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아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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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有礼(もりありのり)

Mori, Arinori

히토츠바시 대학의 모체가 된 상법강습소의 창립자 - 모리아리노리 고등교육 국제유동화기관

1. 개요[편집]


일본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영국, 중국을 넘나들며 근대 일본의 기반을 마련한 외교관, 정치가, 교육자, 법조인.


모리 아리노리 (1847~1889)

일본 가고시마 출생. 외교관, 정치가. 1865년 영국에 유학. 미국을 거쳐 메이지 원년(1868년) 귀국 후, 신정부에서 권판사, 공의소 의장 심의, 제도료 부총재 심의 등을 역임. 미국 근무 후의 1873년에는 명륙사를 설립하는 등, 유럽미국의 사상에 대한 일본의 계몽에 힘씀. 1875년에는 히토츠바시 대학 (상법강습소) 설립. 이후 주청 공사, 외무 대보, 주영 공사, 참사원 의관 겸 문부성 어용부 등을 역임. 제1차 이토, 쿠로다 각 내각의 문부상.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당일, 국수주의자에게 습격을 받아 다음 날 사망 #

1847년 일본 가고시마현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모리 아리노리는 영국 유학과 미국 생활을 거쳐 1868년 귀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1875년 일본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인 상법강습소를 설립한 일본 최고의 상과대학인 도쿄상과대학 (히토츠바시대학)의 설립자이자, 일본 정부 초대 문부대신이다. 1885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강력한 지지로 일본 최초의 문부대신이 되었다. 두 사람은 당시 발흥하던 자유민권운동이 국가의 안위를 해칠 수 있다고 여겨 근대 일본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초월해 국가를 우선하는 교육과 학문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모리는 일본의 근대 교육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할 구체적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충군애국정신을 배양하기 위해 집체훈련과 체조, 행군여행 등 군대식 교육을 학교에 도입했으며, 각급 학교에 천황 사진을 걸어놓고 배례의식을 거행하도록 했다.[1]

국가주의 교육을 도입하고 실천한 모리였지만, 그는 뜻밖에도 미국 공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출간한 <일본의 교육>(1873)에서 하기와 같이 말했다.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차라리 영어를 국어로 채용해야 한다.”

일본 근대기에 서구의 사상과 발상, 용어를 도입하고 번역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 가운데 니시 아마네, 후쿠자와 유키치, 모리 아리노리 세 사람이 결정적이었다. ‘문명개화’를 기치로 내걸고 메이료쿠샤(明六社)를 결성해 학술의 개념어를 비롯해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철학, 예술, 이성, 과학, 기술, 논리학, 심리학, 의식, 지식, 개념, 귀납법, 연역법, 정의, 명제, 분해 등 많은 개념어를 고안해 번역하고 한자문화권에 전파시켰다.

상술했듯이 일본은 메이지 시대 계몽기를 거치며 무려 1만4846개의 단어, 특히 추상적 개념어를 사전에 추가하면서 서양이 만들어 놓은 근대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일본에는 원래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개인’이라는 단어가 생기면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주의도 마찬가지고, 민주주의, 공산주의, 인민, 공화국 등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중국의 국명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중에서 중화와 일본 말고는 다 일본식 한자어다. 역시 원래 없었던 ‘사회’라는 개념도 ‘사회’라는 단어를 통해 이해되고 형성되었다. 일본은 서구를 따라가기 위해 필요했던 현실을 번역된 단어로 역으로 창조해냈고, 그 중심에는 모리 아리노리가 있었다.

이러한 번역을 통해 만들어진 일본의 근대는 그들의 물질적이고 군사적인 성취를 바탕으로 일본 제국은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1876년 개항 이래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 동안, 그 이후로도 대한민국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일본 서구 학술어 자국화 신문명

2. 한국 관련 주요 행적[편집]



2.1. 모리 일본공사, “조선중국속국이 아닌 독립국” 주장[편집]


메이지 천황은 구로다를 조선 사절에 임명했는데, 그보다 한 달 전쯤인 11월 10일에 외무성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를 청나라에 파견할 특명전권 공사에 임명한 바 있다. 일본 공사 모리 아리노리와 중국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톈진 (天津; 천진)에서 만났다. 목적은 조선왕조가 청나라의 속국인가 아닌가 여부에 대한 담판이었고, 이홍장은 청나라 개혁파에 속하는 주요 인물이었다.[2]

모리 아리노리 : “조선은 인도와 함께 아시아에 있으며, 중국 속국이 아니다.”

이홍장 :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정삭을 받드는데 어찌 속국이 아니냐?

