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작전/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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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전 과정
2.1. 작전 준비
2.2. 병력 전개
2.3. 1단계
2.4. 2단계
2.5. 3단계
3. 후속 과정
3.1. 인천국제공항 도착과 격리
3.2. 생활시설 입소
3.3. 추가 인원
3.4. 특별기여자들의 국내 적응


1. 개요[편집]


본 문서는 2021년 8월 실시된 미라클 작전의 전개 과정에 대해 다룬다.


2. 작전 과정[편집]




한국 협력 아프간인 구출 작전 영상



KBS 1 다큐 인사이트에 나오는 미라클 작전



국방홍보원 국방 방송에 나오는 미라클 작전

대한민국 정부는 본격적인 작전 개시 2주 전인 카불이 함락되기 직전 시점부터 치밀하게 계획에 착수, 작전을 준비했다. 다른 서방국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프간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최종문 외교부 2차관은 작전이 시작된 이후인 8월 25일 “정부는 우리와 함께 일한 동료들이 처한 심각한 상황에 대한 도의적 책임,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책임, 비슷한 입장에 처한 아프간인을 다른 나라들도 대거 국내 이송한다는 점 등을 감안해 8월 이들의 국내 수용 방침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카불 함락 하루 전에 작전을 수행할 수송기 3대가 이슬라마바드에 이미 도착해있었으며, 중간에 수송기가 영공을 통과하는 대만,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 파키스탄의 영공 통과 협조와 파키스탄의 공항 사용 협조, 태국의 급유지원 협조를 이미 받아놓은 상태였다.

이에 대해 대외비로서 기자와 언론에 엠바고를 철저하게 걸어놓은 상태에서 작전을 진행하였다. 실제로 미라클 작전을 총괄 지휘했던 국방부 국제정책차장 이경구 준장은 가족들에게는 그냥 잠깐 외국 출장을 간다고 하는 등 작전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작전 이후 엠바고가 풀린 뒤 이뤄진 YTN 인터뷰 영상을 통해서 가족들이 자신이 카불에 갔던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였다.#

만약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지 않고 한국 입국 대상 아프간인이 카불 공항에 완전히 다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언론에서 떠드는 것처럼 뒤늦게 부랴부랴 이송작전을 수행하였다면 언론 보도를 통해 탈레반 측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고, 그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이렇게 신속하고 안정적인 구출작전 완수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며 오히려 탈레반 측이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이들의 출국을 방해하거나 이들을 위협할 가능성이나 구출병력과의 교전으로 커질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에서 진행한 미라클 작전과 비교하자면 하루 차이 밖에 안나지만 이송 작전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벌이고, 이루마 기지 내에서 사열행사까지 진행하여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영향으로 인해 탈레반 측이 자위대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하게 되었다. 여기에 현지 사정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고 피난 대상자들의 자력이동 지시 및 안내방송 전개라는 오판까지 겹쳐 탈레반 측이 아프가니스탄자위대 철수 및 일본인들의 대피 중단 요구를 내세우면서 결국 해당 작전에서 겨우 단 한 명의 일본인만 피난시키는 등 실패로 돌아오는 최악의 상황을 겪게 되었다. 이 점으로 보아 미라클 작전의 반례가 된 일본의 사례와 비교하면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라클 작전은 총 3단계로 계획 및 진행되어 1단계는 중간기착지를 확보하여 군 수송기를 기항시키는 것[1], 2단계는 군 수송기를 적시에 카불 공항으로 투입하여 대상자를 중간기항지로 이송하는 것, 3단계는 조력자들을 대한민국으로 이송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하 내용은 2021년 8월 26일국방부 보도자료를 참조하였다. #

2.1. 작전 준비[편집]


  • 작전 자체가 기획 및 준비된 것은 2021년 8월 초였다. 이미 정부는 21년 6월에 현지 교민을 모두 철수시켰고#, 8월 들어 아프간 상황이 악화하기 시작하자 아프간 현지에서 한국군 및 KOICA 등의 기관들에서 협조를 해 왔던 현지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입안하고 있었다. 원래 정부 계획은 8월 말 외국의 민간 전세기를 이용해 이들을 국내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예상보다 빠르게 악화하고 8월 15일 전격적으로 카불이 함락되며 모든 민항기의 운항이 중단되자, 군 수송기를 직접 투입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다. 우선 외교부는 16일 대사관 인력과 남아있었던 교민 1명을 설득하여[2] 철수시켰다.

