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파라이소

덤프버전 : r



[ 펼치기 · 접기 ]
문화유산
라파누이 국립공원
칠로에섬의 교회들
발파라이소 항구 도시 역사 지구
움베르스톤과 산타 라우라 초석 작업장
세웰 광산 마을
카팍냔―안데스의 도로 체계




Valparaíso
발파라이소
파일:Escudo_de_Valparaíso_(Chile).svg
문양
국가
칠레

발파라이소주
Región de Valparaíso
면적
401.6 km2
인구
284,630명

시간대
UTC -4
서머타임: UTC -3
고도
10m


Valparaíso.







파일:valparaiso.jpg
파일:1000px-Valparaíso_panorámica.jpg
이 사진에 보이는 항구는 군함도 정박한다. 애초에 발파라이소는 칠레 해군의 기항지이자
본부가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1. 개요
2. 역사
2.1. 19세기
2.2. 20세기
2.3. 21세기
3. 지리
3.1. 지질
3.2. 기후
4. 도시 경관
5. 인구 통계
6. 정부
7. 경제
8. 교통
8.1. 케이블카
8.2. 발파라이소 대중교통 통계
8.3. 발파라이소 항구
9. 문화
10. 보건 서비스
11. 스포츠
12. 교육
12.1. 교육시설
12.2. 대학시설
13. 유명한 거주자
14. 쌍둥이 도시 – 자매도시
14.1. 협력관계




1. 개요[편집]


발파라이소는 칠레 발파라이소 현의 코무나이다. 그레이터 발파라이소는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대도시 지역이다.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발파라이소는 칠레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의 수도이며, 1817년부터 칠레 해군의 본부가 되었고 1990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 국민회의가 개최되었다.

발파라이소는 19세기 후반 마젤란 해협을 건너 대서양태평양을 오가는 선박의 주요 경유지 역할을 했을 때 중요한 지정학적 역할을 했다. 발파라이소는 유럽 이민자들의 자석으로서 황금기에 급속한 성장을 경험했는데, 당시 이 도시는 국제 선원들에 의해 "리틀 샌프란시스코"와 "태평양의 보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증권거래소, 칠레 최초의 공공도서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페인어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 데 발파라이소가 있다. 2003년에 발파라이소의 역사적인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세기는 발파라이소에게 불리했는데, 많은 부유한 가문들이 도시를 버렸기 때문이다. 1914년 파나마 운하의 개통과 그에 따른 선박 수송 감소는 발파라이소의 항구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산안토니오 항구는 무역량(TEU)에서 발파라이소를 앞질렀다.'

21세기의 첫 15년 동안 도시는 회복기에 이르렀고, 도시의 언덕에 있는 역사 지구에 예술가와 문화 사업가를 끌어들였다. 오늘날,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자갈이 깔린 골목과 화려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의 미로를 즐기기 위해 전세계에서 발파라이소를 방문한다. 발파라이소 항은 여전히 컨테이너 운송, 구리, 과일 수출의 주요 물류 중심지이다. 발파라이소는 또한 남아메리카의 여름 동안 방문하는 유람선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발파라이소가 4개의 큰 전통 대학과 몇 개의 큰 직업 대학을 가진 주요 교육 중심지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이 도시는 보헤미안 문화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축제와 거리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이 있다.


2. 역사[편집]


발파라이소 만은 아마도 농업으로 유명한 피쿤체 원주민이나 오늘날의 칼데라와 콘셉시온을 오가는 유목민이었던 창고인들이 처음 거주했을 것이다. 스페인 탐험가들은 1536년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보낸 보급선인 산티아구요호를 타고 도착했다. 산티아구이요는 후안 데 사베드라의 지휘 하에 알마그로의 원정을 위한 병력과 물자를 운반했는데, 사베드라는 그의 고향 마을인 쿠엥카 지방의 발파라이소 데 아리바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발파라이소는 몇 채의 집과 교회만 있는 작은 마을로 남아 있었다. 1578년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그의 배 골든 힌드와 함께, 1594년 그의 사촌 리처드 호킨스가 그의 배 데인티와 함께 영국 해적들과 사략선들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다.

