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보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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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몬드와 더비 백작부인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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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거릿 보퍼트
Margaret Beaufort
출생
1443년 5월 31일
잉글랜드 베드포드셔 블렛소 성
사망
1509년 6월 29일 (66세)
잉글랜드 런던
배우자
제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 (1450년 결혼 / 1453년 무효화)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1455년 결혼 / 1456년 사망)
헨리 스태포드 경 (1458년 결혼 / 1471년 사망)
제1대 더비 백작 토머스 스탠리
(1472년 결혼 / 1504년 사망)
자녀
헨리 7세
아버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어머니
블렛소의 마거릿 보챔프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1]이자 헨리 7세의 어머니이다.


2. 생애[편집]


1443년 잉글랜드 베드포드셔의 블렛소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3대 서머싯 백작, 제1대 서머싯 공작인 존 보퍼트[2]이며, 어머니는 블렛소의 마거릿 보챔프였다.

생후 1년만인 1444년에 아버지 존이 사망하면서 보퍼트 가문의 막대한 영지를 물려받을 유일한 상속녀가 되었고, 당시 왕이었던 헨리 6세의 명령으로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폴이 후견인으로 결정되었다. 어머니 마거릿 보챔프는 곧 6대 웰즈 남작 라이오넬 드 웰즈와 재혼했으나, 딸 마거릿을 후견인에게 보내지 않고 함께 지내며 그녀를 직접 양육했다.

1450년 후견인을 맡았던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폴의 아들인 존 드 라폴과 첫번째로 결혼했지만 헨리 6세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1455년 헨리 6세의 이부 남동생인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3]와 두번째로 결혼했지만[4], 불행하게도 결혼한지 1년만인 1456년 에드먼드는 장미 전쟁 중에 요크 왕조에 포로로 붙잡히고 그해 11월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임신 7개월이던 마거릿은 에드먼드의 죽음으로부터 2개월 뒤인 1457년 1월 28일 유복자이자 유일한 자녀인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마거릿은 당시 만 14세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임신하고 출산한터라 산모와 아이 둘 다 죽을 뻔했고, 이후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는 게 이때의 후유증으로 불임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극심한 난산으로 출산할 때 사망할 뻔 했던 마거릿은 어렵게 낳은 아들을 당시 관습[5]대로 다른 대귀족에게 보내지 않고 직접 훈육 및 교육하며 애정을 쏟는다. 또한 왕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역대 잉글랜드 왕조의 왕들의 이름인 헨리로 짓는다. 이 아이가 훗날의 헨리 7세다.

1458년 버킹엄 공작의 아들인 헨리 스태포드[6]와 세번째로 결혼했다. 1461년 요크 왕조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6세를 제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랭커스터의 후손이자, 막대한 재산의 상속녀였던 마거릿과 그녀의 아들이 새롭게 랭커스터 계열의 유력한 계승 후보에 오르게 되었다. 요크 왕조의 치하에서 마거릿은 에드먼드 튜더의 친동생이자 헨리 6세의 또다른 이부 남동생으로, 자신의 시동생인 펨브로크 백작 재스퍼 튜더(Jasper Tudor)와 아들과 함께 웨일스에서 숨죽이며 지내다가 결국 헨리 7세를 바다 건너 브르타뉴로 보낸다.

1471년 세번째 남편 헨리 스태포드와 에드워드 4세가 유폐했던 헨리 6세가 사망했고, 1472년 네번째로 리처드 3세의 신하였던 토마스 스탠리와 결혼한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요크 왕조도 점차 분열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리처드 3세의 둘째형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가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에드워드 4세 사후 리처드 3세가 그의 장남인 에드워드 5세를 비롯한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자식들을 모두 사생아로 격하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후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이자 에드워드 4세의 차남인 요크 공작 리처드를 런던탑에 유폐시켰다.

이로 인해 리처드 3세를 향한 민심이 떨어지자 궁정으로 돌아온 마거릿은 남편인 토마스 스탠리, 버킹엄 공작을 설득하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심했다. 또한 왕비 직위를 박탈당하고 아들들마저 빼앗긴 채 남은 딸들만 데리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피난을 가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에게 접근해,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이자 공주였던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아들 헨리 7세와의 결혼을 약속하면서 그녀와의 동맹 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따라서 리처드 3세가 조카의 왕위를 강탈하고 런던탑에 유폐하면서 분열했던 요크 왕조의 민심 또한 결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버킹엄 공작의 난이 실패하고 버킹엄 공작은 처형당했으며, 마거릿 역시 사권박탈을 당한 뒤 유폐되는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 아들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갈 뻔 했으나 1485년 바다를 건너, 브르타뉴에서 온 헨리 7세의 군대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장미전쟁은 막을 내린다. 마침내 헨리 7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튜더 왕조가 개창되었고, 그는 약속대로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정통성을 보충한다.

마거릿은 직접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선택했다. 왕비였던 적도 없으므로 Queen Mother(전 왕비이자 왕의 생모)나 Queen Dowager(전 왕비이며 왕의 미망인)을 얻지 못해 끝까지 왕의 어머니(King's Mother)이자 레이디로 불렸다. 하지만 마거릿은 랭커스터 공작 존의 후손으로 여왕이 될 수 있었으며 아들 헨리 7세는 그녀의 핏줄을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고 난 뒤 1499년 이후 서명으로 'Margaret R'[7]을 쓸 만큼 자부심을 표현했다. 복식 또한 왕비였던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왕의 어머니이며 계략과 재치, 인내로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기에 궁정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1499년에는 남편 토마스 스탠리와 떨어져 수녀가 되었으며, 1509년 6월 29일 아들 헨리 7세보다 두 달 늦게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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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퍼트 가문은 존이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와 결혼하기 전 태어난 사생아의 후손이지만 나중에 리처드 2세가 적자화 시켰다. 마거릿은 보퍼트 가문의 마지막 부계 후손이었다.[2] 에드워드 3세의 4남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3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손자다.[3] 헨리 6세의 모후 발루아의 카트린이 오웬 튜더와 재혼하여 낳은 아들 중 장남.[4] 헨리 6세도 곤트의 존의 적자계열 증손자임을 생각하면, 자신의 6촌을 이부 남동생과 혼인시킨 셈이다. 이 결혼은 이부동생에게 왕위계승권과 막대한 재산을 지닌 상속녀를 안기려는 헨리 6세의 결정이었다고 한다.[5] 귀족의 아들이 나이가 차면 당대 유력자에게 대자로 보내 공부시키던 관습. 이를 반영한 창작물이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로, 대영주의 자식은 같은 대영주에게 보내, 기사 수행을 비롯한 여러가지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 관습으로 나온다.[6] 1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포드의 차남. 위로 형인 험프리 스태포드가 있었다.[7] R은 라틴어로 여왕을 의미하는 Regina의 약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