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툴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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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테르툴리아누스.jpg
1. 개요
2. 생애
3. 이단에 빠지다
4. 업적
5. 오해



1. 개요[편집]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1]


너희 교회의 기원을 보이라. 너희 감독의 계보를 거슬러가라.[2]

너희 교회의 처음 감독이라는 자가 과연 12제자 혹은 사도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는지 보자.[3]

- 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 (이단 판별에 관하여) \[32,1]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 혹은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약 2세기 무렵에 활동한 그리스도교교부(敎父)이자 호교론자이다. 본명은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이다.[4] 그는 교파를 막론하고, 초대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고 많은 신학 개념과 용어를 만들어낸 업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신학자이다.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삼위일체론을 들 수 있다.

2. 생애[편집]


원래는 카르타고의 비(非) 그리스도교 가정에 태어나 자랐고,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혹은 법학자)가 되었다.[5] 그러던 중 신앙을 지키고자 순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감명받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뒤에도 테르툴리아누스는 끊임없이 신학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각종 이단들의 등장으로 그리스도교가 흔들린다고 판단, 기존의 정통이라고 간주된 교리를 정리, 체계화하여 이단들에 반박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영지주의단일신론, 특히 마르키온마르키온파를 공개적으로 논박하고 단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6] 이 시기에 <그리스도의 육신론> 등 여러 서적을 저술했는데,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 과정에서 라틴어 신학용어를 정립하는 기초를 놓았다. 법학 공부를 하여 법조인이 된 이력 덕분인지, 테르툴리아누스는 저술에서 논리를 정연하게 전개하고 라틴어 문장을 고급스럽고 명료하게 사용했다는 평을 받는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로마 철학이 서서히 유입되었다. 이는 신학의 정교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반대로 스토아 학파 등의 윤리규범이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보다 오히려 더 영향력이 강해지는 등 부작용도 일으켰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카르타고 등 아프리카 학파의 활동지가 신앙의 발원지였던 이스라엘과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책이나 문서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이 당연히 없었고,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전달해야만 했다. 당연히 사람 손을 거쳤으니 필사를 거듭할수록 정확도를 보장할 수 없는 데다, 책의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필사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기도 더욱 쉽고, 필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러니 로마 제국의 대도시이자 이스라엘과 비교적 가까운 알렉산드리아에 비하면, 아프리카는 복음을 비롯한 성경과 당시 교부, 신학자들의 문헌을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마련인 철학에 비해 신학의 영향력이 밀릴 수밖에 없으니, 이에 대응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실천함을 극히 중요시하게 되었다.[7]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앙을 변질시키고 신학을 말싸움으로 격하시키는 철학과 철학자를 격렬하게 키배 비판하며 철학이 신앙의 위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맨 상단의 인용문이 바로 대표적인 발언들이다.

3. 이단에 빠지다[편집]


테르툴리누스는 정통교리를 수호하는 데 힘쓰고 많은 개념들을 정리했으나, 신학자이자 종교인으로서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너무 엄격하고 완고했다는 것. 심지어 신학자 장 피에르는 자기 주해서에서 테르툴리아누스를 "진리에 미친 자"라고 부르기도 했다.[8] 테르툴리아누스는 도덕적으로 완덕을 이루고자 실천을 중요시했고 때로는 순교를 강요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교회가 배교자와 자격 없는 자들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 아니므로[9] 배교자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또한 조각가, 금은 세공사, 미술가, 석공과 목수[10] 등은 우상숭배를 불러오고 이단사상과 헛된 교만을 부추기는 자들이므로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 북아프리카에 퍼진 이단사상 중 몬타누스주의(Montanism)에 빠져서 이단이 되어(...) 한때 자신이 옹호했던 기존 교회를 공격했다. 몬타누스주의 공동체 안에서도 영항력이 컸던 듯, 그 안에서도 다시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을 따르는 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상태로 220년에 숨을 거두었다.

4. 업적[편집]


테르툴리아누스는 정통교리가 확립되지 않은 시대에 활동했음에도 종파를 막론한 그리스도교의 핵심 정통교리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비록 비판점은 있을지라도 큰 업적을 세운 신학자이다. 특히 영지주의를 단호히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예수의 위격을 설명하는 (기독교신학에서 지금까지 쓰이는) 명확한 기준을 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신학을 이루는 많은 개념들과 용어들을 정립하여 신학발전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이 지나친 완고함과 엄격함 탓에 결국 몬타누스파 이단에 빠졌음은 역사의 얄궂음이라 하겠다.