1810년, 한 부유한 상인이 칠레 역사상 최초의 부두와 식민지 시대에 최초의 부두를 건설했다. 오늘날 그 자리에 엘 메르쿠리오 데 발파라이소의 건물이 서 있다. 그리고 나서 바다는 이 지점까지 솟아올랐다. 바다에서 육지를 매립한 결과 해안선이 5블록이나 멀어졌다. 1810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는 현재 도시의 상업 중심지를 제공하는 토지 개간 공사를 포함하여 기존의 항구 대부분을 건설했다.

1814년 발파라이소 해전은 1812년 영국-미국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1818년 칠레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공화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발파라이소는 초기 칠레 해군의 주요 항구가 되었고, 이전에는 스페인과 다른 식민지들에 국한되었던 국제 무역의 기회를 열었다.

발파라이소는 곧 마젤란 해협과 혼 곶을 통해 남아메리카를 횡단하는 선박의 목적지가 되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골드러시(1848–1858)를 지원하고 공급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주요 항구로서 발파라이소는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많은 유럽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가 시민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쓰였으며, 이들은 이 언어들로 신문을 창간하고 발행했다.

1820년대와 1920년대 사이에 발파라이소에서 영국 공동체 라 콜로니아 브리타니카가 번성했다. 1840년까지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된 이 마을에서 안토니 깁스 & 선즈, 던컨 폭스, 윌리엄슨-발포어 컴퍼니 같은 회사들이 사업을 하고 있었고, 총 287척의 영국 배들 중 166척이 항구에 정박했다. 영국은 세로 알레그레 산과 세로 콘셉시온에 정착했다. 1851년에 의용소방대 협회가 설립되었고, 1852년까지 산티아고로의 전신 서비스가 운영되었으며, 1880년에 칠레 최초의 전화 서비스가 설립되었다. 영국병원은 1897년에 설립되었고, 1911년에 아르코 브리타니코가 세워졌다. 그러나 1895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영국을 넘어섰고, 1907년에는 이탈리아인독일인 모두 더 많은 수가 되었다. 1920년까지 이탈리아스페인 모두 영국보다 수가 많았으며, 칠레 내의 주요 영국 공동체는 산티아고에 거주했다.

국제 이민은 칠레의 첫 번째 비 가톨릭 공동묘지인 반체제 인사 묘지의 건설을 포함한 방식으로 스페인 기원과 미국기원으로부터 지역 문화를 변화시켰다. 축구영국 이민자들에 의해 칠레에 소개되었고, 발파라이소에 있는 프랑스 이민자들로 구성된 칠레 최초의 사립 가톨릭 학교(Le Collége de Sacrés Cursurs)는 약 170년 동안 운영되어 왔다. 스코틀랜드독일에서 온 이민자들은 최초의 사립 세속 학교(각각 맥케이 스쿨과 디 도이치 슐레)를 세웠다. 이민자들은 최초의 의용소방대(아직도 칠레의 자원봉사 활동)를 결성했다. 그들의 건물들은 다양한 유럽 스타일을 반영하여 발파라이소를 다른 칠레 도시들보다 더 다양하게 만들었다.

1906년 8월 18일 발파라이소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막대한 재산 피해와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국 혈통의 칠레 의사 카를로스 반 뷰렌은 지진 희생자들의 의료에 관여했다. 1912년 카를로스 반 뷰런 병원을 설립하였다.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면서 발파라이소의 상업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선장들이 마젤란 해협의 위험을 피하려고 노력함에 따라 선박은 운하로 이동했다. 항구의 이용과 교통량이 크게 감소하여 도시의 경제가 쇠퇴하였다. 21세기 이후, 과일 수출로 인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선박 운송이 증가하여 칠레 경제가 세계 무역에 개방되었고 파나마 운하에 맞지 않는 대규모 포스트 파나마 선박이 되었다.


2.1. 19세기[편집]


1814년 3월 28일,미국 에식스 호는 영국 프리깃함 피비와 체럽에게 패배하여 58명의 미국 해병대원이 사망했다. 1820년 8월 2일, 페루 해방 원정대가 발파라이소를 출항한다.

1822년 11월 19일 밤 10시 30분, 발파라이소는 격렬한 지진을 경험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다음날, 퀴요타에서 발파라이소로 가는 운석 자국이 보였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경험으로 여겨졌다.

1826년 영국 해군은 발파라이소에 남아메리카 기지를 건설하여 영국 해군의 관심을 유지하였다. 1837년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에스퀴말트로 이전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1827년 9월 12일 엘 메르쿠리오 데 발파라이소가 설립되었다.

