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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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ссии

이름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Мар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1819년 8월 1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차르스코예 셀로
사망
1876년 2월 21일 (향년 56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배우자
제3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보아르네
(1839년 결혼 / 1852년 사망)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 (1854년 결혼)
자녀
알렉산드라, 마리야, 니콜라이, 예브게니야, 예브게니, 세르게이, 게오르기, 그리고리, 옐레나
아버지
니콜라이 1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형제
알렉산드르 2세, 올가,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이, 미하일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생애
2.1. 어린시절
2.2. 첫번째 결혼
2.3. 두번째 결혼
2.4. 말년과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
3.2. 자녀



1. 개요[편집]


러시아의 여대공. 니콜라이 1세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4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맏이이자 오빠인 알렉산드르 2세연년생 남매이다.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외할머니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1819년 8월 18일니콜라이 1세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 샤를로테에 의하면 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는 아들을 바랐기 때문에 딸이 태어난 것에 실망스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을 쏙 빼닮은 마리야를 딸들 중에서도 가장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실제로 마리야는 니콜라이 1세와 샤를로테의 4남 4녀 중에서 외모부터 성격까지 아버지를 제일 닮았다고 평가받는다.

자녀들의 교육에 매우 신경쓴 부모님 덕분에 마리야 여대공은 매우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저녁마다 부모님과 함께 카드 놀이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으로 마리야는 평생동안 가족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마리야 여대공은 여동생들인 올가 여대공알렉산드라 여대공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는데, 자매들 중 마리야와 올가는 겨울 궁전에서 부모님, 가정교사, 의사들의 관리하에 살았다. 의사들은 두 여대공의 건강을 책임졌으며 가정교사들은 교육에 관여했다.

특히 러시아의 시인이자 두 여대공들의 어머니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던 바실리 주코프스키가 황실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평생 러시아 황실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마리야와 올가는 그 외에도 춤과 음악, 그림 등을 비롯한 교양 수업을 배웠다. 마리야는 특히 미술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있었는데 수채화를 매우 잘 그렸으며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기에 예술품을 모으는 등의 일을 했다. 또한 음악활동과 자선사업에도 열심이었다고 한다.

2.2. 첫번째 결혼[편집]



3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

1837년 바이에른 왕국루트비히 1세는 조카[1] 3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을 러시아에서 기병 기동에 참여하도록 보냈다.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1세의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의 차남이자 프랑스 제국의 전직 황후였던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친손자였다. 비록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1세의 의붓손자였지만 바이에른의 왕실인 비텔스바흐 가문이 외가였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왕가와 친척 관계였다.[2] 게다가 미남미녀가 많은 걸로 유명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미모를 물려받아 매우 잘생겼으며, 교육도 잘 받아 똑똑했고 과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넓으며 문화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막시밀리안은 1년 후인 1838년 10월에 러시아를 다시 방문했다. 멋진 외모와 매너의 그는 마리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은 왕족이 아닌 귀족인데다 종교도 가톨릭 신자여서, 러시아 황제의 딸인 마리야에게 바람직한 결혼 상대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의 가족들도 두 사람의 결혼에 곤혹스러움울 표출했는데, 특히 막시밀리안의 어머니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가 완강히 결혼을 반대했다. 아우구스테는 당시 막시밀리안은 형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3]의 요절로 로이히텐베르크 가문의 후계자가 된데다,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마리야와 가톨릭을 믿는 막시밀리안의 종교 문제를 결혼에 대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언급했다. 또한 아우구스테는 가톨릭 신앙에서 자란 막시밀리안의 후손들이 완전히 러시아화될 것을 두려워했으며 역사가 자신의 아들을 비난할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막시밀리안의 아버지인 외젠이 양자로 들어간 보나파르트가러시아 제국의 쓰라린 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1세는 해외로 떠나지 않고 러시아에서 산다는 조건으로 마리야의 결혼을 허락했다.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은 통치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것은 쉬웠다.

결혼식은 1839년 7월 2일 겨울 궁전의 대성당에서 열렸다. 니콜라이 1세는 딸의 결혼식을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았고 축제는 2주 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마리야는 막시밀리안과의 사이에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마리야의 자녀들은 외할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명으로 로마노프스키 공/로마노프스카야 공녀 칭호를 쓰며 정식으로 러시아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니콜라이 1세는 사위인 막시밀리안에게 러시아 군의 지위까지 부여했다.

