 과정에서 남성의 시신도 발견되었다.[3] 이 첫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경찰과 해경은 타살 증거를 찾지 못해 두 사람의 죽음을 동반자살로 인한 추락사로 판단하여 수사가 종결되었다가 두 번째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에서도 피해자 중 한 명은 떠밀려와서, 나머지 한 명은 해상 수색 중 바다 한복판에서 발견되었다. 이 두번째 사건에서 범인의 덜미가 잡혔다. 피해자는 배를 타기 전 우연히 마주친 30대 여성에게 휴대폰을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사망하기 직전 그 여성의 통화 상대였던 여성의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상한 느낌이 든 이 여성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선박 내부를 수색하자 피해자의 신용카드 및 볼펜, 머리끈,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면서 오종근을 용의자로 지목해 집에 숨어 있던 오종근을 체포했다."저희 아까 전화기 빌려드린 사람인데요 배타다가 갇힌 거 같아요 경찰 보트 좀 불러주세요."
오종근은 20대 여성 2명을 살해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남녀 대학생을 살해한 사실은 '그 둘은 실족사했다'고 일관하며 부인하고 있었지만 한 어선의 어망에 1차 사건 피해자들 중 1인의 디지털 카메라가 걸려 올라왔고 어렵사리 복구된 피해자가 남긴 그의 사진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4] 결국 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건 자체는 전형적인 성범죄 결합 살인이지만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까닭은 따로 있었다. 왜냐하면 사건 당시 가해자가 일흔을 바라보던 노인이었고 피해자가 50살 가까이 차이나는 손자뻘인 20대 초반 젊은이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범죄에서 그 반대는 흔해도 이렇게 노인이 가해자인 경우는 원체 보기 드문 사건이라 주목을 받았다. 노약자라는 말처럼, 보통 노인이 약자이고 피해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가해자는 고령에 왜소한 체격(165cm)[5] 이었긴 했어도 오랜 세월 어부 생활로 다져진 완력과 뛰어난 수영 실력을 갖춘 바다 위의 환경과 갑판 상황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반대로 피해자들은 수영도 못 하는 연약한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배 위에서의 상황이 익숙하지도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노인이 이런 악귀로 돌변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여 철저히 방심한 상태에서 완벽히 기습당했다. 노인은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지 않고 한 명씩 분리해서 상대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젊다고 해도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 중 단 한 명뿐인 남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현장에 나간 프로파일러인 권일용 교수는 오랫동안 어업에 종사해 온 어부인 인근 주민에게서 '저런 조그만 배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출렁거리기 시작하면 건장한 장정들조차도 난간만 겨우 붙들고 일어서지 못할 정도'라는 말을 듣고 납득했다고 한다.
오종근의 범행 동기는 여성의 가슴을 만져 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한다.[6]
판결문 상에 나타난 첫 사건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범죄자는 피해자인 커플을 자신의 선박에 태워 인근 바다로 운행하던 중 여학생의 신체를 보고 욕망을 품게 되어 여학생을 추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남학생을 먼저 살해한 후 여학생을 추행한 뒤 살해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범죄자는 선박에 나란히 앉아 있는 피해자들의 뒤로 몰래 다가가 양손으로 남학생을 잡아 바다에 밀어 빠뜨리고 바다에 빠진 남학생이 살기 위해 선박에 다시 오르려 하자 선박에 있는 속칭 삿갓대[7] 및 기타 불상의 도구로 남학생의 머리, 왼쪽 어깨, 왼쪽 팔, 양다리 등을 수회 힘껏 내리치고 찍고 밀어 남학생이 선박에 오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를 살해하였다. 범죄자는 공포에 떨고 있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추행하였고 이에 여학생이 두려움에 반항하자, 마저 희롱한 후 여학생마저 바다에 밀어 빠뜨린 뒤 바다에 빠진 그녀가 선박에 다가오자 삿갓대로 그녀를 수회 밀어 살해하였다.