모리 아리노리 : “전세계 각국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단지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것에 불과하며, 중국은 조선으로부터 전량(錢糧)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속국으로 치지 않는다.“

이홍장 : 조선이 중국에 소속된 것이 수천 년임을 어느 사람이 모르나? 청일수호조규의 이른바 ‘소속방토’의 토(土)자는 중국 각성을 지칭하니 이는 내지를 내부 소속이라 여겨 전량을 징수하고 정사를 관여함이요, 방(邦)자는 조선과 여러 나라를 지칭함이니, 이는 외번이고 외속이라 여겨 전량과 정사는 중국 본국에서 관리함이다. 이는 명나라 이전, 예로부터 그러했고 청조(清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어찌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말하나?

모리 아리노리 : (무시) 일본은 조선과 화해하기를 몹시 원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더불어 화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홍장 : 이는 귀국과 화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나라가 작음, 즉 소국(小國)임을 알아 삼가 지키며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이 각국에 대해 모두 그러하다.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리 아리노리 : 일본과 조선은 이웃나라다. 그래서 반드시 화해해서 소통하려 하는데, 조선은 어째서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까?

이홍장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후 아마도 의혹과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 측근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에 일본과 고려는 일찍이 왕래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끊어졌고 몇 년 전 조선과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한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한 후, 국서의 제도가 변하자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고 있다.

이홍장 :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조선은 감히 서양과도 통교하지 않는다. 일본이 서양제도로 바꾸니 조선은 스스로 당연하게 의혹과 공포를 일으켜 일본과 왕래한다면, 다른 나라도 즉시 따라 올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 측근 : 종전에는 사신을 거절하는 데 지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일본 병선이 조선 해변에 이르러 담수를 취하자 조선이 즉시 대포를 발사해 우리 (일본) 군함을 손상시켰다.

이홍장 : 일본의 군사 병선이 조선의 해구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다. 만국공법에 의하면 해안 10리 이내는 본국의 영토에 속한다고 돼 있다. 일본이 조선과 통상하지도 않았으니, 본래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된다. 조선이 대포를 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리 아리노리 : 중국·일본은 서양 나라와 만국공법을 인용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와 화약하지 않았으니 공법을 인용할 수 없다.

이홍장 :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일본이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일본의 잘못이 앞에 있는 것이다. 조선이 갑자기 대포를 쏜 것은 작은 잘못이 없다 할 수 없지만, 일본이 또 상륙해 조선의 포대를 파괴하고 조선 사람들을 살상했으니, 이는 또 일본의 잘못이다. 조선은 가만히 있는데, 일본이 조선을 흔드니 어떻나? 사신을 보냈는데 받지 않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다. 중국 원나라 때 두 차례 사신을 보내 일본에 갔는데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조 때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 사신을 살해했다.

모리 아리노리 : (무응답) 이후에 아마도 전쟁을 면하기 어렵겠다.

이홍장 : 조선, 중국, 일본은 함께 아시아에 있다. 만약 전쟁을 벌인다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고 일본이 이미 협약을 심하게 어겼으니, 중국이 어떻게든 처치할 것이다.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

출처: 「일본사신임유례부사정영녕[3]

래서오담절략’(日本使臣森有禮副使鄭永寧來署晤談節略) 1875년 12월[4]

상기 대화를 살펴보면 이홍장과 모리는 조선의 속국 여부 그리고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논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벌어진 논쟁 자체로만 보면 이홍장의 논리가 타당했고 사리에도 맞았는데 하지만 모리는 불리할 때마다 청일전쟁 뉘앙스로 전쟁을 운운하며 협박조로 나왔고, 그에 대해 이홍장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고, 논리도 딸렸다.[5]

그 뒤에도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두 나라 관리들이 재회를 했다. 일본 관리들은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청나라 관리들은 여전히 변발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고 조선에 대한 완전 독립을 선언, 독립문이 서울에 세워지고, 모리가 사망하고 일본은 그의 지인 이토 히로부미를 주축으로 일제강점기 시기 내선일체를 천명하며 조선을 1945년까지 완전 합병한다. 조선을 속국 취급하던 청나라의 무능, 일본의 야망, 조선의 혼란 3박자로 이루어졌던 총체적 난국 이었다.

3. 주요 사건[편집]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 최초 의회인 공의소의 공의소의장 직무대리(公議所議長心得), 의사체재취조어용(議事體裁取調御用), 제도료 부총재 직무대리(制度寮副總裁心得) 등에 임명되어 일본 국가의 초창기 제도 개혁 사업을 담당했다.

모리는 1870년 9월에 신정부에 다시 임용되고 10월에는 주미국대사 격인 주미변무공사(駐米弁務公使)에 임명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모리 아리노리는 1882년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에 헌법 조사를 위해 방문했을 때 만났고, 그 때 그는 일본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6]

미국에 있을 때,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의 교육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의 정치가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의 교육 정책 수립에 관한 의견을 구했다. 100여명 이상이 답변을 줬고, 이러한 의견 수집을 바탕으로, 그는 1873년에 『일본의 교육』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875년에는 상법강습소 (히토츠바시 대학)을 설립해 도쿄상과대학이라는 일본 국립 명문대의 설립자가 되었다.