  • 아프간 조력자들을 현지 카불 공항에 집결시키기 위해서는 카타르로 철수했던 주아프간 대사관 직원들이 선발대로서 카불에 조기에 투입되는 것이 중요했다. 8월 22일 미군은 군용기를 통해 대사관 직원 3명과 주UAE 무관 1명을 카불로 긴급 이송시켰다. 사실상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는 카불 공항에서 이들이 비행기를 타기까지 신원 조회, 탑승 등 모든 절차는 이 네 사람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 이 과정에서 외교부는 아프간인들이 근무했던 주 아프간 대사관과 KOICA, 바그람 한국병원 등의 근무지별로 대표를 뽑아 연락망을 가동하여, 이메일 등을 통해 이전에 근무했던 협력자들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집결 장소와 시간을 전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6년 전에 근무했던, 카불에서 240km나 떨어진 바미얀에서 거주하던 협력자들에게까지 연락을 취했으며 끊임없이 이메일 등을 통해 신원보장 서류를 전달하고 상황을 파악하며, 집결장소로의 이동을 도왔다. ##

  • 외교부최종문 제2차관을 중심으로 한 범정부 TF가 가동되었으며, 외교부와 국방부가 작전을 총괄하고 법무부 및 질병청 등의 보건당국이 후속 조치를 취하기로 조율되었다. 작전을 실질적으로 현지에서 지휘한 인물은 국방부 국제정책차장 이경구 준장(육사 46기)[3]이며, 그는 직접 아프간 카불 공항까지 동행하면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

그는 이 작전에 임하면서 군번줄을 제일 먼저 챙겼다[4]라고 할 정도로 현지 상황은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상을 통해 가족들이 자신이 카불에 간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였음을 시사했다.

국방부는 단지 수송만을 책임진 것이 아니었다. 평소 국방무관 등을 활용한 군사외교를 통해 다져놓은 인맥과 우호관계를 최대한 활용했다. 작전 도중 미군들은 한국군 장성에 대해 예의를 갖췄다. 또 현지 조력자들을 태운 버스가 탈레반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자기 일도 많은 판에 미군 대대장이 직접 탈레반 측에 가서 한국 조력자들을 보내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공항 출입을 통제하는 다국적협력센터(MNCC)에서도 한국 조력자들이 들어오는 시각을 알려주면 그대로 승인을 해줬다. 국방부의 역할이 매우 지대했다. #

  • 당초 계획했던 중간 기착지는 카타르였다. 그러나 이미 미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도 카타르를 중간 기착지로 쓰고 있어 포화 상태가 되면서 카타르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국방부가 대체 지점을 찾기 위해 군사 채널을 총동원했고 그 결과 파키스탄 측의 협력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파키스탄으로 중간 기착지가 변경되었다.

2.2. 병력 전개[편집]


  • 2021년 8월 23일 오전, 대한민국 공군 C-130J 2대와 KC-330 시그너스[5] 1대가 아프간에 인접한 파키스탄으로 파견됐다. # 당초 민항기를 투입하려 했으나 현지 사정이 급변하며 군용기 투입을 결정했다. 이때는 엠바고 때문에 작전에 돌입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지 않았다.

  • 8월 24일 정부 발표를 통해 그동안 아프간 주재 한국군 부대, 한국대사관, 한국병원, 직업훈련원을 비롯한 KOICA 관련 시설에서 종사한 아프간인 조력자들을 국내로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 이미 작전 중이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


  •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한 것과 카불 공항이 혼란한 현지 상황을 고려하여,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한국 공군 최정예 특수부대인 공군 공정통제사 요원을 동승시켰다. # # 공정통제사 부대는 CCT, 즉 이동식 항공관제 및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 이런 야전 항공 관련 업무에 적합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6] 의료진들도 함께 임무에 투입되었고, 카타르로 대피한 대사관 직원 3명도 UAE 주재 무관과 함께 아프간에 재입국했다.

