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 히데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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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2. 정치인 생활
4. 태평양 전쟁과 전시 총리로서의 행적
5. 총리직 사임
8. 사형 집행


1. 초기[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oung_Tojo.jpg

청년기 시절의 도조

도쿄에서 육군 장교 도조 히데노리[1]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대를 이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군인 집안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독일 유학 시절 야마가타 아리토모 전 총리에게 조슈벌만 등용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면전에서 따지는 짓을 했다가 조슈벌에게 찍혔고,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으나 상관의 명령이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거부하여 예편되었다. 이때 야마가타가 중장으로 승진시켜 3일간 별 세 개를 달게 한 다음에 예편시키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그때가 도조 히데키 임관 직후였다.

부친과는 기질이 꽤 달랐는지, 공부를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어릴 적엔 골목대장이였으며 겁도 없이 상급생 20명에게 덤비고 몰매를 얻어맞은 후에야 싸움을 접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육군에서의 출세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육군대학교 입학에 있어서도 여러번 고배를 마셨다. 육군 장교가 출세를 하려면 육군사관학교 졸업후 일종의 고급 지휘관 과정인 육군대학교에 들어가야 했고, 이곳 졸업 성적이 영원히 간다고 할 정도로 초급 장교 시절의 교육 성적이 이후의 보직까지 결정하는 비효율적인 엘리트주의가 만연했던 시절이다. 육군대학교는 초급장교들을 대상으로 여러 번 입학 시험을 치를 기회를 주었으며, 이곳 입학이 출세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에 경쟁이 극심했고 한 번에 들어가기도 무지 어려웠다. 육군대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아예 장성급으로 진급할 수 없었다. 도조는 이 육대 입학 시험을 앞두고서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합격에 필요한 학습 시간을 계산하고, 하루에 공부 시간을 정하고, 시간을 쪼개어 시험을 준비했음에도 3수 끝에 겨우 들어갔다. 입학 후에도, 아버지가 육군대학교 1기 수석 졸업생 출신임에 반해 도조 히데키는 성적이 매우 나빴다. 육대 성적이 나쁘면 이후 출세에도 악영향이 미친다.

육대 졸업 후, 나름대로 출세하여 관동군 헌병사령관, 참모장, 일본 육군 차관을 역임했는데, 다만 육대 성적이 높은 엘리트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한직을 전전했다. 황도파에게 찍혀서 이지만, 상관에게 아부를 못하는 융통성 없는 성격인 것도 한 몫 했다. 실제로 육대 출신이면 갈 까닭이 없는 한직인 헌병사령관도 했다. 비록 육군 헌병이 큰 권력을 행사한 조직이지만, 그와 별개로 사령관은 별 것 없는 자리였고, 사실상 이 자리를 주면 좋은 말할 때 나가라는 뜻이었다.

물론 도조는 때를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그냥 역임. 이후에는 당시 군부의 최고 유력 파벌이던 통제파의 주요인물이 되었는데, 통제파의 수장이였던 나가타 데쓰잔이 황도파 장교 아이자와 사부로에게 암살당하자 그 뒤를 이어 도조가 통제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가 관동군에 헌병사령관으로 있었을 때 그 악명 높은 731 부대가 생체실험도 했고 프로파간다라는 말도 있지만 10만의 반일분자를 재직시 1만으로 줄였다는 평도 얻을 정도였다. 만주에 부임했을 때 딸들에게 "몸값도 없고 굴복할 생각도 없으니 비적이 납치해도 구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한다. 그래서 도조에게 '면도기'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도조가 일을 빠르게 처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2. 정치인 생활[편집]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2부 - 쇼와(昭和) 격동의 총리들中[2][3]

