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모토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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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토시오
松本(まつもと俊夫(としお|Toshio Matsumoto

파일:toshio-matsumoto-japanese-film-director (1).jpg

출생
1932년 3월 25일
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
2017년 4월 12일 (향년 85세)
도쿄도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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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영화 감독, 영상 작가, 영화 평론가, 교육인
활동
1955년 – 2017년
학력
도쿄대학 (미술사학과 / 학사)
경력
일본영상학회 회장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1960년대 ~ 1970년대
2.3. 1980년대 이후
3. 작품 목록
3.1. 장편 극영화
3.2. 다큐멘터리 영화
3.3. 실험 영화
4. 여담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일본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대학교 교수.

일본 실험영화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다. #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추구하면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단편 영화와 장편 영화를 연출했고, 동시에 영화 이론가로서 다큐멘터리 형식을 이론화했다. #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932년 3월 25일,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화가를 꿈꿨으며, 중학교 때부터 유화를 그렸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일년에 수백편의 영화를 볼 정도로 골수 시네필이었다고 한다. 고교 졸업후, 예술의 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도쿄대학에 입학해 문학부 미학 미술사학과를 전공했다. 당시 미술사와 더불어 영화사를 공부해서 현대미술과 깊이 관련된 아방가르드 시네마라는 것이 1920년대 유럽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갖게 됐다고 한다. 마츠모토는 영화 감독으로서 자신의 출발점을 이탈리안 리얼리즘[1], 익스페리멘탈리즘, 아방가르드, 다큐멘터리를 꼽았다.

아방가르드 필름이라는 것은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세계의 예측을 초월한 자유로움이 매우 매력적이긴 하지만, 반면 현실과의 관계가 자주 희박해져서 말하자면 닫힌 세계가 되기 십상인 것이죠. 한편 다큐멘터리는 현실과의 관계는 액츄얼하고 강렬하지만 아직 마음속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시대배경에 어리광을 부린 작품은 시대가 바뀌거나 하면 뭔가 낡아버립니다.. 이 두 가지 매력과 한계를 더 부딪친 데 새로운 영화 과제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환상 같은 영화의 가능성을 알랭 레네의 '게르니카(Guernica, 1950)'를 단서로 탐구해 나가려고 했던 것이 제 출발점입니다. #


1955년 영화 감독으로서 기초 지식을 마스터하기 위해서 영화 제작사 '신리켄 영화'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기획의 시작부터 필름의 완성까지 모든 부문에 걸쳐 배웠다. 직장 밖에서도 여러 필름을 빌려와서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필름을 풀고 공부했고, 여러 가지 듣고 읽거나 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영화 연출을 공부했으며, 이듬 해에는 데뷔작을 만들기 시작했다. 타케미츠 토오루, 야마구치 카츠히로(山口勝弘)와 함께 기획해서 만든 '은륜(銀輪)'이라는 작품인데, 홍보 영화였지만 비교적 아방가르드 풍의 영화였다.

1956년부터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 요소들을 융합시킨 새로운 종류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잠함'(潜凾, 1956), '봄을 부르는 아이들'(春を呼ぶ子ら, 1959)을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2.2. 1960년대 ~ 1970년대[편집]


1959년 신리켄 영화 퇴사 후에는 '기록영화', '영화비평', '계간필름', '이미지포럼' 등의 잡지에서 영화 평론가 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에 '영화비평'이라는 잡지가 설립됐는데, 아직 조감독 시절인 오시마 나기사, 요시다 요시시게(吉田紀重),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하니 스스무(羽仁進), 마츠모토 토시오 같은 신인 영화 감독들이 함께 잡지를 만들어 장르를 초월한 비평운동을 진행했다.[2] 마츠모토는 영화 잡지의 편집이나 메인 라이터도 맡아 다양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정치적 의식도 높고 세계의 중요한 작품을 평가하고자 계몽도 되어 있어서 관련 평론을 쓰기도 했다. 마츠모토는 일생동안 제작과 이론의 양면으로부터 '영상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했다. 특히 1963년 저술한 평론집 '영상의 발견-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는 명저로 평가받고 있으며, 후대의 영상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3] 또한 '니시진'(1961)[A], '돌의 시'(1963), '어머니들'(1967)[A] 등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연출해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영상 작품을 전혀 만들지 않는 공백의 시기도 있었다. 스폰서를 분노하게 하는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면서 점점 일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극영화 쪽으로 전향한다든가, 이른바 상업영화계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싶다든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상품으로서의 일반적인 극영화는 그야말로 습관과 타성으로 만드는 문양의 세계를 강요당하기 때문에 그런 직능적 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없었던 실험적인 극 형식의 영화는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는 말하자면 게릴라로서 극영화계를 도발적으로 때려눕히는 그런 의미가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허구와 사실이라든가, 남자와 여자라든가 객관과 주관은 물론 정신과 육체, 맨얼굴과 가면, 비극과 희극이라는 이원론적인 세계 인식의 도식을 어지럽힌다는 것이 창작의 동기에 있었습니다. #