2.3. 1단계[편집]


  • C-130J 전술수송기 2대와 KC-330 MRTT 공중급유기 1대가 김해국제공항을 출발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아프간 인근 국가의 공항은 이미 다른 국가들의 수송 작전으로 포화된 상태에서, 국방부와 외교부가 협조하여 파키스탄 공군 총장과의 전화 통화, 주파키스탄 무관부의 채널을 총 동원하여 파키스탄 정부의 공항 사용 승인을 확보했다. #

  • 파키스탄 정부는 공항 사용과 관련한 제반 편의를 제공하고, 현지 주파키스탄 대사관은 차량과 대사관 건물을 특수임무단 숙소로 제공하였고, 현지 교민들도 코로나 19로 운영 중단됐던 숙박시설을 다시 재개방 해주고 작전 종료 후 엠바고가 풀릴 때까지 이 모든 일을 함구하는데 협조하는 등 성공적인 작전 수행의 숨은 공로가 있다. #

  •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까지 논스톱운항이 가능한 KC-330과 달리 C-130J는 항속거리 문제로 인해 이것이 불가능했다. 외교부와 국방부는 태국의 협조를 얻어 C-130J의 테크니컬 랜딩 중간기착지로 사용했다.

2.4. 2단계[편집]


  • 군 수송기를 적시에 카불 공항에 투입하여, 우선 카불 공항에 도보로 진입 성공한 26명을 이송하는 것이 첫 번째 작전이었다. 관건은 조력자들이 카불 공항에 안전하게 집결하는 것, 카불 공항 이착륙에 필요한 사전비행승인(PPR)을 미군으로부터 적시에 확보하는 것이다. 다행히 미군은 시시각각 변하는 카불 공항 상황에 따라 우리측의 승인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 1차로 카불 공항에 진입한 26명의 조력자를 수송하기 위해 8월 24일 C-130J 군 수송기 1대와 특수임무단이 급파되어 당일 오전 이들의 구출에 성공했다. 이들이 이용한 게이트는 다름아닌 사흘 뒤 폭탄 테러가 발생한 애비게이트였다. 당시 수 천명의 피란민이 몰려있던 이곳에서 탈레반은 채찍까지 이용해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정부 관계자들은 ‘KOREA’라 적힌 종이 한 장으로 이들을 찾아내야 했다.
    • 카불 상공에 도달한 C-130J 수송기들은 레이더 경고가 울릴 때마다 급강하, 급상승 등 전술기동을 하며 지대공 미사일 공격에 대비한 회피 기동도 했다. #[7]
    • 아프가니스탄 영공은 관제사들이 모두 이탈해 관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송기들은 마찬가지로 어떤 관제도 없이 육안과 기량만으로 카불 공항에 착륙했다.

  • 하지만 당초 400명이 넘는 인원을 이송할 예정이었던 만큼 두 번째 작전이 시작되었다. 현지 사정이 계속 급변하고, 탈레반 정부는 타국의 조력자 구출 시도를 '아프간 재건에 필요한 인재를 빼간다'며 반발하며[8] 이송 작전이 진행 중이던 24일 밤에 내국인의 탈출 금지를 발표했다.

미국카불 공항에 중대한 테러 위협이 있다며 공항에서 대피하라고 권고하고, 수만 명이 몰려 압사 사고가 일어나는 등 카불 공항으로 가는 길 자체가 '절망의 길'이라 불릴 정도이다. 현지 특임단도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최대한 많은 조력자를 찾아 카불 공항으로 이동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