1828년 5월, 헌법 제정 회의가 샌프란시스코 교회에서 열렸다. 8월 9일, 칠레 공화국의 헌법 초안이 완성되어 보급되었다.

1837년 6월 6일, 디에고 포르탈레스 장관은 칠레 여론의 전환점으로 여겨지는 페루-볼리비아 연합에 반대하는 공모자들을 홍보한 혐의로 힐 남작 외곽의 항구에서 총살당했다.

1851년, 최초의 소방대가 창설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도시와 산티아고 사이에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전신 서비스뿐만 아니라 마실 수 있는 수돗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700개의 가스 랜턴이 있는 가로등이 설치되기까지는 또 다른 4년이 걸릴 것이다. 1861년에 첫 번째 트램 회사가 설립되었고, 주로 말이나 노새를 사용하여 그것들을 그렸고, 다음 몇 년 동안 완전히 설립되었다.

1866년 친차 제도 전쟁 당시 카스토 멘데스 누녜스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도시를 폭격했다. 선장이 외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을 제외하고 칠레 상선들은 침몰했다.

1872년 칠레 증기선 회사와 합병한 남아메리카 증기선 회사는 태평양 증기 항법 회사의 지배력에 대한 국가적 대응으로 설립되었다. 1880년 미국인 조지프 허드슨, 피터 맥켈러, 제임스 마틴, 미국 영사 루키우스 풋에 의해 칠레 최초의 공식 전화 회사가 설립되었다. 3년 후인 12월 1일, 여러 유압 시스템 중 첫 번째인 콘셉시온 펑키큘러가 문을 열었다.

독립 이후 발파라이소는 동태평양을 통과하는 무역로의 중요한 기항지가 되었다. 발파라이소와 칠레가 세계의 다른 지역을 휩쓸고 있는 산업혁명에 동참하는 데 도움을 준 유럽북미 출신 이민자들이 그곳에 정착했다. 이것은 시민, 금융, 상업, 산업 기관으로 다른 도시를 만들었고, 그 중 많은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이 인구 증가를 초래했다. 도시는 19세기 말에 160,000명 이상의 거주자에 도달했고, 더 많은 집, 저택, 심지어 묘지를 위해 가파른 언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용 가능한 토지의 부족으로 시 당국과 개발업자들은 행정, 상업, 산업 기반 시설을 건설할 수 있는 저지대의 조석 습지를 매립하게 되었다.


2.2. 20세기[편집]


20세기는 1903년 4월 15일 부두 노동자들의 첫 번째 대규모 시위인 칠레에서 시작되었는데, 부두 노동자들의 과도한 노동시간과 임금인상 요구, 고용주들에 의해 무시된 요구로 인해 5월 12일 심각한 폭력사태로 이어진 긴박한 상황을 만들었다. 시위가 있었고 CSAV 사무실이 불탔으며 여러 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모든 것이 국가의 개입을 촉발시켰다. 이 시위는 그 나라의 노동조합주의의 미래를 위해 중요했다.

같은 해, 전기 트램이 도입되었다.

1906년 8월 16일 발파라이소 지진은 당시 칠레 경제의 중심이었던 도시 전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당시 피해액은 수억 페소로 평가되었으며, 사망자 3,000명, 부상자 20,000명으로 집계되었다. 잔해 제거 후, 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거리를 넓히고, 개울을 파고, 개울을 덮는 것이 포함되었다. 페드로 몬트(Pedro Mont)의 중심가가 놓였고 오히긴스 광장이 조성되었다. 파괴된 에드워즈 저택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의 발파라이소 대성당이 세워졌으며, 다른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알멘드랄 발파라이소 지역에 형태를 갖추었다.

1910년, 1930년에 끝난 도시의 항구 확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긴 방파제가 부두와 도킹 터미널과 함께 건설되었다.

1914년 파나마 운하의 개통으로 발파라이소가 마젤란 해협을 통해 북대서양에서 북태평양으로 가는 주요 정박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상실하면서 항구 활동이 심각하게 감소하였다.

1914년 11월 1일 발파라이소 해안에서 벌어진 코로넬 해전에서 독일 제국령 동아시아 전대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 전대와 교전하여 영국 순양함 2척을 격침시켰다. 전투가 끝난 후 동아시아 함대는 포클랜드로 계속 가기 전에 발파라이소 항에 머물렀다.

