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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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인 영현대불 (荣县大佛)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817년에 조성된 영현대불의 모습
1. 개요[편집]
荣县 (영현)
영어 Rong County
쓰촨성 쯔궁시 서부의 현급시.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중세 시기 쯔궁 지역의 중심지였고, 신해혁명 시기 중국에서 최초로 혁명정부가 세워진 고장이었다. 따라서 룽현이 속한 쯔궁은 지금도 혁명의 선봉장이란 의미인 수의실선천하 (首义实先天下)라 불린다.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시가지 동북부에는 러산대불과 함께 사천의 양대 당나라 시기 불교 유적으로 평가되는 룽현대불이 있어 쯔궁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2.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쯔궁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송나라 대에 조성된 진남탑 (镇南塔)
지명은 당나라 시기 쯔궁 일대에 설치된 영주 (荣州)의 치소였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지명은 욱천현 (旭川縣)이었지만 1067년 송신종 조욱의 피휘를 위해 영덕현 (荣德縣)으로 개칭되었고, 1071년 공정현이 폐지되자 현 쯔궁 시할구 일대도 관장하였다. 당·송대에 영주 일대는 소금 생산, 즉 염업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세부 사항은 쯔궁시 문서 참고) 당나라 후반기와 남송 후반기 두차례에 걸쳐 영주에는 황실의 일원이 영왕 (荣王)으로 분봉되었고, 현 룽현현중학교가 그 왕부였다. 해당 학교 내에는 영왕포정비가 남아있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었다. 1224년 송이종의 동생 조여예가 영왕에 봉해졌고, 1233년 영주는 한때 송광종이 자사를 역이했던 것을 기념하며 그의 연호를 따 소희부 (绍熙府)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번영을 구가하던 도시는 1236년 몽골 제국군에게 파괴되며 쇠퇴하였고, 소희부는 쯔궁 시할구 방면으로 이전되었다가 결국 폐지되었다. 그후 영덕현으로 남았다가 원나라 말엽인 1340년 재차 영주가 설치되어 현 러산을 중심으로 한 가정로 가정로 (嘉定路)에 귀속되었다. 명나라의 사천 정복 후 1376년 영주는 영현 (荣縣)으로 격하되었고,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졌다. 16세기에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류정 (현 쯔궁 시할구) 일대가 부순현으로 이관되며 일대의 주도권을 내어준 영현은 소외를 겪었다. 17세기 명청교체기에 초토화된 부순과 달리 명맥을 유지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러다 1729년 현 쯔궁 시할구의 서부인 공정현승서 (公井縣丞署)가 영현 관할에 놓이며 경제, 정치적 중요성이 회복되었다.
청말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염상들이 장악한 자류정과 달리 영현은 우위장 (吴玉章), 단마오신 (但懋辛), 셰펑치 (谢奉琦), 룽밍젠 (龙鸣剑), 왕톈제 (王天杰) 등 걸출한 혁명가들을 배출하였다. 따라서 1911년 9월 25일 중국 동맹회가 영현 관아를 장악하고 중국 최초의 민주 정부인 영현군정부 (荣县军政府)를 수립하며 신해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1914년 공정, 자류정이 합하여 자공시를 설립하려 하자 영현과 부순현은 세수 감소에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하지만 1939년 결국 자공 (쯔궁)시는 설립되었고, 국공내전 이후 네이장 관할에 속하던 룽현은 1979년 쯔궁 관할에 놓였다. 여담으로 룽현은 명대부터 같은 지명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되는 중국 도시들 중 하나이다.
3. 갤러리[편집]
신해혁명 시기에 세워진 룽현군정부 (荣县军政府)
[롱현 대불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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