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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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ean_Corll.jpg
이름
딘 코를(Dean Corll)
출생
1939년 12월 24일
사망
1973년 8월 8일
신체
180cm, 86kg
범죄유형
연쇄살인, 강간살인

1. 소개
2. 일생
3. 본격적인 범행
4. 코를의 최후
5. 그 후
6. 신원미상 피해자
7. 미디어



1. 소개[편집]


미국연쇄살인범. Candy Man, Pied Piper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최소 28명의 사람들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간, 고문을 동반한 살인이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10대 남성들이었으며, 본격적인 범행은 1970년~1973년 사이이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


2. 일생[편집]


딘 코를은 1939년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시의 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7살일 때 이혼하였다. 어릴 때 성격이 내성적이었다고 하며,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는 4년 후 재혼하였으나, 얼마 못 가 또 다시 이혼하였다. 그리 순탄한 가정 속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괜찮은 고등학교까지 입학해 성적도 나쁘지 않게 받는 등 크게 문제되는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195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인디애나 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사탕 판매업을 하다 1964년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하였다.[1] 루이지애나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그 후 텍사스에 있는 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은 후 군생활을 하다 군생활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그는 생계를 이유로 상부에 의가사 제대를 끈질기게 신청했다. 결국 의가사 제대가 승인되어 1965년 제대하게 된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제대하고 난 후 자신의 동기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인 것 같다고 커밍아웃하였다고 한다.

제대 후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사탕 판매업을 재개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주 공짜 사탕을 주었기 때문에 캔디맨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사업을 하면서 그는 데이비드 오웬 브룩스(1955년생으로 당시 12세)를 불러 같이 사업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브룩스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빌려주거나 공짜로 주면서 친밀도를 쌓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공짜로 빌려주지 않고 대신 자신에게 펠라치오를 해달라고 요구하고 돈이 급했던 브룩스는 이에 응한다. 이렇게 성적 행위를 하면서 브룩스는 코를의 집까지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서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이 정도에서 끝났으면 그냥 사탕업을 영위하는 한 소아성애 동성애자의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3. 본격적인 범행[편집]


브룩스는 코를이 남자 아이 둘을 강간하고 있는 걸 보게 됐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코를은 이 당시에도 재미 좀 보고 있는 중이라며 능청을 떨었다고 한다. 그후로 코를은 태연하게 브룩스에게 경찰에게 신고를 안 하는 대가로 자동차를 선물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브룩스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 브룩스를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봤는지 브룩스에게 제안을 하였다. 범행 대상인 아이를 집으로 끌고올 때마다 20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어이없게도 브룩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연쇄살인을 돕는 역할이라는 걸 처음부터 인지하고 가담한 건 아니었다는 게 브룩스의 주장이다. 나중에 하다 보니까 거기까지 가게 됐고, 게다가 어떤 살해수법으로 어떻게 죽이는지 구체적인 건 본인도 몰랐다고 한다.

브룩스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친구들까지 유인했다. 이 과정에서 헨리라는 공범도 딘이 생각을 바꿔 금전을 주겠다는 미끼로 추가로 범행에 가담케 하였다. 본래 엘머 웨인 헨리 역시 코를의 범행 대상이었으나 헨리가 또래 아이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공범으로 포섭하였다. 1956년생인 헨리 역시 브룩스와 동일하게 아이들을 꾀어올 때마다 200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코를의 제안에 응하고 브룩스와 같이 공범이 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오갈데 없는 가난한 10대 청소년들이었으며 브룩스, 헨리는 자신들의 친구들을 코를에게 팔아먹기까지 했다. 코를은 기존에 사탕을 무료로 나눠 주어 얻은 별명인 캔디맨 명성을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공짜 사탕을 주겠다고 하거나, 피해자들과 또래 뻘 정도의 나이인 공범 두 명을 이용하여 집에서 파티를 벌인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유인하였다. 대부분은 이런 방식이었으나 간혹 피해자가 강력히 저항하면 강제로라도 끌고 오기도 했었다.