  • 카불 국제공항으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 탈레반 검문소가 있어, 진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버스는 탈레반이 막아 탈출자들은 그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밖도 보이지 않게 칠해져 창고같이 밀폐된 공간에 14~15시간을 갇혀 있었고, 한 사람은 버스에 들어온 탈레반에 의해 구타당하기도 했다. 탈레반은 이들의 여행증명서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라고 시비를 걸었고 김일응 참사관이 공항 밖으로 나가겠다 하니 그제서야 통과시켜줬다고 한다. 다행히 미군이 공항이 아닌 다른 집결지[9]에 인원을 모은 후 단체 버스로 공항에 진입하는 방안을 고안해냈고, 버스 대절을 통해 아프간인들을 무사히 공항에 이를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역시 카불 공항까지 가는 길에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고 한다. # ## 전폭적인 협조를 해준 미군은 아프간 조력자들의 카불 공항 진입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군은 탈레반과 직접 협상해 조력자들이 버스를 이용해 공항 안으로 진입하도록 해줬다. 아울러 미군은 수만명이 운집한 카불 공항 내 대혼란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조력자들 틈에 끼여 한국군 수송기 탑승을 시도하던 신원미상자들을 막았다.

  • 한편 가족 단위로 대피가 이루어져 어린이가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원이 390명인데 5살 이하만 100명에 생후 1개월 미만의 신생아가 3명. 심지어 10세 이하로 범위를 넓히면 절반인 190여명이라고. 그렇기에 젖병 등의 유아용품들[10]이 미리 준비됐고, 수송기 바닥에는 매트리스를 깔아두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

2.5. 3단계[편집]


  • 8월 26일, 한국에 협력한 아프간인 377명[11]파키스탄에 무사히 도착했다. 파키스탄에서 대기 중이던 2차 구출 대상자 13명은 27일 오전 인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정부는 난민이 아니라 한국정부와 협력한 특별공로자 신분이라고 했으며 필요할 경우 영주권도 발급해줄 예정이다. #[12]

  • 본래 정부는 한국 입국 예정 아프간인들이 총 427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였으나 실제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인원은 390명(중간 기착지인 파키스탄까지 이송된 건 대상자 외 1명을 포함한 391명이며 대상자 외인 1명은 미군에 인계하여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려 보내졌다.)이다. 나머지 인원들은 아프간에 남기로 결심하거나, 제3국행을 택했다. #

  • 중간 기착지에 남았던 아프가니스탄 조력자 13명도 8월 27일 한국에 도착했다. #

  • 수송기가 이륙 중량을 겨우겨우 맞춰서 이륙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KC-330의 이륙 가능 중량은 23만3천kg인데 23만 2830kg으로 이륙하여 불과 170kg 차이로 이륙에 성공했다. 대다수가 가족단위로 아이와 동반하여 탑승해야 했고, 삶의 터전을 떠나는 것이다 보니 짐을 한 보따리씩 챙겨왔기 때문이다. 이륙 중량을 맞추기 위해, 특임단의 개인 짐을 최소화하고, 현지에서 짐을 급하게 버리고, 좌석도 양보하고, 아이들은 하나하나 전부 몸무게를 달아서 겨우 맞췄다고 한다. #[13]

3. 후속 과정[편집]


  • 수용 장소는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6주 동안 수용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이에 대해 진천군, 음성군 주민들은 우한 교민 이송 작전에 이어 연속으로 진천 개발원이 지정된 것과, 갑작스러운 아프간인의 입소에 대해 다소 우려와 불만이 있었으나,[14] 인도주의 및 고급 전문인력과의 협력을 통한 대승적 차원에서 아프간인 수용에 동의하였고, 일부 주민은 환영 현수막 게시 및 성금, 성품 등을 준비해서 지역 차원의 환영 행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

  • 아프간 입국자들의 체류자격에 관련해서, 난민 자격이 아닌 특별기여자 자격으로 일단 단기체재(C-3)사증을 발급받은 다음 장기체류자격인 거주(F-2)로 변경한다는 방침이다. #,#[15]

3.1. 인천국제공항 도착과 격리[편집]


