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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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경의 묘사
3. 전승


요셉 바르나바
Joshep Barnabas
출생지
키프로스
사망지
살라미스
생몰년도
미상 ~ 61년 이후 추정
축일
6월 11일
상징
마태오 복음서 사본, 돌멩이
종교
그리스도교
당대 언어 표기
그리스어
Βαρνάβας
라틴어
Barnabas
한국어 표기
공동번역성서
바르나바
가톨릭
바르나바
개신교
바나바


1. 개요[편집]


신약성경의 등장인물이자 그리스도교의 성인. 마르코(복음사가)의 사촌.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목자였다.

그의 이름은 요셉이고, 바르나바는 그의 별명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그 뜻을 "위로의 아들"(υἱὸς παρακλήσεως)라고 풀이하는데, 이는 아람어 단어 "바르 네흐마"(בר נחמה)와 관련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2. 성경의 묘사[편집]




2.1. 사도행전[편집]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는 요셉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

사도행전 제 4장 36-37절 (이하 공동번역성서)


처음 이름이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4장이다. 예루살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 이끄는 교회가 날로 성장하며, 많은 신도들이 교회에 모이게 되었다. 교회의 신도들은 재산을 한 데 모아 공동소유하며 필요한 만큼 나눠받았는데, 키프로스 섬 출신의 레위 지파 사람인 요셉 바르나바 역시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기부했다.

그 뒤 스테파노순교 이후, 예루살렘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게 된다. 벤야민 지파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그는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러 가던 길에 빛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고 회심한다. 회심한 바울로는 예루살렘으로 내려와 사도들을 만나려 하였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 박해에 앞장선 바울로를 사람들은 믿지 못하며 두려워했다. 이 때 바르나바가 적극적으로 바울로를 다른 사도들에게 소개해주며 그가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바울로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초기 기독교 교회사에 다시없을 영향을 끼치는 사도로서 거듭난다.

박해로 인해 흩어진 교우들이 페니키아키프로스안티오키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되자, 예루살렘의 교회는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보내 사목을 맡게 한다. 바르나바는 타르수스에 가 있던 바울로를 안티오키아로 데리고 와 안티오키아 교회를 함께 사목하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교회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 뒤 교회의 예언자들이 로마 제국에 닥칠 기근을 예언하자[1], 안티오키아 교회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았고 그것을 바르나바와 바울로가 예루살렘에 전달한다. 그리고 바르나바는 바울로와 돌아오며 자신의 사촌 요한 마르코를 함께 데려온다.

그 직후, 안티오키아 교회 사람들이 단식하며 예배드릴 때 성령의 계시가 내려온다.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

사도행전 제 13장 2절


안티오키아 교회의 사목자들은 바르나바와 바울로에게 안수하고, 두 사람은 전도 여행을 떠난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출발했는데, 그들이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향할 때, 마르코는 일행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때까지는 사도행전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바르나바와 사울"의 형태로, 바르나바가 먼저 언급되고 그 다음에 사울이 언급되었지만, 행전 13장 9절에서부터 사울은 "바울로"라는 로마 이름으로 언급되며, "바울로와 바르나바"의 형태로 바울로가 주도적인 위치로 언급된다.

바르나바는 바울로와 함께 그리스 지방을 돌며 복음을 전한다. 리스트라에서는 바울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적을 선보이자, 군중이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왔다!"라고 흥분하며 두 사람을 제우스헤르메스의 화신으로 여겨 제사를 바치려 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2] 당연히 두 사람은 혼비백산하여 그들을 말렸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전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온다.

그 뒤 유다 지방에서 안티오키아로 내려온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자, 바르나바는 바울로와 함께 격렬하게 반발하며 그들과 충돌한다. 결국 이 문제를 두고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리고, 바르나바와 바울로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행한 여러 기적에 대해 보고한다. 결국 의장 야고보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율법이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바르나바와 바울로를 안티오키아 교회로 보내며 이를 널리 알리게 한다.

며칠 뒤, 바울로는 바르나바에게 "지난 번 우리가 복음을 전한 도시들로 가서, 교우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라고 말하며 2차 전도 여행을 제안한다. 그러나 마르코의 합류 여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다투는 원인이 된다. 바울로는 1차 전도 여행 당시에 포기하고 돌아가버린 마르코가 미덥지 못해 같이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은 심한 언쟁 뒤 헤어져 따로 행동하게 된다.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가고, 바울로는 실라를 택하여 시리아로 간다.

15장을 마지막으로 바르나바는 사도행전에서 더 언급되지 않는다.


2.2. 서간[편집]



고린토전서 9장 6절에서 바울로는 바르나바와 자신이 사목자로서 교회 공동체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혹은 나와 바르나바에게만 노동하지 않고 먹을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고린토전서 제 9장 6절; 12절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로는 베드로가 사도회의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신자들을 피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자, 바르나바도 베드로를 따라서 위선을 보였다고 책망한다.

그의 책망받을 일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게파가 이방인 교우들과 한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들어오자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물러나갔습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파와 함께 물러나갔고 심지어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갈라티아서 제 2장 12-13절


골로사이서 4장 10절에서 바울로는 골로사이 교회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의 인사도 전한다. 이후 바울로 서간에서 마르코가 계속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사도행전 15장의 다툼 이후 바울로는 바르나바와 마르코와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3. 전승[편집]



교회 전승에 따르면, 바르나바는 살라미스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에게 고문받고 돌에 맞아 순교했다. 마르코와 다른 제자들이 바다에 던져진 바르나바의 시신을 건져네 인근 묘지에 매장했다.

또 다른 교회 전설에 따르면, 서기 478년 콘스탄티아(살라미스) 대주교 안테미오스의 꿈에 바르나바가 나타나 자신이 매장된 곳의 위치를 알려줬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곳을 파내자, 손수 필사한 마태오 복음서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제노 황제의 후원으로 그 곳에 교회를 세웠다. 현재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 세워진 바르나바 기념 성당과 바르나바 무덤 경당은 각각 18세기와 1950년대에 새로 지은 곳이다.

테르툴리아누스를 비롯한 초기 교부들 중 몇 사람은 히브리서의 저자로 바르나바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초기 신약 외경 중 하나인 "바르나바 서간"은 초대 교회에서 널리 읽힌 서간이다. 정경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오리게네스는 이 문서를 바르나바 본인의 저작으로 여겼다.

한편 "바르나바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위경 복음서는 서기 14세기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이슬람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백한 위조 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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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기근은 클라우디우스 1세 치세 초기에 있었다.[2] 말 많은 바울로가 헤르메스로 여겨지고 바르나바는 제우스로 여겨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