1915년 11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2.3. 21세기[편집]


칠레의 입법부와 국립관세청, 국립어류수산양식부, 문화부, 칠레 해군 병영과 막사 등이 이 도시에 위치해 있다. 발파라이소 주의 주도와 더불어 행정부와 행정부를 관할한다.

2014년 4월 13일, 거대한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서 2,800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16명이 사망했으며,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은 이곳을 재난구역, 재난지역으로 선포해야 했다.


3. 지리[편집]


발파라이소는 칠레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1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대부분의 칠레와 마찬가지로 발파라이소는 지진에 취약하다. 2010년 2월 27일, 규모 8.8의 지진이 일어나기 전, 1906년 8월 발파라이소를 강타한 마지막 재앙적 지진이 도시를 황폐화시켜 거의 3,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1730년 발파라이소 지진과 1985년 알가로보 지진도 이 도시에 영향을 미쳤다.


3.1. 지질[편집]


발파라이소는 페루-칠레 해구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지진에 취약하다. 페루-칠레 해구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에너지를 저장하며, 때때로 격렬한 지진에서 짧은 간격으로 파열되기도 한다.


3.2. 기후[편집]


발파라이소는 지중해성 기후(쾨펜 Csb)가 매우 온화하다. 여름은 본질적으로 건조하지만, 도시는 1년 중 대부분 동안 험볼트 해류의 안개에 영향을 받는다. 겨울에는 강력한 전방 시스템이 칠레 중부를 통과할 때 때때로 매우 많은 비가 내릴 수 있지만, 이러한 강우의 빈도는 매년 크게 다릅니다. 한 달 평균 기온은 1월의 17 °C에서 7월의 11.4 °C까지, 가장 추운 달과 가장 따뜻한 달 사이에 약 6 °C 정도이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다. 겨울에는 강한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로 떨어질 수 있다.


4. 도시 경관[편집]


"태평양의 보석"이라는 별명이 붙은 발파라이소는 즉흥적인 도시 디자인과 독특한 건축물을 바탕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96년, 세계기념물기금은 발파라이소의 특이한 리프트 시스템을 세계에서 가장 멸종 위기에 처한 100대 역사적 보물 중 하나로 지정했다. 1998년, 풀뿌리 운동가들은 칠레 정부와 지방 당국이 발파라이소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위를 신청하도록 설득했다. 발파라이소는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수십 개의 가파른 언덕 위에 지어진 발파라이소는 미로와 자갈로 된 골목길을 가지고 있어 풍부한 건축과 문화적 유산을 구현한다. 발파라이소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랜드마크는 다음과 같다.

이글레시아 데 라 마트리즈

아니발 핀토 광장

Edificio Armada de Chile을 포함한 Sotomayor 광장

에디피오 루이스 쿠시뇨

법원

현재 남아 있는 16개의 국립 기념물: 15개의 공공 기념물과 1개의 민간 기념물(병원 카를로스 반 뷰런)이 있다.

콘셉시온과 알레그레 역사 지구

벨라비스타 언덕에는 '시엘로 아비에르토 박물관' 또는 '노천 박물관'이 있다.

제10대 던도날드 백작 토머스 알렉산더 코크레인 제독 기념비

칠레 초대 대통령 마누엘 블랑코 엔칼라다 기념비

판테온 언덕에 있는 묘지들 – 1번 묘지 (천주교)와 반체제 인사 묘지 (프로테스탄트)


5. 인구 통계[편집]


칠레에서 6번째로 큰 도시로, 비냐델마르, 콩콘, 퀼푸에, 빌라 알레마나를 포함한 대발파라이소 대도시권은 칠레에서 2번째로 큰 도시(803,683명)이다.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발파라이소 코뮌의 면적은 401.6km2이고, 인구는 275,982명(남자 135,217명, 여자 140,765명)이다. 이 중 27만5141명(99.7%)은 도시에, 841명(0.3%)은 농촌에 거주하고 있다. 인구는 1992년과 2002년 사이에 2.4% (6858명) 감소했다.

발파라이소의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포르테뇨(여성: 포르테냐스)라고 불린다.


6. 정부[편집]


발파라이소는 칠레의 행정 구역으로 행정 중심지는 발파라이소이며, 행정 구역상으로는 4년마다 직접 선출되는 알칼데이다. 2021-2024 알칼데는 호르헤 샤프 파하르도이다.