1936년에는 대립 관계였던 황도파가 2.26 사건을 일으키자 도조가 이끄는 통제파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황도파의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결국 황도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통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게 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확대 되었다. 이후로 내각은 각료의 인선이나 정책에 대해서까지 군부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고, 군부는 내각을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4]를 부활시키고 군의 정치 개입을 용인하는 등 '국방 국가' 구상을 정강으로 내세워 군부의 권력을 끝없이 강화시켰다. 또한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던 나치 독일독·일 방공협정을 체결하고 군사비 약 14억엔을 포함한 방대한 예산을 편성하는 등 정치체제의 군국주의화를 가속화시켜 나갔다.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으로 재직하며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2개 여단을 무단으로 파견하여 사태 확대를 꾀했다. 1937년 베이핑-톈진 전투로 베이핑이 함락되자 도조 병단이라 불리는 차하얼 병단을 조직하여 베이핑 탈환전에 투입, 탕언보가 지휘하는 13군을 격파하고 차하얼성과 수원성을 장악하였다. 1940년에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된 후에는 외무 대신과 협력하여 일본 제국이 추축국에 가입하는 일에도 한몫 했다. 그 후에는 태평양 전쟁을 기획하고는 그 기획안을 육군 수뇌부에게 공개하여 열렬한 지지를 얻고, 1941년 10월에는 대미 개전을 반대하던 고노에 후미마로를 압박하다가 결국 고노에 내각을 무너뜨렸으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을 주둔시켜 영국미국을 상대로 슬슬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랫동안 끝나지 않고 지속되자, 도조는 "이 상황에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무리하게 전선을 늘리는 것은 위험하다."며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중일전쟁이 마무리 되고 어느정도 전후 수습이 된 후'로 미루겠다는 뜻을 밝힌다. 하지만 이미 도조가 공개한 태평양 전쟁 기획안에 취향저격 당한 육군 강경파는 당장 전쟁을 시작하자며 난리를 쳤고, 우습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인 도조가 태평양 전쟁 개전에 반대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3. 내각총리대신 취임[편집]



파일:4QmKTki.jpg

40대 총리 취임 후

성의는 화평을 희구하신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외교 교섭을 보좌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1년 9월 6일, 육군성 군무과, 군사과 연석회의에서의 발언.


그러던 와중에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심각하게 폭주하는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은 황실의 큰어른이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전하 정도밖에 없다."며 나루히코를 새로운 총리 후보로 추천했고, 도조 역시 당장은 대미 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이 된 만큼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최측근이였던 기도 고이치는 "지금 육군은 황실의 큰 어른이든 뭐든 간에 자신들 뜻에 따라주지 않으면 무시해버리고도 남을 놈들이다. 지금 당장 육군을 통제하고 대미 개전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군부의 수장인 도조 히데키뿐이다."라며 도조를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이 말을 들은 쇼와 덴노는 고민 끝에 "이른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로군."이라며 도조를 총리로 임명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 전쟁의 기획자였던 도조는 미국과의 외교적 갈등을 풀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내각의 총리가 되었고, 일단은 교섭을 통해 미국과의 갈등을 해소해보려 노력했으나 미일 양국 간의 입장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도조의 이러한 방침 변경에 큰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낀 육군은 그를 따르기는 커녕 도조 내각마저 압박하며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도조는 결국 쇼와 덴노와 기도 고이치를 찾아가서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이 상황에서 계속 전쟁을 피하려다가는 여론이 분개하고 육군 강경파가 폭발하여 쿠데타가 일어나 황국은 결국 대규모 내전 상태가 되어 자멸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즉, 도조는 육군 강경파의 뜻대로 당장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며 천황을 거듭 설득했고, 더이상 육군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한 쇼와 덴노도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마침내 도조는 진주만 공습을 명령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저널리스트 호사카 마사야스가 도조의 아내와 한 인터뷰에 따르면, 진주만 공습 당일날 도조는 황거를 향해 절을 올리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아내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리고 전쟁을 해선 안된다는 히로히토의 뜻을 따르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4. 태평양 전쟁과 전시 총리로서의 행적[편집]


1억의 일본인들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느니라.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게 선전포고 중


육군 강경파의 폭주 때문에 사실상 억지로 일으킨 전쟁이였으나, 놀랍게도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연속으로 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도조도 "내가 미군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괜한 걱정을 했었다."며 모든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실망감을 느끼던 육군 역시 다시 도조를 적극 지지하며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한편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수많은 관직을 집어먹으며 더욱 권력을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문부, 상공, 군수대신까지 겸임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색이 점점 짙어져가며 도조가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 정계는 물론이고 해군 측에서도 도조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전황이 막장으로 치닫자 결국엔 통수부, 즉 육군의 참모총장과 해군의 군령부장이 ‘전시 통수권 독립’을 명목으로 중요한 군사 정보를 도조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도조는 1944년 2월 21일 ‘국무와 통수의 일원화’를 명목으로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본인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이 무렵의 도조는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교육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행정안전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인 셈. 정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먹은 것이다.