끌려온 아이들은 코를에게 넘겨진 뒤 나체가 된 채 수갑을 채우거나 벽에 내걸린 뒤 온갖 가학적인 성고문을 당했다. 그러다 흥미가 떨어지면 피해자를 총으로 쏴죽이거나 목을 졸라 죽인 뒤 다른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등 이러한 방법으로 희생된 아이들은 최소 28명에 이른다. 시체들은 대부분 야산에 묻어서 은닉하였다.

한편 휴스턴시에서는 계속해서 10대 남자아이들이 실종된다는 제보를 받고 있었지만 경찰은 이를 누군가의 조직적인 범행이 아닌 단순 가출로 보았기 때문에 관련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존 웨인 게이시, 데니스 닐슨 사건도 마찬가지로, 20세기에는 남성들을 유괴해 성폭행 뒤 살해한다는 범죄가 다소 생소한 시기였기도 했다. 심지어 이후 90년대까지 미국 경찰은 제프리 다머 사건에서 도망쳐 나온 피해자를 범인에게 돌려보내주는 짓을 하기도 했다.

어떤 어린 소년은 딘의 집에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엄마!" 라고 불렀지만 곧바로 딘이 눈치채 전화가 끊겼고, 이후 이 소년은 살해당했다. 부모는 이를 수상히 여겨 경찰에게 알렸지만 경찰은 그 당시에도 아이들의 장난이라 여기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4. 코를의 최후[편집]


그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휴스턴에서 범행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1973년 8월 8일 공범인 헨리는 자신의 여자친구 론다 윌리엄스를 코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여자친구 아버지가 술주정으로 폭력을 일삼아 이를 잠시 피하기 위해 코를의 집에 데려갔던 것. 코를과 상의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당시 코를의 집에는 브룩스는 없었고 브룩스가 꾀어온 피해자들이 있었다. 코를은 자신의 집에 여자가 왔다는 사실에 굉장히 불쾌해하며 헨리에게 화를 내지만 헨리가 정황을 설명하면서 코를을 설득하였고 코를도 겉으로 수긍하면서 술과 마약을 하며 새벽 내내 지새우다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 헨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깨어났을 때 그의 몸은 결박되어 있었다. 코를은 헨리가 자신의 집에 여자를 데려왔다는 점에 매우 분노하여 그들을 결박시켰던 것. 자신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헨리에게 코를은 자신이 티모시 커리라고 하는 다른 남자 아이를 강간하고 죽일 테니 헨리 역시 자신의 여자친구를 강간하고 죽이면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겠다고 약속하며 헨리는 풀어났지만 자신의 여자친구를 죽이기 싫었던 헨리는 이를 망설이다 결국 코를이 방심을 한 틈을 타 그의 권총을 훔쳐 코를을 쏴 죽인다.

그 이후, 헨리는 인생이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경찰에 자수를 하였고 결국 이 추악한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다. 브룩스 역시 헨리의 진술로 체포되었고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울면서 경찰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5. 그 후[편집]


파일:딘코를따까리.jpg

현장검증 중인 헨리와 브룩스. 상의를 벗은 소년이 헨리, 안경을 쓴 소년이 브룩스다.

휴스턴 경찰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사건 초기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실종됐다는 제보에 단순한 가출일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실상은 뒤에서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가 코를을 쏘고 자수를 하지 않았다면 또다른 피해자가 생길 지 모를 일이었다.

사건 현장은 매우 처참했다. 대부분의 시신들은 산속에 묻어두었다. 이를 파헤쳐보니 시신들은 온갖 가학 행위를 짐작케해주는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음모가 뽑힌 흔적, 유리를 요도 속으로 집어 넣은 흔적, 생식기를 칼로 자른 흔적 등 시신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시체는 총 28구가 발견되었다. 그 외 헨리는 이 외에도 3구의 시체가 더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헨리와 브룩스가 자백한 내용을 기반으로 밝혀진 것만 이 정도인데 조사와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코를이 범행과정에서 이 둘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고, 더욱이 헨리와 브룩스 모두 코를이 범행 중간에 범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유인책으로 자신들을 끌어들였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많은 피해자가 더 잔혹하게 살해됐을 것이 확실시된다. 증언을 받던 도중에 브룩스가 헨리는 살인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였다면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였다. 문제는 딘 코를이 사망하는 바람에 정확한 혐의도, 남은 시신도 오리무중이 되어버린 것.