  • 한국 협력 아프간인 377명[16]을 태운 공군 KC-330 다목적 공중급유 수송기가 8월 26일 오후 4시 25분경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작전종료 후 아프간인들의 신분보장 및 정착지원을 담당할 주무부처의 수장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직접 맞으러 나갔다.[17]
파일:인천공항 아프간.jpg
  •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현지 협력자의 어린 자녀들이 한국 법무부가 제공한 다양한 동물 인형들을 저마다 하나씩 든 모습이 포착되어 소소한 화제를 끌었다. 어린이들이 고국을 떠나 피난길에 나서고 또 비행기 수하물 중량을 줄이기 위해 장난감은 거의 챙겨오지 못했을 테니 좋은 선물이 된 셈이다. # [18] 단순한 선물의 성격뿐만 아니라 이런 극한 상황에서 인형과 같은 장난감은 어린이들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한편, 이후 인형을 준비한 담당 법무부 공무원의 인터뷰에 따르면, 개를 천시하는 이슬람교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일부러 개 인형은 준비하지 않고, 곰이나 토끼 인형으로 선별해서 제공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인형을 너무 비싼 걸 줬다는 글이 올라와 세간의 빈축을 샀으며, 실제 인형의 가격도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었다.

  • 입국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1차 코로나 검사를 받았으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김포시의 마리나베이 호텔에서 임시로 머문다.[19] 코로나 검사 결과가 음성일 경우, 진천군에 있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 입소하며, 양성일 경우, 증상 정도에 따라 생활치료센터 또는 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이다. #

  • 임시 숙소에 입소한 아프간인들에게 할랄 도시락이 제공된 것으로 알려졌다. #

3.2. 생활시설 입소[편집]


  • 진천 공무원인재개발원에 입소 후에는 코로나19의 잠복감염 대비 2주간의 코호트 격리가 먼저 이뤄진다. 격리가 해제되면 하나원에서 이뤄지는 북한이탈주민 대상 프로그램과 비슷한 국정원의 2차 신원조회, 한국 사회 및 문화에 대한 적응 교육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

  • 법무부가 발표한 아프간 협력자들의 입소 후 생활지원 대책은 다음과 같다. # 법무부 보도자료
    • 12세 이하 아동이나 장애인을 동반한 가족의 경우 3~4인실의 객실을 배정하기로 했다.
    • 입소자들의 종교적 특성을 고려한 식단이 도시락으로 제공되며, 이 밖에 음료수와 물 또한 제공된다.
    • 법무부 교정본부 소속 의료진과 군 소속 군의관간호장교가 상주하여 입소자들의 건강관리와 의료 서비스를 전담한다.
    • 통역인 1인과 전화통역 담당인 9명이 배치되어 있으며, 입소자 중 한국어 구사자를 추가 통역인으로 선발할 예정이다.
    • 생활시설에서 특별기여 아프간인에 대하여 한국어, 한국 문화 교육 등을 실시하여 국내 자립을 도울 계획이다.
    • 입소자 중 미성년자가 231명으로 61%이며 만 6세 이하도 110명에 이르는 점을 고려해 부모 등을 통해 임시보육시설을 운영할 계획이다.

  • 김포시 소재 임시 숙소에 머물던 아프간 협력자들은 8월 27일 오전 8시 31분경 대한민국 국군에서 지원 나온 버스를 타고 호텔을 떠나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향하였다. # 대부분 PCR 검사 음성 판정을 받았으며, 17명은 미결정이 나와 일단 진천으로 이동 후 재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
    • 협력자들을 거부감 없이 환영해준 진천과 주민들에 대해 호평하는 반응이 많으며, 네티즌들은 감사하는 의미로 진천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보답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평소보다 주문량이 10배나 늘어 품절사태까지 벌어졌다. #
  • 한국으로 입국한 아프간인 협력자 중 4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천안 청소년수련관 생활치료센터로 이송되었다. #
  • 2021년 10월 27일 아프간 협력자들은 전남 여수시 오천동 해양경찰교육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

3.3. 추가 인원[편집]




3.4. 특별기여자들의 국내 적응[편집]