사실 일본은 차관이 실질적 실무를 다 하는 내각제[5]라 이렇게 겸직해도 일단 겉모양은 그럭저럭 굴러갔다지만, 대부분의 관직은 1년도 안 가서 물러났다.[6]

이렇게 통수권 독립의 관례를 깨고 행정수반인 총리대신, 육군의 수장인 육군대신, 육군 군령의 장인 참모총장 3직을 장악해버린 도조는 정계와 해군으로부터 "육군이 완전히 도조의 사병 집단이 되어버렸다", "천황의 대권마저 대놓고 침해하는, 그야말로 '도조 막부'가 따로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 헌법과 정치/군사 제도의 구조상 전시 내각을 총리의 의도대로 끌고 가려면 주요 국무대신직을 총리가 얻어야만 했다. 국무대신이 단 1명이라도 정책에 딱지를 놓고 파업하면 각내 불일치로 내각 전체가 깡그리 물러나야 했으니. 당시 일본의 체제에서는 총리의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조는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상술했듯이 도조는 총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군부의 수장이였다. 그리고 군부는 당시 일본에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 집단이였기 때문에 군부의 최고 권력자는 곧 일본의 최고 권력자나 다름 없었다. 애초에 군부는 내각의 통제를 아예 거부하며 오히려 틈틈이 무력으로 내각을 압박하고 있었고, 통수권자인 천황에게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이 또한 천황이 군부의 뜻대로 나라가 돌아가게끔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을 행사해주는 대가로 군부는 천황을 무력으로 압박하지 않고 충성한다는 암묵의 룰이였기 때문에 결국 천황도 군부의 눈치를 보며 행동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군부와 내각을 모두 점령한 도조는 이미 절대적인 권력자였고, 심지어는 국무와 통수의 일치 및 강화를 주장하며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도조가 전쟁을 이끌면서 점점 그의 매우 실망스러운 군사적 능력이 끝없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여기에 그의 답 없는 인재 등용 능력까지 더해져서 온갖 무능한 바보들과 미치광이들이 군에서 높은 자리를 해먹는 바람에 일본군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희대의 막장 집단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7]

일본군을 대전말 막장 집단으로 만든 데는 도조도 단단히 한 몫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41년 1월 8일 육군 대신이었던 도조가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군기가 흐트러지고 있다며 발령한 훈유(訓諭)인 '전진훈'. 전진훈에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고 항복 금지를 명문화하여 쐐기를 박아놓는 바람에, 태평양 전쟁에서 무수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옥쇄(개죽음) 상황에 몰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태평양 전쟁이 그야말로 개막장으로 치닫자 일본 정계에서도 도조에게 비난 여론이 급격히 늘어났다. 언론 통제로 민간과 군에서는 나라 돌아가는 자세한 꼴을 몰라 대놓고 비난은 못했는데, 일본의 정보 통제가 워낙 철저해서 정부의 고위 관계자조차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몇 달이 지나서야 알 정도였다. 심지어 도조 자신도 처음엔 제대로 몰랐다. 해군 군령부에서 제대로 정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조는 해군의 보고를 그대로 천황에게 올렸는데 천황이 자신과 다른 수치로 알고 있었던 것을 듣고는 그제서야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를 알았을 정도였다.

사실 통수권자인 쇼와 덴노 말고는 전체적인 전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인물이 없었다. 비록 도조가 군부의 수장이었다고는 하나 엄연히 육군 출신이였기 때문에 해군 측에서는 당연히 도조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도조에게 전시 상황을 보고할 때에도 중요한 내용은 빠뜨리거나 아예 왜곡해서 보고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반대로 육군의 전시 상황에 관해서는 도조가 쇼와 덴노보다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 당시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상 다나카 장군이 선박 지원을 요청[8]했지만 도조가 거부하자 욕설을 퍼부어 경질되기도 했다.