1960년대 후반부터는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1968), '엑스타시스'(1969) 등의 참신한 실험 영화를 제작했다. 이러한 성과를 극영화로 전개시킨 것이 '장미의 행렬(1969)'이다. 당시 마츠모토는 영화 제작사 아트 시어터 길드(ATG)와 협력해 첫 장편 영화이자 실험 영화인 '장미의 행렬'을 연출했다. 도쿄의 언더그라운드 게이 문화를 배경으로 한 퀴어 영화이며, 16세의 도쿄 롯폰기의 댄서였던 피터(ピーター)[4]를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이 작품은 마츠모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본 실험 영화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 서양권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5] 다만, 개봉 당시인 1960년대 일본은 안보투쟁이 한창이던 치열한 시기였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마츠모토 왜 그런 작품을 만드는 거냐?"라고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1971년에는 애증극을 처참하게 그린 공포 영화 '수라'를 공개했다. 요츠야 괴담을 각색한 시대극 영화이며, 연극 감독 카라 주로(唐十郎)가 주연으로 출연했다. 마츠모토의 치밀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굉장히 기이한 작품이며, '장미의 행렬'과 함께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고 있다.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자신의 저서[6]에서 "잘도 여기까지 찍었구나 하는 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개봉 당시에는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려서,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7] 이후 '장미의 행렬'과 '수라'가 서양권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아, 스즈키 세이준, 테라야마 슈지, 테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宏), 요시다 요시시게, 시노다 마사히로와 함께 일본 아방가르드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두 작품은 국내의 시네필들에게도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다.

자신을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영상 작가라고 생각했으며[8], 1960~70년대에는 16mm 필름, 비디오, 스캐너 등 특수한 기재를 사용하여 매년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이벤트 '크로스토크/인터미디어'(국립 요요기 경기장, 1969)에 참여해 '이콘을 위한 프로젝션'에서 직경 4미터의 벌룬 20개에 영상이나 조명을 투영했다. 그리고 1970 오사카 엑스포 '센이칸'에서는 '스페이스 프로젝션 아코'로 멀티화면 영상 제작을 실시했다.

복합미디어 비디오 아트 영역에서도 '마그내틱 스크램블'(1968), '섀도우'(1969), '멀티비디오를 위한 모나리자'(1974), '유테라스=자궁'(1976년), '아쿠아리움'(1979)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아트맨'(1975), '화이트홀'(1979), '기 Breathing'(1980), '도구라 마구라'(1988) 등 동양의 사상이나 일본의 전통문화를 모티브로 한 전위적 작품을 발표했다. 영상을 중심으로 한 표현 속에서 일관되게 탈제도화 실천을 시도했다.


2.3. 1980년대 이후[편집]


1980년대부터는 많은 예술대학에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로 인해 굉장히 과작을 했다. 1988년 공개한 '도구라 마구라' 이후 장편 영화를 더 이상 발표하지 않았다. 도쿄조형대학 디자인과 조교수(1968~71년), 규슈예술공과대학 예술공학부 화상설계학과 교수(1980~85년), 교토예술전문대학 영상전공과정 주임교수(1985~91년), 교토예술대학 교수(교무부장 1991~94년, 예술학부장 1995~96년, 부학장 1997-98년), 일본영상학회 회장(1996~2002년 5월), 니혼대학 예술대학원 예술학연구과 객원교수(2002~2012년 3월)를 역임했다. # 2013년에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수상 선정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방가르드와 다큐멘터리의 밀월에 대해 1950년대 후반부터 언급을 시작해 실험 영화, 비디오 아트, 미디어 아트의 개간을 반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실천하는 전위 선구자야말로, 마츠모토 토시오씨다. 그는 「영상」이라는 단어를 일본에 정착시키고 기호론이나 독자적인 시각철학을 거기에 주입함으로써 영상개념 자체를 패러다임 전환시킴과 동시에, 「미디어예술」로 만든 "진정한 공로자"이다. 영상이론, 영상교육 분야 개척에도 힘써 공을 세웠다. #


2017년 4월 12일, 장폐색으로 도쿄시내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5세.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 7월호에서는 마츠모토 토시오의 추모 특집이 이뤄졌다. 특집의 제목은 "불멸의 아방가르드".


3. 작품 목록[편집]



3.1. 장편 극영화[편집]


년도
제목
연출
각본
비고
1969년
장미의 행렬
薔薇の葬列


아트 시어터 길드 제작, 배급
1971년
수라
修羅


아트 시어터 길드 제작, 배급
1976년
16세의 전쟁
十六歳の戦争


공동 각본
1988년
도구라 마구라
ドグラ・マグラ


공동 각본


3.2. 다큐멘터리 영화[편집]


년도
제목
비고
1956년
잠함
潜凾

1959년
봄을 부르는 아이들
春を呼ぶ子ら

300톤 트레일러
300トントレーラー

안보 조약
安保条約

1960년
하얀 긴 선의 기록
白い長い線の記録

1961년
니시진
西陣

1964년
올림픽을 진행하다
オリンピックを運ぶ

1967년
어머니들
母たち

1976년





3.3. 실험 영화[편집]