결혼식 날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마리야에게 선물로 궁전을 지어주기로 했다. 궁전의 부지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맞은편에 위치해 있는 세인트루이스의 중심부를 선택했다. 특히 매일 딸을 보러갈 수 있도록 건축가 안드레이 시타켄시네이데르에게 직접 의뢰를 넣어 황실 거주지인 겨울 궁전에 가까운 부지에다 궁전을 건축했다. 이 궁전은 1844년 말에 완공되었고 마리야의 이름을 따서 마린스키 궁전으로 명명되었다. 마리야와 막시밀리안은 자신들의 궁전이 건설되는 동안, 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마린스키 궁전의 완공을 기다리며 보론초프 궁전에서 지냈다.

마리야가 순환성 다리 문제로 고생했기 때문에 마린스키 궁전은 오른쪽 날개에 계단이 설치되지 않은 계단으로 설계되어 안방에서 3개 층을 모두 연결했다. 마리야는 자신의 궁전을 매우 아름답게 꾸몄는데 궁 안에는 예술 작품들과 가족의 유물들로 가득 차있었으며, 이중 일부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친할머니 조제핀 황후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있었다. 곧 마린스키 궁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마리야와 막시밀리안 부부는 예술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자선 및 예술 활동에 적극적이였다. 막시밀리안은 러시아군이었지만 과학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며 러시아 전역에서 과학자로 유명해졌다. 그는 과학 중에서도 광산 기술과 채광 기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했으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후 막시밀리안은 1844년 장인 니콜라이 1세에 의해 광산 공학 부서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에는 예술 아카데미의 회장으로까지 임명되었다. 마리아는 남편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를 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1840년 후반에 마리야는 남편과 점점 불화하며 사이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에 마리야는 남편과의 불화에 대한 스트레스를 활발한 자선사업과 연애사건으로 풀었다. 애초에 막시밀리안은 잘 알려진 바람둥이였기에 정부를 따로 두고 있었고, 마리야는 그레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을 정부로 두었다. 한편 막시밀리안은 우랄 산맥의 광산 탐험 중에 결핵에 걸렸다. 더 따뜻한 기후의 해외로 여행하면서 건강을 개선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그는 1852년 11월 1일에 사망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 마리야는 그를 대신하여 예술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마리야는 더 큰 열정으로 자신의 컬렉션에 전념하며 재산을 아낌없이 썼고 그 결과 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한 후 재정이 고갈됬다. 오빠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야와 가까웠지만 여동생에게 주는 예산만큼은 엄격하게 제안했다.

2.3. 두번째 결혼[편집]



두번째 남편 그리고리 스트로가노프 백작

이후 마리야는 전남편 막시밀리안이 죽은지 2년만인 1854년에 애인이었던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1824 ~ 1879)과 재혼했다. 이 재혼은 명백한 귀천상혼이었고 철저히 비밀리에 치러졌는데, 마리야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1세는 딸의 재혼을 알고 불같이 화를 냈으며 마리야에게 수녀원으로 가라고 했고 스트로가노프 백작도 코카서스로 내쫓아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고 마리야의 오빠인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결국 마리야는 아버지가 살아있는 내내 스트로가노프 백작과의 재혼을 비밀리에 유지해야만 했고,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후인 1856년 11월 16일에서야 공식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이후 마리야는 오빠인 알렉산드르 2세에게 두 번째 결혼을 인정하고 러시아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허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계속해서 외국에 산다면 스트로가노프 백작과의 결혼을 못본척 해주겠다고 했다. 결국 두번째 결혼을 인정받는 것도 러시아에서 사는 것도 전부 실패한 마리야는 첫번째 남편인 막시밀리안과의 자녀들과 떨어져지내야 했다. 막시밀리안과의 자녀들은 니콜라이 1세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은 러시아 황실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명으로 겨울 궁전에서 어머니 없이 지내야했다.[4]

1862년, 마리아 니콜라예브나는 제롬 보나파르트의 소유였던 빌라 쿼토에 피렌체에 정착했다. 하지만 두번째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못했고 마리야는 피렌체의 저택을 꾸미는데에만 집중했다.