무타구치 렌야의 희대의 팀킬 만행인 임팔 작전을 하는 것에도 이 인간이 기여했다. 다만 이 부분은 결재받을 때 우물쭈물 준비도 안한 걸 그냥 넘어간 아랫사람 책임도 있다. 거꾸로 도조는 임팔 작전시 위험사항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실제로 도조는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현실성 있는 작전이냐?",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하겠느냐?", "버마 방어에 공백이 없겠느냐?",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 수 있느냐?",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 때 막을 수 있냐?" 등을 물어봤다. 그래봐야 어차피 결재했지만.[9] 자세한 것은 임팔 작전 참조.

다만 아주 뻘짓만 한 건 아닌지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항공기들에 방탄장갑과 연료 자동 봉입장치를 장착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갈수록 여러 삽질과 문제점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도조 히데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도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장성은 요직에서 해임시켜 전사할 확률이 높은 최전선으로 보내거나 예비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언론인, 지식인, 관료 등은 나이에 상관없이 ‘징벌소집’하여 이등병으로 전선으로 보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정적이나 비판 세력에게 강권적인 통치를 자행한 것이다. 특히 헌병사령관이었던 경험을 살려 본래 군인 · 군속에 대한 군사경찰을 주 임무로 하는 헌병을 자의적으로 국회의원 등 정치가를 비롯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도 광범위하게 활용하며 공포정치, 이른바 ‘헌병정치’를 실시했다.

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히틀러처럼 정권을 잡는 정치적 능력만큼은 우수한 것처럼 보인다. 일단 주류 인맥에서 찍혀서 오늘 내일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군부의 수장이자 독재자가 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5. 총리직 사임[편집]


이미 전황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던 1944년 7월 일본 본토 폭격을 할 수 있게 된 사이판 전투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스스로 총리직을 사임했다. 이것도 도조가 만주국 이래로의 맹우인 기시 노부스케를 장관직에서 해임하려고 시도했으나 기시가 "나 자르려면 네놈도 절대 국방선 붕괴의 책임을 지고 같이 물러나라!" 면서 강경하게 고집을 피운 덕분에 같이 사퇴했다. 여담으로 이때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어차피 도조는 전후에 전범으로 사형당해야 하는데, 불쌍하게 도조의 후임을 맡아서 죽을 사람을 늘리지 말고 도조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 총리를 맡게 하던가, 아니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황족 내각을 수립하고 미국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그러나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도조의 어마어마한 권력은 건재했으며, 사퇴 직후에도 고이소 구니아키를 대놓고 꼭두각시 총리로 내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게다가 고이소가 원로 중신들에게 탄핵당한 후에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육군 대장 하타 슌로쿠를 차기 총리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고는 스즈키 간타로를 추천하는 해군과 문관들을 "육군이 아닌 사람이 총리가 되어버리면 국토 방위의 주력군인 육군이 내각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곤란해질 것"이라며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미 도조의 위험성을 알아버린 쇼와 덴노는 스즈키를 총리로 임명했고, 도조와 육군은 정말로 내각의 지시를 거부한 채 따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후에 쇼와 덴노, 스즈키 총리, 그리고 중신 대부분이 항복을 주장한 끝에 결국 태평양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일본 시민들은 뻔뻔하게 살아있는 도조 히데키에게 "너 때문에 자식이 죽었다. 할복해서 국민에게 사죄하라", "빨리 자결하라"는 수만 장의 편지가 집으로 왔지만 무시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시민들로부터 돌로 맞아서 시체가 거꾸로 매달리는 사진이 보도됐을 때에는 겁을 잔뜩 집어먹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6. 자살 미수 사건[편집]



파일:Tojo_suicide.jpg

자살 시도 후 치료를 받는 도조
패전 후 집안에 칩거하다가 9월 11일 미 육군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에 저항하며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미군 병원에 옮겨져 미 육군 의료진의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심지어 혈액형이 동일한 미 육군 병사가 헌혈을 해 줘서 살아 남았다. 자살 미수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전진훈도 못 따른다고 일본인들의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받았다.