칠레 의회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독재 정권 말기에 산티아고에서 이전한 후 발파라이소의 알멘드랄 구간에 있는 현대식 건물에서 열린다. 의회 활동은 1987년 판결에 의해 합법적으로 옮겨질 예정이었지만, 새로 건설된 부지는 1990년 파트리시오 아일윈 정부 때 비로소 의회의 소재지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7. 경제[편집]


주요 산업은 관광, 문화, 해운, 화물 운송이다.

약 50척의 국제 크루즈선이 4개월간의 칠레 여름 동안 발파라이소를 방문한다. 또한 발파라이소 항은 컨테이너 화물의 중요한 중심지이며 와인, 구리, 신선한 과일을 포함한 많은 상품들을 수출한다.


8. 교통[편집]


통근 열차 서비스인 발파라이소 지하철은 2005년 11월 24일에 개통되었다. 이 시스템은 1863년에 건설된 발파라이소-산티아고 철도의 일부를 갱신하는 것을 포함한다. 발파라이소 지하철은 메트로폴리탄 개선의 4단계(쿠아르타 에타파)로 불린다. 지하철은 현재 발파라이소의 도시 중심부와 비냐 델 마르 및 다른 도시들을 연결한다. 그란발파라이소의 대부분을 따라 뻗어있으며, 비냐델마르 상업지구를 가로지르는 터널 구간을 포함하기 때문에 칠레에서 두 번째로 운영되는 도시철도 시스템이다. 산티아고-발파라이소 철도 노선은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를 약 45분 만에 연결할 예정이다.

발파라이소 내의 대중교통은 주로 버스, 트롤리 버스, 펑키큘러에 의해 제공된다. 버스는 시내 중심부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수많은 언덕을 오가는 효율적이고 정기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며, 더 먼 마을에는 장거리 버스가 운행한다. 버스는 여러 민간 회사가 운영하고 있으며 요금과 노선을 관리하는 지역 교통부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발파라이소 트롤리버스 시스템은 1952년부터 운영되어 왔으며, 2019년 풀먼-스탠다드 컴퍼니가 1952년에 제작한 오리지널 차량 중 일부와 이후 인수한 다른 차량들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발파라이소의 풀만 트롤리 버스 중 일부는 1946-48년에 제작되었으며 1970년대에 산티아고에서 중고로 구입했다. 현존하는 풀만 트롤리 버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트롤리 버스이며 2003년 칠레 정부에 의해 국가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발파라이소의 도로 인프라는 특히 "쿠라우마 - 플라실라 - 라 폴보라" 고속도로 우회도로가 완공되면서 개선되고 있다. 또한 발파라이소와 칠레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인 산안토니오를 연결하는 도로와 그 사이에 있는 해안 도시들(예를 들어 라구나 베르데, 퀸테이, 알가로보, 이슬라 네그라)도 건설 중이다.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 사이는 현대 유료 고속도로를 통해 약 80분이 소요된다.

발파라이소로 가는 내부 승객 항공 서비스는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퀸테로 공항을 통해 제공되지만 현재는 좋은 도로로 운행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의 대부분은 산티아고를 통해 도착하거나 유람선을 타고 도착한다.


8.1. 케이블카[편집]


언덕의 경사 때문에 발파라이소의 주변 지역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엘리베이터"가 강력한 명절 하이라이트일 뿐만 아니라 도시의 높은 지역을 계획으로 소통하는 기능을 하는 이유이다. 진정으로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엘리베이터는 수직이기 때문에 아센서 폴랑코입니다. 한편, 나머지는 케이블카이지만 전통적으로 엘리베이터라고 불린다. 지역적으로 아스센서스(ascensors)라고 불리는 몇몇 푸니큘러(funicular)들은 중앙 지역과 주변 언덕의 낮은 경사면 사이의 대중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 중 첫 번째는 1883년에 개통된 아센서 콘셉시온(Ascensor Concepción, 아센서 투리라고도 함)으로 증기 기관으로 운영되며, 여전히 운행되고 있다. Cerro Cordillera 엘리베이터는 1887년에 만들어졌다. 발파라이소에는 28개의 철도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그 중 14개는 1992년에, 12개는 2010년에 운행되고 있다.