2.4. 말년과 사망[편집]


말년의 마리야 여대공

마리야는 선천적으로 정맥류 질환을 앓았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나이가 든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지인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말라버렸다. 결국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지내다가 1876년 2월 21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의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Nikolaevna of Russia)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파벨 1세
(Paul I)
표트르 3세
(Peter III)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5]
(Margravine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ederick William II)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자
(Landgravine Frederika Louisa of Hesse-Darmstadt)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trelitz)
헤센다름슈다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ederica of Hesse-Darmstadt)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제3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보아르네
(Maximilian de Beauharnais, 3rd Duke of Leuchtenberg)
1녀'
로이히텐베르크의 알렉산드라 막시밀리아노바 공녀
(Princess Alexandra Maximilianova of Leuchtenberg)
1840년 4월 9일
1843년 8월 12일

2녀'
로이히텐베르크의 마리야 막시밀리아노바 공녀
(Princess Maria Maximilianova of Leuchtenberg)
1841년 10월 16일
1914년 2월 16일
바덴의 빌헬름 공자[6]
슬하 1남 1녀[7]
1남
제4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니콜라이
(Nicholas, 4th Duke of Leuchtenberg)
1843년 8월 4일
1891년 1월 6일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 안넨코바
슬하 2남
3녀'
로이히텐베르크의 예브게니야 막시밀리아노바 공녀
(Princess Eugenia Maximilianovna of Leuchtenberg)
1845년 4월 1일
1925년 5월 4일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공작
슬하 1남
2남
제5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예브게니
(Eugen, 5th Duke of Leuchtenberg)
1847년 2월 8일
1901년 8월 31일
다리아 콘스탄티노브나 오포치니나
슬하 1녀
지나이다 드미트리예브나 스코벨레바
3남
로이히텐베르크의 세르게이 막시밀리아노비치 공자
(Prince Sergei Maximilianovich of Leuchtenberg)
1849년 12월 20일
1877년 10월 24일

4남
제6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게오르기
(George, 6th Duke of Leuchtenberg)
1852년 2월 29일
1912년 5월 16일
올덴부르크의 테레제 페트로브나 여공작
슬하 1남[8]
몬테네그로의 아나스타샤 공주[9]
슬하 1남[10] 1녀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
(Count Grigori Aleksandrovich Stroganov)
5남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 스트로가노프 백작
(Count Grigori Grigorievich Stroganov)
1857년 5월 9일
1859년

4녀'
옐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트로가노바 여백작
(Countess Elena Grigorievna Stroganova)
1861년 2월 11일
1908년 2월 12일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셰레메테프
슬하 1남
그리고리 니키티치 밀라셰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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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동생 아우구스테의 차남.[2] 외삼촌이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였으며 이모들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 프로이센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작센의 왕비였다. 게다가 큰누나인 조제핀은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고 둘째 누나인 아멜리는 브라질의 황후가 되었다.[3]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의 첫번째 남편이었으나 결혼한지 2달만에 24살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했다.[4] 마리야의 장남 니콜라이 역시 러시아의 귀족 가문 출신 유부녀(...)인 나데즈다 아넨코바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하여 1868년 해외로 반쯤 추방되다시피 떠나야 했다. 나폴레옹의 의붓증손자이자 바이에른 왕실의 후손이며 러시아 황제의 외손자인 사람이 유부녀와 불륜으로 결혼한다고 하니 러시아 황실은 말 그대로 뒤집어졌고 그 깐깐한 궁정 입장에선 추방도 많이 봐준 거였다. 70여년 뒤 에드워드 8세가 이혼녀인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할려다가 퇴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일국의 왕실은 왕족들의 결혼과 그 상대에 대해 몹시 민감하다. 그러다 1878년에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 에 참전하여 공을 인정받아 외삼촌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1879년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고, 아내 나데즈다도 보아르네 백작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사실상 궁정에선 왕따였기 때문에 나데즈나는 해외로 많이 놀러다니며 사치를 부렸다. 그래서 궁정 사람들이 나데즈나를 더 싫어했다고. 니콜라이와 나데즈나의 결혼은 귀천상혼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자식들은 러시아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니콜라이가 죽기 1년 전인 1890년에야 사촌인 알렉산드르 3세에 의해 러시아의 귀족으로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작위를 승계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전하 칭호를 받는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 하나, 일반 공작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 하나 이렇게 2개로 분리되었다. 전자는 그 뒤로도 후손 항목에서도 보이듯 형제들이 자녀가 없거나 딸 뿐이어서 방계로 방계로 이어지다 결국 단절되었지만 후자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5]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외손녀이다.[6] 바덴 대공 레오폴트스웨덴의 소피아의 4남으로 구스타브 4세 아돌프의 외손자다. 참고로 마리야 막시밀리아노바의 막내시누이 체칠리에는 마리야 막시밀리아노바의 외삼촌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결혼했다.[7] 바덴의 막시밀리안 공자[8] 7대 로이헨베르크 공작[9] 니콜라 1세의 3녀다.[10] 8대 로이헨베르크 공작. 자녀가 없는 상태로 1974년 사망하여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위는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