자살시도한 도조를 응접실에서 치료했다고 한다.아사히 신문 출판국 기자 하세가와 유키오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도조는 이때 무슨 말을 했었고, 추후 문예춘추 1956년 8월호 '도조 할복 목격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한 방에 죽고 싶었다. 시간이 걸린 것이 유감이다. 대동아전쟁은 정당한 싸움이였다. 국민과 대동아민족에게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법정에 선 전승자 앞에서 재판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정당한 비판을 기다리겠다. 할복을 생각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실수할 수가 있다.","천황폐하 만세. 몸은 비록 죽더라도 호국의 귀신이 되어 최후를 마치고 싶다."같은 얘기를 했다고 한다.[11]

일본인들의 냉담한 반응, 그리고 일본 정부조차 자기를 무시하는 와중에 미군의 극진한 치료로[12] 목숨을 건진 도조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서 새삼 감탄하면서 일본과 미국은 오해를 털어버리고 어떻게든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했던 것이 맞았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7. 극동국제군사재판[편집]


용태가 회복된 후 수용소로 옮겨졌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 전쟁범죄자로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데, 도조는 사형 선고를 받자마자 최후까지 군인답게 죽겠다며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을 받기를 희망했으나 연합군은 "너 같은 전쟁범죄자에게는 교수형이 더 어울린다"[13]며 거절하고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가모 구치소에서는 밤이 오면 천성적인 꼼꼼함으로 그 날 일어난 일들을 노트에 적었다고 한다.딸들에게 역경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도조 히데키가 증오의 대상인 시대에 딸들이 고통을 겪고 있지 않았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없이 쓸쓸하게 지내는구나 내 자식들이여
어머니와 함께 다시 올 봄을 기다리고 있겠지
이 세상을 잠시 잠들었다 가는 곳이라 생각하지만 부모와 자식이 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아버지 히데노리에 대한 시도 있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몇 년이 지났는가
지하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겠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방황하면서
어떠시냐고 물어도 아무런 대답이 없네[14]

1948년 봄이 지나면서부터 종종 불당에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6월이 지나면서부터 불교 서적을 차입해달라 했고, '쇼신게 강찬'이나 하나야마의 저작 '백도에서 살아가며'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15]

11월 20일에 도조와 가족의 특별면회가 허용됐다고 한다.세상과 이별하는 노래를 남기고 싶다며 다음 네 수를 낭독했다고 한다.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 어찌 변할 수 있으랴
천대를 지키리라 넋이 되어서라도
때를 만나니 흩어지는구나 요시노의 산벚꽃
엔분릉[16] 아래 맺힌 슬픔을 견디며
계속될 것을 빋으며 흩어지나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구나
국민의 아픈 마음 헤아리면서
끝없이 거니는 나의 상념이여[17]

1948년 12월 10일 오전 9시 30분, 다섯번째 면담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집 묘비에는 <홀로 길게 드리운 서리 내린 밤의 그림자>라는 시가 있다.증조부 도조 히데마사가 지은 시인데, 할아버지도 소중히 여겼다고 들었다."
정확히 무슨 의민지 말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며, 죽음(사형)이 다가오는 그 시기에, 인생의 대부분이 그림자와 같지 않았겠느냐 추측한다고 한다.서리 내린 밤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자신의 신체를 몇배고 확대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허상이며, 커지면 커질수록 허상만 커지지 않겠냔 추측만 할 뿐이라고 한다.[18]


8. 사형 집행[편집]


도조는 1948년 12월 23일 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사망했다. 처형되기 직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국가신토에서 불교로 개종 한 이후에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19]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도조의 시신은 나머지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화장되어 7명의 유골은 태평양 먼 바다에 버려졌으나, 화장지 등 남은 유골의 일부를 일본 한복판에 안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야스쿠니보다 악명 높은 순국7사묘 참고.

2021년 6월 미국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더 자세한 내용이 알려졌다. 7명의 유골은 요코하마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고 기록 됐으며 해당 문서는 1948년 12월 22일 도조의 교수형 처형이 집행된 직후 공중에서 바다로 뿌려지기 까지의 이동 과정과 시간 등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당시 육군 대령 루터 프리어슨에 의해 작성되었다.