Ascensor Conception - 1883년 제작
발파라이소는 국립기념물위원회에 의해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된 15개의 승강기가 있다. 5개는 시유재산이고 나머지는 4개의 민간기업에 속한다. 엘리베이터는 엘페랄, 폴랑코, 빅토리아 여왕, 세인트루이스 세인트루이스에서 운행하는 엘리베이터이다. 어거스틴 (직업으로 체포됨). 나머지 리프트는 플로리다, 나비 및 수녀, 포병, 콘셉시온 및 마운틴스는 발파라이소 성령회에, 라라인 및 빌라세카는 발파라이소 엘리베이터 회사, 유제품(화재로 멈춘 것)은 협회 소유이다. 유제품 세로 리프트 유한회사.


8.2. 발파라이소 대중교통 통계[편집]


사람들이 발파라이소와 비냐델마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평균 시간은 평일 68분이다. 대중교통 이용자의 15%는 매일 2시간 이상 탑승한다. 대중 교통을 위해 사람들이 정류장이나 역에서 기다리는 평균 시간은 13분이며, 승차자의 15%는 매일 평균 20분 이상 기다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한 번의 여행에서 사람들이 보통 타는 평균 거리는 7km인 반면, 12%는 한 방향으로 12km 이상 이동한다.


8.3. 발파라이소 항구[편집]


발파라이소 항은 남태평양 터미널 SA가 관리하는 10개 지점과 발파라이소 항만 회사의 6,7,8,9,10개 지점으로 나뉜다. 마지막 두 장소는 선착장을 포함하며 공중 산책로와 크루즈 여객 터미널로 사용된다.

발파라이소는 칠레의 주요 컨테이너 및 여객 항구로 연간 1,000만 톤을 수송하고 있으며, 약 50척의 크루즈 및 150,000명의 승객을 수송하고 있다.


9. 문화[편집]


발파라이소의 황금기(1848-1914) 동안 발파라이소는 주로 유럽에서 온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다. 이민자 공동체는 그 도시의 주목할 만한 건축물에 독특한 각인을 남겼다. 각 공동체는 그들만의 교회와 학교를 지었고, 많은 사람들은 다른 주목할 만한 문화 및 경제 기관들을 설립했습니다. 가장 큰 이민자 공동체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왔으며, 각각 그들만의 언덕 위 이웃을 개발하여 오늘날 국가 역사 지구 또는 "조나스 티피카"로 보존되었다."

아르코 브리타니코
20세기 후반, 발파라이소는 부유한 가문들이 번화한 산티아고나 인근 비냐 델 마르로 이주하면서 큰 쇠퇴를 겪었다. 1990년대 초, 도시의 독특한 유산들 중 많은 부분이 사라졌고 많은 칠레 사람들은 도시를 포기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발파라이소에서 풀뿌리 보존 운동이 꽃을 피웠고, 오늘날에는 거리, 골목길, 계단에서도 그래피티 예술가들이 만든 방대한 수의 벽화를 볼 수 있다.

북미의 시인 토드 템킨이 설립한 발파라이소 재단은 주요 지역 재개발 사업을 수행했고, 도시의 관광 인프라를 개선했으며, 도시의 재즈, 민족 음악, 오페라 축제 등을 운영했다. 주목할 만한 재단 프로젝트로는 세계유산 산책로, 바다 옆 오페라, 칠레의 "문화 수도"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템킨은 엘 메르쿠리오 데 발파라이소에 있는 영향력 있는 일요일 칼럼을 사용하여 칠레 의회에서 "리 발파라이소 법"을 제정하고 칠레 정부가 발파라이소의 사랑받는 음악 보존을 위한 자금을 보장해야 할 가능성 등 많은 주요 정책 문제를 옹호해왔다.대형 엘리베이터

발파라이소의 신문인 엘 메르쿠리오 데 발파라이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페인어 신문이다.

펀다시온 루카스(Fundacion LUKAS)는 발파라이소를 대중문화에서 상징하게 된 만화가 렌초 안토니오 조반니 페체니노 라기(예명 LUKAS)의 그림과 그림을 만이 내려다보이는 새로운 복원된 건물에 보관하고 있다.

발파라이소는 또한 "발파라이소 학교"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발파라이소 학교"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며, 논쟁적인 건축 학교들 중 하나였다.

발파라이소는 매년 마지막 3일에 수십만 명의 참가자들이 참석하는 주요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는 만이 보이는 해안선과 산비탈을 가득 메운 1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참석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가장 큰 "해변에서 새해맞이" 불꽃 쇼로 절정을 이룬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발파라이소 불꽃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발파라이소에서 비냐 델 마르를 지나 콘콘까지 해안의 많은 부분을 따라 달리는 불꽃놀이이다.