1884년, 영국에서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는 참사원의원 및 문부성 업무담당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문부성에 들어갈 당시, 정부가 교육제도에 간섭할 수 있는 ‘개정교육령’이 시행되고 있었다. 본래 1878년에 제정된 ‘교육령’에서는 서구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교육제도가 도입되었으나, 이후 황실과 일부 인사들이 주도해 유교 정신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개정 교육령이 만들어졌다. 모리 아리노리는 이렇게 변경된 교육령과 자신의 국가교육 지향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봤다.

그 다음 해인 1885년, 모리 아리노리는 이토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취임했고, 그는 교육제도의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여 1886년에는 제학교령을 공포했다.

3.1. 연도별 행적[편집]



  • 1858년 모리 아리노리(12-13세), 쓰시마 막부 학교 ‘조시칸’에서 한자학을 배운다.

  • 1864년 모리 아리노리(16-17세), 쓰시마 막부의 양학 학교 ‘개성소’ 입학. 영어 강의를 수강.

  • 1865년 모리 아리노리(17-18세), 영국으로 밀항, 유학(쓰시마 막부 첫 번째 영국 유학생). 런던에서는 쵸슈 고갓(이노우에 무타/이노우에 카오루, 엔도 긴조, 야마오 죵조, 이토 히로부미, 노무라 야치지/이노우에 마사루) 등과 만난다. 모리 아리노리는 영국에서 러시아로 건너가, 또한 로렌스 올리판트의 초대로 미국으로 건너가, 신종 종교가 토마스 레이크 해리스의 교단과 생활을 같이하며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또한, 미국의 교과서를 수집했다.

  • 1868년 모리 아리노리(20-21세), 귀국 후, 징시 외국관 권판사, 학교 조사를 겸직

  • 1870년 모리 아리노리(22-23세), 쓰시마 막부 내에 영어학 학원을 설립

  • 1870년 10월/11월 모리 아리노리(23세), 요코하마에 번역소를 열고, 번역업 및 외국 무역 거래의 중개업에 종사, 성공을 거두고 있던 야노 지로를 추천하여 외무성에 영입

  • 1871년 1월 모리 아리노리(23-24세), 소변무사로서 미국으로 건너감

  • 1872년 모리 아리노리(24-25세), 미국 중변무사, 이후 미국 대리공사로 승진

  • 1872년 모리 아리노리(24-25세), 상술한 영어의 일본어화를 주장(‘국어 외국어화론’). 예일 대학교의 언어학 교수 윌리엄 드와이트 휘트니에게 ‘불규칙 동사를 규칙화하여 간략하게 한 영어를 일본의 국어로 할 것은 아닌가’라는 편지를 보낸다. 휘트니는 간략화된 영어에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낸 위에, 일본어의 폐지에 반대한다.

  • 1873년 모리 아리노리(25-26세), 뉴욕에서 『일본의 교육』을 출판

  • 1873년 7월 모리 아리노리(25-26세), 미국에서 귀국. 부국강병을 위해 인재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하며, ‘국민 각각이 지적으로 향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본 ‘학회’를 일본에서 실현하려고 후쿠자와 유키키, 가토 히로유키, 나카무라 마사나오, 니시 슈, 니시무라 모리키, 츠다 신도, 미사쿠 아키히토, 스기 코지, 미사쿠 린쇼 등에게 호소,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계몽 학술 단체인 ‘명륙사’를 결성한다. 초대 사장이 된다. 회원에는 구 막부 관료인 ‘개성소’의 관계자 및 ‘경영의숙’ 문하생의 관민 조화로 구성되었다. 또한, 학자뿐만 아니라 구 대명, 정도진종 본원사파, 일본은행, 신문사, 쇼카이슈 등 구 시족 등이 참가한다.

  • 1875년 히토츠바시 대학 (도쿄상과대학)의 모태 상법강습소 설립[7]

  • 1877년 모리 아리노리는 29-30세로, 중국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 외무상 대리로 승진

  • 1878년 모리 아리노리는 30-31세에 외무 대부로 승진

  • 1879년 모리 아리노리는 31-32세 때 영국 공사로서 영국에 감

  • 1884년 모리 아리노리는 36-37세로, 영국에서 귀국한 후 삼지원 의원과 문부성 유용부를 겸임

  • 1884년 12월 14일 모리 아리노리는 37세에 "학습원" 강당에서 열린 대일본 교육회의 상시회에서 오오키 요시노리와 함께 연설

  •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이토 히로부미는 44-46세에 제1차 이토 내각에서 헌법 발포 전의 준비 기구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