미라클 작전 이후 수 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한국 사회에 동화된 특별기여자들의 소식이 하나 둘 알려지고 있다. 울산광역시현대중공업 협력업체에서는 약 30명 가량의 특별기여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그중 아버지와 일하고 있는 무스타퍼(19)의 소식이 뉴스를 타 눈길을 끌기도 했다. 현재 선박용 대형 엔진 조립 회사에 근무중이며 이후 울산과학대학교[20]로 진학해 대학생이 되는 꿈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 C-130은 항속거리가 3,800km로 상당히 짧아 카불 - 인천/김해 무착륙 편도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카불이슬라마바드 간 운송을 주로 담당하였다.[2] 미라클 작전이 끝난 후 관련 기사에 의하면 자기 때문에 여러 명의 대사관 직원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미안한 마음에, 정부 협력 아프간인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쉼터 겸 집결지를 제공했다고 한다.[3] 청해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당시 청해부대원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오아시스 작전을 지휘한 바 있다.[4] 군필자들은 알겠지만, 이 말은 평소엔 군번줄을 걸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원래 군인이면 군번줄은 24시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물건이다) 맨 먼저 군번줄부터 챙겨,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신원만은 파악할 수 있게끔 대비한다는 의미이다.[5] 레지넘버 ROKAF 19-002, 한국 공군이 도입한 4대의 에어버스 A330 MRTT 중 2번째 기체이다.[6] 야전이라고 붙인 이유는 사실상 카불 공항이 전쟁터나 다름없는 아수라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는 카불 공항이 관제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어도 CCT는 주로 경호 임무 및 조력자 보안 검색 임무를 담당했다.[7] 타국 수송기들은 이륙하며 플레어를 살포하기도 했다.[8] 대상자들 상당수가 서방국의 아프간 재건 계획 참가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재를 빼간다는 주장은 핑계고 처형이나 강간 등의 다른 목적이 있는 걸 감추려고 생떼부리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9] 문서 하단에 언급되는 8월 17일 한국인 탈출 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았던 교민 1인의 사업장인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사업장은 한국을 도운 아프간인 협력자들이 탈레반들에게 핍박받을 것을 우려해 대피하여 쉴 수 있도록 사업주 교민이 대사관측에 요청하여 만들어 두고 떠난 임시 쉼터이며, 일부러 탈레반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엠바고 등을 걸어 기밀사항으로 해뒀다. 덕분에 협력 아프간인들이 이곳을 구심점으로 빠르게 집결하여 작전 수행 버스로 갈아탈 수 있었다.[10] 필수적인 용품 외에도 어린이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한 곰 인형까지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은 인천 공항에 입국할 때까지 이 인형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법무부에서 지급된 인형을 손에 쥐고 입국한 걸로 보아 하기할 때 공군에 반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낯선 외국에서 마스크를 쓰고 움직이다가 아이들이 뒤섞이거나 미아가 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디자인의 아동복을 준비하여 형제끼리는 같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11] 본래 378명으로 집계되었으나, 377명으로 정정되었다.[12] 이들은 미군의 신원조회도 통과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13] 특임단의 개인 짐의 나머지는 후발대로 오는 C130 편으로 싣고 왔을 가능성이 있다.[14] 실제 코로나 사태 발발 이후 설치된 격리시설에선 수용자가 몰래 시설을 탈출하여 도주하다 검거되는 일이 잊을 만 하면 발생하고 있다. 때문에 해당 시설이 위치한 지역의 주민들이 불안을 호소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15] 만약 난민으로서 거주(F-2)자격을 받으려 한다면 1% 미만의 허가율에 도전해야 할 정도로 한국의 난민심사는 엄격하다. 이 자격은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업종을 제외하고는 취업제한이 없으며, 조건만 되면 제한없이 기간연장도 가능하다. 취업의 자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례인데 무기한 연장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 영주도 가능하다.[16] 본래 378명으로 알려졌으나, 1명은 명단에 없는 아프간인으로 확인돼 파키스탄에서 환송하면서, 인원 집계가 정정되었다. #[17] 국외에서의 작전 수행이 국방부와 외교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면, 아프간인들의 입국 이후에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이들을 관리하게 된다.[18] 거의 200kg 밖에 안되는 여유를 두고 이륙했을 정도니 장난감은 커녕 살림살이도 챙겨오지 못했다.[19] 해당 호텔은 코로나19 유행 이후 해외 입국자의 자가격리 시설로 쓰이고 있다.[20] 울산대학교와 함께 현대그룹과 관련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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