2003년 칠레 의회는 발파라이소를 "칠레의 문화수도"로 선포했다.

발파라이소는 다양한 도시 야간 활동을 제공한다. 소토마요르 광장 근처에는 전통 술집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발파라이소에 대한 생생한 안내서는 세로 콘셉시온의 그림 같은 파세오 제르바소니의 빅토리아 시대의 집에 사는 사립 탐정 카예타노 브루레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10. 보건 서비스[편집]


공공 의료 시스템은 주로 계획에 위치한 카를로스 반 뷰런 병원과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발파라이소 병원(공식적으로는 에두아르도 페레이라 병원)에 의존한다. 로크 힐. 칠레 대학교의 클리니카 바론, 알레만 병원(폐원 예정), 플라야 안차 언덕에 있는 옛 해군병원과 같은 여러 클리닉도 있다.


11. 스포츠[편집]


발파라이소에는 여러 공공 스포츠 경기장과 시설들이 있으며, 자전거 도로의 네트워크가 성장하고 있다.

아브에 위치한 클럽 데포르티보 플라야 안차 (플라야 안차 스포츠 클럽) 플레이아 안차 451, 세로 플레이아 안차는 1919년에 개장했으며 축구장, 탁구장, 농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2개, 작은 체육관 등을 갖추고 있다. 테니스와 수영 강습은 지역 대회뿐만 아니라 클럽에서 열리며, 수영장은 여름에 레크리에이션으로 사용할 수 있다.
온타네다에 위치한 컴플레조 데포르티보 에스쿠엘라 해군(해군 스포츠 센터)은 온열 수영장과 실내 배구, 농구, 체조, 유도, 펜싱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럭비, 축구, 테니스에 적합한 광범위한 야외 스포츠 시설을 갖추고 있다.

에스타디오 엘리아스 피게로아 브란데르는 칠레의 축구 클럽인 산티아고 원더러스 FC가 1892년 8월 15일에 창단한 칠레의 축구 클럽이다. 1931년에 지어졌으며, 18,5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육상 경기와 수영 경기장으로도 사용된다.
포르틴 프라트(Fortín Prat)는 알멘드랄주 로손 382에 위치한 역사적인 농구 경기장으로 1950년부터 1970년까지 발파라이소 농구의 "황금 시대"를 개최하였다. 포트 프랫은 또한 수많은 지역 핸드볼, 탁구, 복싱 선수권 대회를 주최했다. 발파라이소 농구 협회 박물관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뮬레 데포르티보 쿠라우마는 파뉴엘라스 호수의 발파라이소에서 20분 거리에 있다. 195km2의 석호의 잔잔한 물은 노 젓기, 카약, 낚시, 보트를 허용한다. 2014년 남미 경기장으로도 선정되었다. 석호 주변에는 캠핑장, 자전거와 하이킹 코스, 페인트볼과 캐노피 시설이 있다.
푸에르토 데포르티보 발파라이소는 보르데마르 센트로 주 물엘레 바론에 위치한 수상 스포츠 센터로, 항해, 카약, 스쿠버 다이빙 레슨을 제공하고, 이 지역의 수중 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발포 서브" 프로그램을 개최하며, 만을 따라 있는 난파선에 대한 교육적인 투어와 탐험을 제공한다. 푸에르토 데포르티보 발파라이소는 또한 발파라이소 만에서 생태관광을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레슨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장비를 대여하고 있다. 그것은 수중 유산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는 대화형 방을 특징으로 한다.
벨로드로모 로베르토 파라는 클럽 데포르티보 플라야 안차 맞은편에 위치해 있으며, 더 넓은 복합 단지의 일부이다. 벨로드롬에는 사이클 트랙, 테이블 풋볼, 핸드볼과 농구 코트가 있다. 그곳의 모든 시설은 공공 임대료로 이용할 수 있다.
발파라이소는 1959년 농구 월드컵의 개최도시 중 하나로 칠레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발파라이소 다운힐"은 2월에 열리는 산악자전거 경주이다. 라이더들은 계단과 골목길을 따라 도시의 거리를 질주하며, 경사로를 통해 스스로 길을 찾고 "계획" (발파라이소의 "저지대")으로 뛰어내린다. 발파라이소 활강 경기는 찹 MTB에 의해 "가장 미친 도시 활강 경기"로 묘사되었다.
2005년 이후, 5km, 10km, 21km, 마라톤 거리 등의 달리기 종목들이 도시에서 열렸다. 이 경주는 물레 바론에서 시작되며 코스는 해안가를 따라 달리며 다양한 건축물과 지리적 랜드마크를 가로지른다.