두 번째 사건에서도 두 여성을 모두 성추행하다가 저항이 심해지자 모두 바닷가에 빠뜨려 살해했다. 《범죄의 재구성》에 따르면 한 명을 가둬둔 상태에서 다른 한 명을 살해한 뒤 나머지 한 명도 바다에 빠뜨려 살해했다고 한다. 나머지 한 명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같이 물에 빠졌는데 혼자서 살아 나온 뒤 살려달라는 피해자를 삿갓대로 잔혹하게 내리쳐 살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8]
오종근이 경찰 수사 과정에서 워낙 자백을 하지 않고 태도가 뻔뻔해, 경찰들이 피해자들의 멀쩡하던 생전 사진과 처참한 사후 사진을 대조해 보여주면서 그에게 애원하다시피 추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사이코패스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는 수사 기법이기는 하지만. 알쓸범잡 시즌 2에서 이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 당시 투입되었던 프로파일러 권일용이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담당 수사관들 앞에서는 고압적이고 뻔뻔한 태도를 취하던 오종근이 분석을 하러 들어간 권일용이 경찰청에서 왔다고 신분을 밝히기 무섭게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이렇게 힘없는 내가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해코지를 하느냐"라고 장장 30여분을 하소연하면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을 것 같은 힘없는 노인 코스프레를 시전했다고 한다. 물론 권일용 교수는 조사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창문 너머로 이미 오종근의 진술 모습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자신이 신분을 밝히자마자 오종근의 태도가 180도로 바뀌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 사람 정말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9]
그는 끝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배를 탄 피해자들 탓이다, 공짜로 얻어타려한 저놈들 잘못이다"라고 철저하게 사이코패스다운 언동을 보였다.
그의 사이코패스적 특성은 사건에 대한 진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사건을 술회하면서 전혀 감정적 표현이나 설명이 부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설명한다. 같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인 유영철의 자필진술서에서 보이는 특성과 유사하다.
오종근의 장남은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가 사건 발생으로부터 1년 후인 2008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10] 아들의 소식을 듣고 오종근은 “큰아들이 왜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얼마 안 가 아내도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던 딸네 집으로 갔다. 2남 5녀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보성에 살던 딸[11] 은 언론이 찾아가자 “아버지고 뭐고, 그런 짓을 한 사람과 난 상관이 없다. 이젠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큰아들도 사건 나고 바로 죽어버렸다”고 소리치는 등 남은 가족에게도 완전히 버림받았다.
3. 사형제 합헌 논란[편집]
1심 재판부에서 고령 범죄자로는 이례적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12] 2심 재판부 측에서 '사형과 무기징역 사이에 대체 형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했다. 광주고등법원 2008. 9. 17.자 2008초기29 결정 사형제 위헌법률 심판은 14년 전인 1996년에 7:2로 합헌 결정이 난 적이 있다. 헌법재판소 1996. 11. 28. 선고 95헌바1 전원재판부[13]
사형제가 위헌이 되느냐 합헌이 되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였는데 결국 2009년 6월 11일 열린 공개변론까지 거쳐 합헌:위헌 5:4로 합헌 결정이 나서 오종근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합헌 결정 이유는 사형이 연쇄살인 등 극악한 범죄에 대해서만 선고되는 이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 2010. 2. 25. 선고 2008헌가23 전원재판부 그래도 7:2가 5:4가 된 걸 보면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역대 두번째 사형제 합헌이었다.
항소심을 맡은 광주고법은 항소를 기각했다. 광주고법은 2010년 3월 “두번째 범행은 추행 목적으로 피해자들을 더 외진 선착장으로 유도해 승선시킨 뒤 젊고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 유족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기고도 태연히 생업에 종사하고 허무맹랑한 변명을 늘어놓아 더 큰 고통을 안기고 있다”며 “개전의 정이나 향후 건전하게 사회 복귀할 수 있는 교화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고 1심의 사형 선고를 유지했다.
대법원(주심 안대희 대법관)은 그해 6월 “사형 선고의 양형 기준이 아무리 엄격하다고 해도 사형제가 존치하는 한 범행에 상응하는, 즉 영원히 사회와 격리하는 극형 선고는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결국 2010년 6월 상고가 기각됨에 따라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도 수감 중이다. 현재 86세이며 대한민국의 최고령 사형수로서 광주교도소 1번방에서 복역하고 있다. 2심 판결문, 3심 판결문 참고로 신축된 광주교도소에는 과거의 광주교도소와 달리 사형장이 없기 때문에 사형수는 1번방에서 생활한다.
