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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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雲
생몰년도 미상

신라 진흥왕 시대의 화랑이자 국선.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조선 초기의 역사서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동사강목의 기록에서 등장한다.

진흥왕 재위기에 관직에 오른 두 집안이 있어서 한 집안에서는 아들인 백운(白雲)이 태어나고, 또 한 집안에서는 딸인 제후(際厚)가 태어나 서로 혼인을 약속하였다. 이후 백운은 14세의 나이로 국선이 되었으나, 15세의 나이에 눈이 멀어 맹인이 되었다. 그러자 제후의 부모는 딸을 백운이 아닌 무진태수(茂榛太守) 이교평(李佼平)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다.

그러자 제후는 이교평에게 떠나가기 전에 은밀히 백운을 만나 신의를 지켜서 자신을 찾으러 무진으로 찾아와 줄 것을 부탁하였고[1], 이교평에게 시집가게 된 후에는 길일을 잡아야 한다는 핑계로 혼인을 미루었다. 그 사이에 백운이 무진으로 찾아와서 제후를 데리고 몰래 달아났는데, 산골짜기에서 협객(俠客), 그러니까 산적들을 만나 제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자 백운을 따르던 무리[2] 중 하나로서 용력이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던 김천(金闡)이라는 이가 협객들을 뒤쫒아서 죽이고 제후를 되찾아왔다. 진흥왕 27년(566년) 2월에 왕이 이를 알고는 세 사람(백운, 제후, 김천)의 신의를 가상하게 여겨 그 관작을 3급씩 올려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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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사강목에 의하면 제후가 백운에게 “한 때에 같이 태어나서 부부로 언약된 지 이미 오래다. 부모가 그 약속을 어기니, 부모의 명을 어기면 불효가 되고, 무진(茂榛)으로 시집을 가면 죽고 사는 것이 나에게 있다. 그대가 신의(信義)가 있거든 나를 무진으로 와서 찾아라.”라고 하였다.[2] 백운이 비록 불편한 몸이 됐지만 그 전에 국선으로 화랑이었으므로, 김천은 낭도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