년도
제목
비고
1955년
은륜
銀輪

1968년
짓눌린 오른쪽 눈을 위하여
つぶれかかった右眼のために
아트 시어터 길드 배급
마그네틱 스크램블
マグネチック・スクランブル

1969년
엑스타시스
エクスタシス

1971년
메타스타시스 신진대사
メタスタシス 新陳代謝

1972년
오토노미 자율성
オートノミー 自律性

익스팬션 확장
エクスパンション 拡張

1973년
모나리자
モナ・リザ

1974년
플라이 날다
フライ 飛ぶ

1975년
색즉시공
色即是空

청녀
青女

팬텀 환망
ファントム 幻妄

아트맨
アートマン

1978년
에니그마 수수께끼
エニグマ 謎

1979년
화이트홀
ホワイトホール

1980년
기 Breathing
気 Breathing

1981년
커넥션
コネクション

1982년
시프트 단층
シフト 断層

릴레이션 관계
リレーション 関係

1984년
딜레이 익스포저
ディレイ・エクスポージャー

웨이브
WAVE

1985년
흔들림 스웨이
揺らぎ スウェイ

EE 컨트롤
EEコントロール

바이브레이션
バイブレーション

1987년
앵글럼 기억 흔적
エングラム 記憶痕跡

1992년
위장 디시뮬레이션
偽装 ディシミュレーション


러닝 타임이 굉장히 짧은 단편들이다. 유튜브에 몇몇 영상들이 업로드됐다. # '아방가르드를 위한 유튜브'라 불리는 우부웹에도 업로드됐다. #


4. 여담[편집]


  • 동시대 일본의 전후 전쟁 책임에 대해 영상작가가 수행하는 역할과 기록의 의의, 영화 방법론 등을 개척하여 여러 국면에서 논의를 이끌었다. #

  • 2015년 영화 감독 츠츠이 타케후미(筒井武文)가 마츠모토 토시오의 인생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총 5부작이다. #

  • 아방가르드 영화 감독 이토 타카시(伊藤高志)는 마츠모토 토시오의 제자다. #

  •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마츠모토의 극영화 '수라'(1971년) 등은 1980년대 신인들에 의한 작품보다 좋다고 평가했다. #


  • 영상연구자 사카모토 히로후미(阪本裕文)는 마츠모토의 추도문에서 "우리는 마츠모토 토시오의 일에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열성적인 신봉자의 의식이라기보다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홀린 탐색자의 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츠모토 토시오의 작품에는 수수께끼가 있다. 본인의 말이나 문장은 지극히 명석한데, 논리로의 회수를 거부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 작품에 내재되어 있다. 선생님은 자신의 논고 속에서 언어화되기 이전의 비언어적 표현 영역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이야말로 바로 그것을 담고 있었다. 또 누구보다 선생님 자신이 그 일탈을 즐기고 있는 분위기도 있었다. (중략) 늘 쿨하셨고 때로는 혹독한 논조의 글도 쓰셨지만 실제로는 따뜻한 성품이셨다."라고 적었다.

  • 국내에서는 2005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영화와 혁명 특별전’(2005.7.27~8.15), 한중일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신시각(新視角)의 서울 전시행사로 2009년에 열린 ‘LINK!! 미디어아트전’(2009.9.4~9.13), 그리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플랫폼 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2010.11.3~11.19) 등을 통해 그의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 작업이 꾸준히 소개되기도 했다. # 2022년 7월 24일 마츠모토의 희귀작 여덟 작품을 동국대학교의 시네클럽 차차시네마테크에서 상영했다. #


5. 관련 문서[편집]




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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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안 리얼리즘 영화를 보고 전에 없던 것 같은 충격을 받아서 현실과 표현을 통째로 같이 해서 사람의 마음을 쏙쏙 파고드는 그런 영화라는 걸 좀 더 진심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2] 이 모임은 젊은 영화인들이 멤버로 있던 스터디 그룹 ‘영화와 비평 모임’(映画と批評の会)이다.[3] 오시마 나기사가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도 있는 ‘전위기록영화론’도 수록됐다. # 이 평론집은 2004년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번역했다. # [A] A B 베네치아 국제 기록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4] 본명은 이케하타 신노스케다.[5]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로튼토마토 지수가 100%이며, 힙스터들이 많은 Letterboxd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6] 2020년 출판한 '보는 레슨 영화사 특별강의'[7] 2008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해, 정성일이 관객과의 대화를 하기도 했다. 당시 발언에 따르면 '수라'는 일본 내에서 호불호가 격렬하게 갈려서 1980년대 말 감상 후 일본 영화인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수라'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왜 그런 영화를 좋아함?'이라는 무언의 시선을 몇몇에게서 받았다고 한다.[8] 일본에서 '영상작가'라고 자칭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다. 마츠모토는 예술 지상주의로 '엔터테인먼트작은 찍지 않는다'라고 완고하게 말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