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제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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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시기 성채가 있던 서쪽 언덕 (밤 보루제르드)에서 바라본 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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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경 카자르 왕조기에 세워진 솔타니 모스크 (마스제드 이맘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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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성직자 집안인 사다트 타바타이 가문의 핫지 아가 카말웃딘 나바비 타바타이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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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년경에 세워진 자메 마스제드 (금요 사원). 현존하는 이란의 대형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되었다.

1. 개요
2. 역사
2.1. 중세
2.3. 근현대
2.4. 현대
3. 기타
4. 갤러리


1. 개요[편집]


페르시아어: بروجرد
영어: Borujerd

이란 중서부 로레스탄 주의 도시. 보루게르드, 부리예르드로도 표기된다. 호라마바드에서 동북쪽으로 60km, 아라크에서 서쪽으로 70km, 말라예르에서 남쪽으로 35km, 나하반드에서 동남쪽으로 40km 떨어진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24만명으로, 페르시아인루르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세와 근대 시기 서부 이란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시내에는 옛 건물이 많다. 9세기 둘라프 왕조 시절에 세워진 자메 모스크를 포함하여 일 칸국기의 이맘자데 자파르 영묘, 카자르 왕조기의 솔타니 모스크, 여러 저택 등이 있다. 서북쪽 외곽에는 옛 성채와 다리로 구성된 칼레 하탐 유적이 있다. 1909년과 2006년 두 차례 대지진을 겪었고, 그때마다 복구되었다. 해발 1600m의 고지대에 위치하여 영하 5도 ~ 36도의 선선한 기후를 지닌다.

로레스탄 주의 주도는 아니지만 이란 40대 도시 중 하나로써 대학이 꽤 있다. 시가지 서북쪽에는 아자드 이슬람 대학교 보루제르드 대학교, 동북쪽에는 페르헨기얀 제이납 쿠브라 대학, 동남쪽 5km 지점에는 아야톨라 보루제르디 대학교가 있다. 자체 공항은 없어 호라마바드나 아라크, 하마단의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오랜 역사 덕에 유명인을 다수 배출하였다. 20세기 중반 이란의 그랜드 아야톨라 (무르자아) 였던 세이드 호세인 보루제르디, 20세기 중반의 여가수 마바쉬 (마수메 아지지), 이란-이라크 전쟁 시의 장군 모하마드 보루제르디, 아르메니아계 작곡가 & 지휘가 로리스 체크나보리안, 여성운동가 자흐라 라나바르드, 배우 겸 극작가 모스타파 압돌라히, 역사가 자파르 샤히디, 작가 압돌모함마드 아야티 등이 있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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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 사산 제국기 성채로 추정되는 칼레 하템 유적

보루제르드가 속한 실라코르 평원은 로레스탄 지역의 주요 평야 지대로써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고, 인근 언덕들에서는 신석기 시대 토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상고대에 일대는 메디아 본토의 남쪽 경계로 여겨졌고, 기마병에 필요한 말의 공급처로써 중시되었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절 실라코르 평원에는 군대 주둔지 겸 역참 성격의 성채들이 세워졌고, 그중 하나는 현 도시 남쪽의 루미얀 언덕에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보루제르드는 파르티아 왕공 비로가 창건한 도시로, 그의 이름을 따 비로게르드 (ویروگرد)라 명명되었다. 혹은 옛 지명은 '승리의 도시'란 의미인 피로즈게르드였다 한다.[1] 확실한 것은 파르티아 시기 기존의 성채가 도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사산 제국기에도 계속 군사 기지였고, 파흘레 지방의 5대 구역 중 하나인 나하반드에 예속되었다. 이슬람 정복나하반드 전투에서 패배한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메르브로 향하였다.

2.1. 중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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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둘라프 왕조기의 자메 마스지드
14세기 일 칸국기의 이맘자데 자파르 영묘

전란으로 파괴된 도시는 9세기 후반 압바스 왕조의 혼란을 틈타 서부 이란에서 자립한 둘라프 왕조에 의해 재건되어 보루제르드라 불렸다. 비록 둘라프 조는 단명했지만, 도시는 이후로도 번영하였다. 보루제르드는 둘라프 조의 수도이자 지발의 주도였던 카라지보다 규모가 컸고, 과일을 비롯한 물품을 그에 공급하였다. 930년경 지여르 왕조의 창건자 마르다비즈가 도시를 장악했으나 곧 피살되었고, 959년경 쿠르드 부족장 하사나위예 빈 호세인이 일대를 장악하였다. (하사나위예 왕조) 그의 후계자인 아불 나즘 바드르는 보루제르드에서 화폐를 주조하였다. 다만 얼마후 도시는 부와이 왕조령이 되었다. 1023년 현지 유력자 페르하트 빈 마르다비즈가 쿠르드 인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하마단 부와이 왕조의 사마 앗 다울라는 아들 샴스 앗 다울라를 보내어 도시를 포위하였다. 하지만 페르하트는 이를 버텨내었고, 카쿠이 왕조의 알라 앗 다울라와 함께 역으로 하마단을 포위하였다.