  • 1885년 12월 22일 모리 아리노리는 38세에 대정관 제도가 폐지되면서 내각 제도가 시작되었고,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초대 문부대신으로 취임. 이후에도 모리 아리노리는 교육행정에서 다양한 개혁을 이뤘고, 이러한 정책은 이후 교육행정에도 이어져 상술했듯이 1886년에는 학위령을 발령하였고, 여러 학교 제도를 개선

  • 1887년에는 모리 아리노리는 재혼을 했다. 그 해 11월에는 신문에서 모리 아리노리가 이세신궁을 방문했을 때 사령을 써서 안을 들여다보고, 제단을 신발 차림으로 올랐다는 보도가 있었고, 이로 인해 논란이 일었다. 이 사건은 후에 암살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 1888년에는 쿠로다 내각이 출범하고 모리 아리노리는 문부대신으로 잔류


3.2. 히토츠바시 대학 설립[편집]


  • 1875년(메이지 8) 8월 모리 아리모토(27-28세)는 상업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지를 얻어 도쿄 긴자 오와리마치에 일본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 '상법강습소'를 개설한다. 영국 대사로 재직 중이었을 때, 허버트 스펜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귀국한 야노 지로도 이에 참가했다.

  • 1875년(메이지 8) 9월 24일 모리 아리모토(28세)는 사립 학교 '상법강습소' 개설을 도쿄 회의소에서 도쿄부 지사에게 통보한다. 이는 '히토츠바시 대학'의 기원이 된다.

  • 1875년(메이지 8) 11월 모리 아리모토(28세)는 특명전공사로서 청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상법강습소'의 경영에 관여할 수 없게 되어 경영을 도쿄 회의소에 이양한다. 그렇게 히토츠바시는 완전히 국립이 된다. 시부사와 에이치, 마스다 타카시, 후지지 겐이치로가 경영 위원이 된다.

3.3. 일본 여성 운동[편집]


아리노리는 여성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성 교육이 국가와 사회의 진보에 큰 의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교육 정책은 경제주의적인 접근과도 연결되었고, 국가나 지방의 재정을 고려하여 교육 투자의 효과를 중시했다. 아리노리는 또한 《명육잡지》에 게재된 ‘처첩론’에서 남녀평등과 부부 대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언론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에도 남녀 동권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사실상 일본 최초의 여성운동가 중 한명이다.[8]


4. 사망[편집]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일에, 아리노리는 한 젊은이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고, 그 다음 날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 젊은이, 니시노 분타로는 아리노리가 불경한 행동을 했다며 습격한 동기를 밝혔다. 정확히는 1889년 2월 11일 - 12일에는 모리 아리노리가 대일본제국헌법 발포식에 참가하기 위해 관저를 떠난 직후에 국수주의자 니시노 부타로에게 짧은 칼로 옆구리를 찔려져 부상하였고, 그 다음날인 2월 12일 오전 5시에 사망하였다. 그는 여전히 "메이지의 여섯 대 교육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모리 아리노리의 일생

5. 평가[편집]


대한민국과 중국 일부에서는 그가 극우라는 주장도 있으나, 객관적으로 모리 아리노리는 일본의 계몽가이자 편향되지 않은 내셔널리스트였다. 그는 세계를 멀리 내다보는 넓은 시야와 정책 구상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존위와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 존중이 문명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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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한국에 그대로 수입되어 잔존해 있는 문화다.[2] 운요호 사건을 조선의 폭거로 규정하고, 이를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한다는 사실을 중국 청나라에 통보 및 고지하라는 것이 모리가 받은 메이지 천황의 훈령이었으며, 메이지 천황은 이 소식에 대해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청나라와도 전쟁을 할지, 아니면 조선만 침공할지를 결정할 계획이었다.[3] 모리 아리노리 측근[4] 따지고보면 일본은 섬나라라서 대륙에 없긴 하다.[5] 이홍장이 겨우 내세울 수 있는 논리는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 정도에 그쳤다. 적극적으로 지키기에는 무섭고, 남 주기는 아까운 조선을 일본이 가져가는 것을 말리지 못했다. 모리와의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이홍장은 ‘도상화기 호무이익(徒傷和氣 毫無利益)’이라는 여덟 글자를 작성해 선물로 전달했다. ‘쓸데없이 화기를 손상할 시 털끝만큼도 이익이 없음’이라는 뜻인데 절대로 조선을 침공하지 말라는 당부였긴 하지만 이런 당부만 가지고는 청나라는 일본의 조선 침공을 막을 수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임을 이홍장은 실감했다.[6] 이로 인해 히로부미는 아리노리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아리노리에게 문부성 업무를 맡기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본방침을 확립했다.[7] 상세는 후술[8] 근데 정작 그는 이혼을 했고 여자관계는 순탄치 않았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