[1]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출생으로 육군 중장을 지냈다. 이쪽은 아들과 달리 군인으로서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으며, 전술 연구 선구자로서 당연하게도 무식한 착검돌격을 반대했다. 히데노리는 당시 일본군의 출세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던 보수교육기관인 육군대학교 1기의 수석 졸업자인데, 육군에서 조슈번 계열, 해군에서 사쓰마번 계열이 요직을 독점하고 서로 밀고 당겨주던 군내 번벌 정치의 전성기에 非번벌 인사가 육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니 당연히 조슈번 일파에게 갖은 견제를 받았고 결국 중장으로 전역했다. 그 아들 히데키는 장군이 되어서는 조슈계만 보면 까버리며 복수를 했다.[2] 2019년 3월 9일 방송[3] 쇼와(昭和) 격동의 시대, 목숨을 걸고 일본의 방향타를 잡은 총리들의 고난과 갈등의 이야기를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4명의 총리를 통해서 바라본 다큐멘터리[4] 육군대신, 해군대신의 보직 자격을 군 현역에게만 부여하는 제도[5] 대통령제는 원칙적으로 국무위원에 국회의원을 겸직시킬 수가 없어 행정각부가 엽관제 정치 조직보다는 국가 행정의 실무기관으로 간주되어 테크노크라트 출신 장관의 비율이 높다. 그러니 이들은 정치색보다는 실무에 밝아 장관이 차관보다 파워가 세서 직접 행정각부를 지휘한다. 그러나 내각제인 영국과 일본은 국무위원의 국회의원 겸직이 가능하여 행정각부도 실무기관이라기보다는 엽관제의 대상으로서 정치 조직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정치색이 짙고 실무에는 어두운 국회의원이 낙하산으로 장관 자리에 꽂아지는 시스템이라 장관은 사무차관에게 대부분의 실무를 위임한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제 국가임에도 예외적으로 국무위원의 국회의원 겸직이 가능하며, 현역 의원이 아니더라도 자기 편의 정치인을 국무위원으로 앉혀 행정각부를 실무기관이 아닌 엽관제처럼 굴리는데 그러면서도 정치인 출신 장관들의 파워가 굉장히 세서 정치인 출신 장관들이 (설령 실무에 어둡더라도) 직접 각부를 지휘하여 내각제와 대통령제의 단물만 골라서 빼먹는 예외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6] 도조가 육군대신이던 시절 육군차관은 기무라 헤이타로도미나가 교지였다. 기무라는 그렇다 쳐도 기본적인 업무소양도 없는 무능력자인 도미나가가 실무를 했으니 도대체 육군성의 업무가 어떻게 굴러갔을지 궁금할 지경.[7] 도조의 장남은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만주의 풍만발전소로 갔고, 차남은 미쓰비시 공업에서 자동차 사장을 지냈으며, 3남은 육사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못하고 후에 항공자위대에서 소장 계급까지 진급했다.[8] 해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육군은 해군과 별개로 수송선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 규모가 해군 통제하의 선단보다 작아서, 상당 부분은 해군에 위탁하긴 했다.[9] 임팔 작전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전부 문제가 있었던 상황이었다.[10] 책임감없는 외교와 국정으로 일본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밀어넣은 고노에였지만, 태평양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는 내 말 안듣더니 곧 망하게 생겼다고 고소해하다가 열받은 군부로부터 비국민으로 몰리는(...) 판이었다. 전후에 그가 자살한 이유 중 하나도 일은 개판으로 했을지언정 자신은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는데 전쟁을 일으킨 군바리들과 같이 심판받아야 함이 억울했다는 것이 컸다.[11] 정선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페이퍼로드,2012,596~598,호사카 마사야스,東條英機と天皇の時代,筑摩書房,2005[12] 당연히 미국이 극진히 치료해준 이유는 자살을 하게될 경우 일본인들에게 미치게 될 영향과 어떻게든 재판에 세워 죄를 묻고 사형시켜버리기 위함이었다.[13] 특히 미국에서 군인 출신 전범들에 대한 총살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독소전쟁소련이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것 처럼 미국태평양 전쟁에서 큰 희생을 치르며 지옥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14] 정선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페이퍼로드,2012,605~607,호사카 마사야스,東條英機と天皇の時代,筑摩書房,2005[15] 정선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페이퍼로드,2012,651~652,호사카 마사야스,東條英機と天皇の時代,筑摩書房,2005[16] 엔분은 일본 남북조 시대 여호 중 하나라고 하며, 1356~1360년에 이르는 기간[17] 정선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페이퍼로드,2012,666~667,호사카 마사야스,東條英機と天皇の時代,筑摩書房,2005[18] 정선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페이퍼로드,2012,27~29,호사카 마사야스,東條英機と天皇の時代,筑摩書房,2005[19] 彌陀, 부처님 곁. 나무아미타불미타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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