4. 관련 창작물[편집]
문성근, 추자현이 주연으로 나온 《실종》이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었다고 홍보했지만 실제 사건과의 접점은 극히 드물다. 결말 부분에 나오는 어부의 배에 여성 두 명이 타는 모습을 넣어 이 사건을 은연 중에서 연관했다.
5. 미디어에서[편집]
- 2013년 6월 17일 KBS1 긴급출동 24시에서 방영했다.
- 2024년 2월 29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17회에서 방영되었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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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추석 당일이었다.[2] 다만 언론에서는 연쇄살인으로 표시한다.[3] 며칠이나 더 바닷물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던 탓에 시신의 상태는 먼저 발견된 사람보다 더욱 좋지 못했다고 한다.[4]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따르면 증거로 확보된 것은 1차 사건의 남성 피해자의 바지에 묻은 오종근의 배 바닥 페인트와 같은 색의 얼룩, 오종근이 남성 피해자를 내리쳤다고 하는 삿갓대, 여성 피해자가 119에 구조 요청을 시도한 통화 기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지의 얼룩은 페인트와 성분이 달랐고 삿갓대는 완전히 분해해 검사했음에도 피해자의 DNA가 나오지 않았으며,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던 통화 기록에서는 그나마 녹음된 배의 엔진 소리가 오종근의 배 엔진 소리와 같다는 것을 간신히 확인했지만 증거로는 부족했다. 그때 여성 피해자의 아버지가 당시 사건 담당 검사에게 '내 딸은 어디를 가든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그것을 찾는다면 거기 증거가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제보했지만 이미 망망대해에 빠졌으면 영영 못 찾는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 그때 어선의 쌍끌이 어망에 디지털카메라가 걸려 올라오고, 해수에 잠겨 있던 카메라의 메모리를 국과수가 복원해내는 두 번의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 끝에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더욱 아슬아슬하게도 담당 검사가 결정적 증거가 될 사진을 받은 것은 바로 오종근을 기소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고. 꼬꼬무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들려준 당시 담당 검사는 '피해자의 한이 그만큼 컸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5] 다만 1930년대생으로는 평균 키이다.[6] 뉴스에 나온 인터뷰 영상에도 "유방을 만지려고 했는데 거부해서…"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고 조사 과정에서도 이와 같이 진술했다.[7] 바다에 떠 있는 물체를 건지거나 부표를 걸어서 당길 때 사용하는 갈고리 달린 막대 형태의 어구(漁具). 별로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도구인지 구글링을 하면 이 사건에 사용된 증거물품이 가장 먼저 검색된다.[8] 이처럼 둘 사이에 시간차를 둠으로써 한 명이 자신이 당할 일을 예측하고 범죄의 증거를 남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지품이나 카메라를 선실 곳곳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9] 권일용의 이야기를 듣던 다른 패널들도 오종근이 돌변하는 부분에서 어이없다는 듯 잠시 헛웃음을 보였고 윤종신도 오종근의 태도를 두고 "비겁한 사람"이라고 평했다.[10] 차남은 사건 18년 전이었던 1989년에 요절했기 때문에 오종근의 자식들은 딸만 5명이 남았다.[11] 1963년생, 인터뷰 당시 44세.[12] 고령 범죄자는 사형을 시키지 않고 무기징역을 때려도 어차피 가석방 가능 시기(수감 이후 20년)를 맞이하기 전에 복역 중 사망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라면 사형이 구형되더라도 굳이 선고까지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대표적인 사례다.[13] 위헌 소송을 낸 인물은 '정석범'으로, 1993년에 여자 초등학생을 강간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뒤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장작더미에 내던진 뒤 불태운 잔인한 살인범이다. 이전에 일어났던 유치원생 2명 혀 절단 사건의 범인인 12살 초등학생에게도 범행을 사주한 것으로 알려져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혀 절단 건은 무죄가 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99년에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