헨리와 브룩스는 결국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헨리는 6건의 살인죄를 도왔으나 자수한 점을 참작해 99년형[2], 브룩스는 1건의 살인죄를 도운 혐의로 가석방 불가 종신형을 받았고 2010년대 초 미국 대법원이 미성년자에게 가석방없는 종신형은 부당하다고 판결하여 가석방 가능 종신형으로 감형된 뒤 2021년 현재도 교도소서 복역중에 있다.

유죄로 인정된 범행은 많지 않으나 실제로는 증거가 부족하다뿐 둘 다 사실상 코를의 범행 중 그들이 포섭된 뒤 이뤄진 살인 모두를 도운 공범으로 간주되고 있어 범행당시 미성년자고 죄를 뉘우치고 있다 해도 죄질이 너무 나쁘고 피해자 가족들이 사회 복귀를 반대하는 점을 들어 일정 기간마다 돌아오는 가석방 신청이 모두 기각되고 있으며, 교도소에서 생을 마칠 가능성이 높다. 2020년 5월 24일, 브룩스는 코로나19와 그 외 합병증 및 예전부터 앓았던 병들로 인해 교도소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헨리는 지금도 교도소에서 조용히 복역하고 있다.

마인드헌터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었으며, 헨리를 연기하는 배우가 작중 프로파일러들의 인터뷰 대상으로써 출연하였으며, 프로파일러의 다소 민감한 질문들에 불쾌해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성적인 관계가 있었냐와 같은 직접적인 질문은 아니고 헨리가 본인 범죄를 부인하면서 딘에게 피해자를 상납하면서 붙어있고 딘을 존경하는 걸 갖고 파트너 관계에 대해 질문한것이다. 헨리 웨인이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질문을 넘겨짚으면서 부정한 것이고. 애초에 작품 내에서 언급된 건 동성애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헨리 웨인의 뻔뻔한 모습, 범행 후 범죄를 부인하는 유형들에 대해 나오는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2017년 독립영화 'In a Madman's World' 에서는 헨리와 브룩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암시되긴 한다. 실제로도 딘 코를과 공범들이 그런 관계였는지는 불명. 물론 브룩스가 어린 시절 코를의 회유에 못 이겨 성적 행위를 하긴 했었지만 이미 성인이 되고 나서는 두 명 다 여자친구도 있었던 터라. 설령 동성애 관계였다 해도 누가 봐도 딘에게 종속된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이는 아니다.


6. 신원미상 피해자[편집]


파일:deancorllunknownvictim.jpg

그렇게 사건이 종결된지 39년이 지난 해, 이 사건이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된다. 2012년 헨리의 소지품에서 한 사진이 발견되었다.[3] 금발을 한 남자 아이가 코를의 집에서 수갑을 찬 채 결박당해 있으며, 옆에는 코를이 피해자를 고문하는데 쓰였던 각종 연장 도구가 보이는 사진이다. 이 남자 아이는 경찰이 이제까지 조사했던 피해자 신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해자로 추정되었고 이 아이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헨리, 브룩스를 불러내 사진을 보여주었으나, 정작 그들도 코를의 범행으로 살해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진 속의 아이가 누구인지는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4] 결국 사진 속 남자 아이의 이름은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채 미상으로 남았는데, 딘 코를의 단독 범행으로 살해된 걸로 추정된다. 범인인 코를이 피살됐고 발견된 시신조차 헨리와 브룩스가 매장위치를 알고 있던 피살자만 발견이 가능했던 것이어서 이 소년은 지금도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이 소년에 대한 정보가 작성된 위키[5]


7. 미디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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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미국은 복무기간 18개월의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2] 다만 코를을 죽인 부분에 대해서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이 부분은 무죄가 인정되었다.[3] 그가 체포되고 난 후에 이 소지품은 가족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경찰에게 밝혀지지 않았다가, 가족들이 그의 소지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제보한 것이다.[4] 이들이 연쇄살인을 함께 시작한 게 아니라 중간에 포섭됐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5] 존 도와 제인 도는 미국에서 신원미상의 피해자에 대해 붙이는 일종의 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