주요 저서로는 <그리스도의 육신론>, <우상숭배론>, <호교서>, <이단자 규정> 등이 있다.

5. 오해[편집]


"불합리하기에 나는 믿는다." 하는 어록이 있어서 이를 가지고 리처드 도킨스가 그리스도교인의 무지함과 반지성주의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사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저서 <도킨스의 망상>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는 '합리적이면 안 믿고 불합리하면 믿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애초에 도킨스는 종교나 역사 철학 신학면에서 흔한 일반인 수준 이상의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전 18~19세기 반그리스도교 성향 선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문헌 교차검증 없이 당당하게 책에 실은 무식에서 생긴 참사.

해당 말 자체는 중세의 신학자들이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을 불성실하게 인용한 데에서 시작했다. 정확한 출처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그리스도의 육신론De Carne Christi>인데, 해당 책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파를 공격하였다. 마르키온파는 천상에 있는 완전한 존재인 신이 지상에 있는 인간의 더럽고 비천하며 불완전한 육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황당한 괴설이고, 예수는 비록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그저 사람으로 보였을지언정 실제로는 진정한 인간으로 태어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파의 주장을 직접 겨냥하여 아래와 같은 요지로 글을 썼다.

너희(마르키온파)들은 그리스도가 신이므로, 비천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났다 함은 불합리하고 창피한 괴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너희들 말대로라면,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병을 치유하고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부활함 역시 거짓이 되므로[11]

신앙의 근본을 파괴하고야 만다. 너희는 신이 사람이 됨을 부끄럽다고 여기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믿을 만한 것이다.

문맥으로 볼 때 "너희들이 불합리하다 여기는 것(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남)을 나는 오히려 믿을 만하다고 본다"에 가깝다.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의 발언에서 논제는 신앙 vs 이성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 vs 신앙의 문맥이다. 마르키온파가 합리적이라 주장하는 신앙(그리스도는 사람이 된 적이 없다)보다는 그들이 불합리하다고 평하는 신앙(그리스도는 사람으로 태어났다)이 더 매력적이고 말이 된다는 뜻이다.

또한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터무니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상식적으로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을 사도들이 그런 불합리한 얘기를 믿고 전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이유가 뭐겠냐?' 라고 반박했다. 즉 예수의 부활 같은 핵심 전승을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해 보이지만 실제로 일어났을 것이므로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따라서 테르툴리아누스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앞뒤 문맥을 다 자르고 부정확하게 인용하면서 대중들에게 완전히 다른 뜻으로 전해진 것이다.
[1] 그리스 사상을 '아테네'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예루살렘'으로 비유해서 두 사상이 무관하다는 것을 주장한 발언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으로 그리스도교 사상을 해석하는 것을 반대한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교부시대에 그와 반대된 입장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플라톤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신학체계를 세웠다.[2] 혹은 주교(ἐπίσκοπος). 감독교회 또는 성공회를 뜻하는 episcopal church의 어원이 되는 표현이기도 하다.[3] 한마디로 기독교 집단의 정통성의 잣대로 사도전승의 유지, 혹은 사도전승에 대한 인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신학에 따르면 성공회 이외의 개신교는 이단으로 판별된다.[4] 영어 표기는 터털리언(Tertullian, /tərˈtʌliən/)이다. 다만 한국의 개신교계에서는 '터툴리안/테르툴리안'이라는 표기가 주로 쓰인다.[5] 로마법 대전의 '학설휘찬' 중에도 테르툴리아누스라는 법률가의 저작이 있는데, 그가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와 동일인인지 논란이 있다.[6] 하지만 시기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와 마르키온은 다른 시대를 살았기에 둘이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7] 이러한 분위기는 나중에 안티오키아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8] Jean-Pierre Mahe, <Tertullien, La chair du Christ; Sources Chretiennes 216>[9]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먼저 천국에 갈 것이라는 말도 했고(마태복음 21:31), 실제로 이런 비천한 이들과 함께 어울렸을 것이다.[10] 예수와 그의 양아버지 나자렛의 요셉이 목수였음(마태복음 13:55, 마가복음 6:3)에도 불구하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목수가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미술가나 석공, 목수들은 이교도의 우상을 제작한다는 이유에서였다.[11] 예수가 천상의 신이기에 땅 위에서 발을 디디고 사는 인간으로 태어난 적이 없다면, 예수가 전한 언행이나 기적, 십자가 수난이나 부활 등등도 천상의 신이 지상의 인간들을 속여넘기느라 보여준 연극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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