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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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러시아의 황족이자 군인.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4남 4녀 중 3남이다.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네 아들들에게 자신과 형제들의 이름을 물려줬다. 이에 장남인 알렉산드르 2세는 첫째 큰아버지인 알렉산드르 1세, 차남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둘째 큰아버지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삼남인 니콜라이 본인은 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 막내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작은아버지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동갑내기 고종사촌이다.
2. 생애[편집]
2.1. 군인 시절[편집]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해서 군인으로 활동했다. 썩그리 좋은 지휘관은 아니였다.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육군 원수, 기병대 감찰관, 러시아 공병대 감찰관의 계급을 받았으며, 국무원에서도 활동했었다.
2.2. 결혼 생활[편집]
올덴부르크 공가의 알렉산드라 공녀[1] 와 결혼해서 2남을 두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안좋았다. 발레리나 출신
2.3. 말년과 사망[편집]
니콜라이 대공은 큰 형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할때 두 아들과 함께 칸에 있었고, 1881년 3월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조카 알렉산드르 3세가 러시아 황제가 오르면서 니콜라이 대공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숙부를 좋게 보지 않았고 니콜라이 대공의 영향력을 서서히 박탈시켰다. 니콜라이 대공의 권위는 그가 사기적인 군사 징발에 연루되었을때 더욱 손상되었다. 급기야 니콜라이 대공은 1880년 파리 누벨 가극단에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을 때, 무분별하게 정부 관리와 군 사령관을 공격했고 결국 직위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르 3세는 숙부의 혼외정사도 비판했다.
니콜라이 대공은 정부 예카테리나 치슬로바와 살고있었다. 아내 알렉산드라 대공비는 1881년 니콜라이를 영원히 떠나 키예프로 갔지만 남편이 원하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혼을 할 수 없는 와중에 정부 예카테리타 치슬로바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예카테리나가 죽은 이후 니콜라이는 미쳐버렸고 뇌로 퍼진 구강암에 걸렸다. 망상에 시달리는 그는 모든 여성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한 발레 공연에서 대공은 젊은 남성 무용수를 여성으로 착각하여 공격하기도 했다. 1890년에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미쳤다고 발표되어 크리미아의 실내에 감금되었고 이후 알룹카에서 사망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4. 여담[편집]
- 장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키가 198cm나 되는 어마어마한 장신이었다.
- 니콜라이 1세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와 사돈관계를 맺지 못한 황자다. 큰형 알렉산드르 2세의 큰며느리가 크리스티안 9세의 차녀 덴마크의 다우마였고, 작은 형 콘스탄틴 대공의 큰사위는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요르요스 1세였다. 게다가 남동생 미하일 대공은 손녀사위가 크리스티안 9세의 장손 크리스티안 10세이면서, 손자며느리가 크리스티안 9세의 외손녀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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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넷째 고모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손녀이다. 즉, 오촌 조카.[2]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외손녀다.[3] 니콜라 1세의 3녀다.[4] 니콜라 1세의 차녀다.[5] 외손자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크리스티안 10세의 처남이였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10세의 고종사촌 알렉산드라 공주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