2014년 다카르 랠리의 마지막 무대는 발파라이소의 소토마요르 광장에 세워졌고, 역사적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2014 쿼드 부문 칠레 우승자인 이그나시오 카살레는 발파라이소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12. 교육[편집]



12.1. 교육시설[편집]


초등학교 수준에서 발파라이소는 리체오 에두아르도 데 라 바라와 살레시아 대학 발파라이소와 같은 이 지역에서 가장 상징적인 학교들을 자랑한다. 다른 랜드마크로는 크리스천스 학교, 산 라파엘 신학교, 리세 장 달랑베르, 콜레지오 산 페드로 놀스코, 스쿠올라 이탈리아나 아르투로 델로, 도이체 슐레 발파라이소 등이 있다. 이 계획에 명시된 많은 학교들은 도시, 특히 알멘드랄 지역에 바로 위치해 있다.

또한 발파라이소는 유럽 식민지에 의해 설립된 많은 사립학교의 발상지였으며, 독일 학교, 얼라이언스 프랑세즈, 맥케이 칼리지(현재의 비냐델마르에 위치), 발파라이소 성심 대학(College of the Sacred Hearts of Valparaiso)이 1837년부터 운영된 이래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학교이다.


12.2. 대학시설[편집]


발파라이소에는 칠레의 가장 중요한 대학인 발파라이소 가톨릭 대학교, 발파라이소 대학교, 플라야 안차 대학교, 페데리코 산타 마리아 공과대학교가 있다. 이 마지막 건물의 본관은 '세로 플라세레스' 언덕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튜더 고딕 건축과 르네상스 건축이 특징적이기 때문에 도시의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 도시에는 다양한 규모, 질, 초점을 가진 비전통적인 대학들이 많이 있다.


13. 유명한 거주자[편집]


발파라이소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출생지이다.

작곡가 아벨라르도 퀸테로스

살바도르 아옌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카밀로 모리

에스테반 올랜도 해링턴, 건축가

마티아스 노보아

클라우디오 나란호, 칠레 태생의 정신과 의사

호주의 세 번째 총리이자 첫 번째 호주 노동당 총리인 크리스 왓슨

Curt Echtermeyer, Curt Bruckner (1896–1971)라고도 알려진 화가

퍼시 존 대니얼, 수학자

마르시아 알렉산더-클라크, 예술가

로베르토 암페로, 칠레 외무장관 발파라이소의 개인 눈동자 카예타노 브루레와 "히조 일루스트레"에 관한 국제적으로 출판된 소설의 작가.

잔카를로 몬살베, 국제 오페라 가수, 발파라이소 문화 대사 및 유네스코 메달

세르히오 바딜라 카스티요 현대 시 트랜스 리얼리즘의 창시자

에르네스티나 페레스 바라호나, 의사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엘비라 산타크루스 오사

알리샤 에레라 리베라(1936-2013), 페미니스트 변호사, 산티아고 항소법원 장관

후아나 로페스(간호사), 육군 간호사

영국의 가수이자 배우인 J. G. 로버트슨

호세 마자 산초 칠레의 천문학자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니카라과의 시인 루벤 다리오, 미국의 시인 마리온 만빌 포프와 같은 많은 작가들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푸에르토리코 독립 운동 지도자 세군도 루이즈 벨비스는 1867년 11월 푸에르토리코에서 사망했다.

호르헤 딥, 변호사 겸 정치인, 발파라이소 주의 주지사


14. 쌍둥이 도시 – 자매도시[편집]


발파라이소는 다음을 가리킨다.

스페인 바달로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스라엘 바트얌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페루 카야오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중국 광저우

쿠바 아바나

미국 롱비치

말레이시아 말라카

멕시코 만자니요

콜롬비아 메데인

러시아 노보로시스크

스페인 오비에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브라질 살바도르

스페인 산타페

중국 상하이시

멕시코 베라크루스


14.1. 협력관계[편집]


발파라이소는 다음과 협력한다.

스위스 바셀

우크라이나 오데사

미국 샌프란시스코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12-15 00:53:13에 나무위키 발파라이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