이로써 보루제르드와 서부 이란은 카쿠이 왕조령이 되었으나, 불과 20여년 후 셀주크 제국이 접수하였다. 셀주크 시기 보루제르드는 바그다드이스파한을 잇는 요충지로써 중시되었다. 그 길을 지나던 니잠 알 물크의 장관 알레프 아르슬란이 피살되었고, 술탄 바르키야루크 역시 1105년 바그다드로 향하던 중 보루제르드에서 병사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후자는 보루제르드 북쪽에 묻혔다고 한다. 셀주크 제국의 붕괴 후 보루제르드는 호라즘 제국령이 되었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종교적인 도시로 알려졌다. 하지만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 2세가 보루제르드 부근을 거쳐 도주한 것을 계기로 1220년 몽골 제국군이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몽골-호라즘 전쟁의 혼란 후 일대는 루르계 아타바칸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아타바칸 왕조는 여러 도시를 분할 통치하였고, 14세기 후반에는 왕공 이즈엣딘 빈 슈자에딘 마흐무드가 보루제르드에 봉해졌다.

2.2. 카자르 왕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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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타키 미르자 (후삼 앗 술타네)
아불 파테흐 미르자 (살라르 앗 다울라)

1389년 일대를 접수한 티무르는 이즈엣딘을 사마르칸트로 압송하였다. 1400년 티무르는 조지아 원정에 앞서 손자 루스탐 미르자에게 보루제르드의 재건을 명하였다. 16-17세기 사파비 제국 시절 보루제르드는 이따금씩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1588년 보루제르드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하마단 총독 코르캄스 칸 샤말로가 오스만 군에 패배하였고, 그는 이후 아바스 1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18-19세기 카자르 왕조 시기 일대는 보루제르드-로레스탄 주에 속하였고, 1826년 총독으로 부임한 파트 알리 샤의 아들 모하마드 타키 미르자는 관할 영역에 후제스탄을 더하고는 보루제르드를 그 중심지이자 왕부로 삼았다. 이로써 그는 '술탄의 칼날'이란 의미인 후삼 앗 술타네 칭호를 받았다. 1830년 케르만샤 총독 모하마드 호세인 미르자가 호라마바드를 공격하자 후삼은 반격에 나섰는데, 말라예르 총독인 동생 셰이크 알리 미르자가 보르제르드를 포위하였다.

이에 회군한 호삼 앗 술타네는 셰이크 알리를 격퇴하였고, 이어서 호라마바드 수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파트 알리 샤는 세 왕공들을 소환하여 모하마드 로 하여금 후삼에게 배상하도록 하여 분쟁을 일단락시켰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배상금이 지급되지 않자 후삼은 호라마바드를 포위하였으나, 모하마드가 보루제르드로 진격하자 회군해야 했다. 보루제르드 포위가 45일간 이어진 끝에 파트 알리 샤는 골람 호세인 칸 세파다르를 보루제르드 총독으로 봉하여 파견하고 후삼을 소환하여 테헤란 궁정에 머물게 하였다. 하지만 1834년 파트 알리 샤가 사망한 후 벌어진 내전에서 후삼은 파르스 총독 호세인 알리 미르자를 지지하였고, 그로부터 보루제르드 총독으로 봉해졌다. 다만 얼마후 내전이 모하마드 샤의 승리로 귀결되자 후삼은 항복하여 유배되었고, 말년에는 호라산 총독으로 봉해졌다가 1861년 사망하였다. 이후 한동안 보루제르드 총독위는 왕족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2.3. 근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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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제르드 옛 성벽

그러던 1900년, 모자파르 앗딘 샤는 아들 아불 파테흐 미르자 살라로돌레를 보루제르드에 기반한 로레스탄-후제스탄-바크티야리 총독에 봉하였다. 카자르 시기 보루제르드에는 화폐 주조소도 있었다. 1909년 입헌혁명 후 살라로돌레는 동생 모하마드 알리 샤의 복위를 돕기 위해 이란을 떠났고, 쿠르드 부족들과 오스만 제국의 도움으로 한때 서부 이란을 장악하는 등 소요를 일으켰으나 사베흐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후로도 코르데스탄에서 반란을 시도하던 그는 러시아 제국의 중재로 길란 총독에 선임되었다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후 완전히 추방되었다. 한편 1909년 1월 보루제르드에는 규모 7.3의 대지진이 벌어져 일대에서 7천여명이 사망하였다. 팔라비 왕조 시절 도시는 서남부 이란 전역의 총독부에서 서부 이란의 12개 군중 하나로 격하되었고, 1935년 공식적으로 도시가 되었다.

2.4. 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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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파괴된 카자르 시기 건물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보루제르드에는 후제스탄발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다만 보루제르드 역시 51차례 폭격을 당하였고, 그중 1984년 1월의 폭격 때에는 학교에 폭탄이 떨어져 60여명의 학생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보루제르드는 다른 로레스탄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피해 복구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였다. 2006년 3월, 규모 6.1의 지진이 도시 바로 옆에서 일어나 70여명이 사망하고 시내의 건물 다수가 붕괴하는 비극을 겪었다.

3. 기타[편집]


이란 내에서 보루제르드는 깨끗하고 쾌적한 도시로 통한다. 자연 환경이 우수하고, 기후도 선선하기 때문이다. 특히 봄에 방문하면 좋다.

4.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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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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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서쪽의 초카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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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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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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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옛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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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7년에 세워진 이맘자데 자파르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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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타니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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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최고의 모스크 중 하나인 자메 마스지드
타바타이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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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바타이 저택과 연결된 에프테카르 올 이슬람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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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시기의 칼레 하템 수도교
복원 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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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하템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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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옛 시나고그
옛 모스크 대문
[자메 모스크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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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하탐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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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제르드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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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사산 제국의 샤한샤 페로즈 1세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