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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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도미티아누스 암살.jpg
<암살자들에게 공격당하는 도미티아누스>, 라자로 발디(Lazzaro Baldi) 작.

1. 개요
2. 사료
3. 배경
4. 암살 진행 과정
5. 네르바 황제의 집권



1. 개요[편집]


서기 96년 9월 18일, 플라비우스 왕조의 제3대 로마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팔라티노 황궁에서 궁정에서 일하는 해방노예들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다. 30년 동안 로마 제국을 지배했던 플라비우스 왕조가 무너지고 오현제 시대의 막이 오르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2. 사료[편집]


96년에 벌어진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에 관한 현존하는 기록은 많지 않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관료로 활동했으며 그의 치세를 전반적으로 다뤘던 타키투스의 《역사》에 이 사건이 상세히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서기 3세기 경의 세베루스 왕조에서 집정관을 연이어 맡아 정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마리우스 막시무스네르바 황제에서 엘라가발루스 황제에 이르기까지 12명의 황제 전기인 《카이사리에스》를 서술했지만 역시 현존하지 않으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부터 엘라가발루스 황제까지의 치세를 다룰 때 마리우스 막시무스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 확인되지만 그 이전의 시기에 대한 막시무스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4세기의 역사가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네르바 황제의 즉위부터 율리아누스 황제의 치세때까지의 기록을 서술한 《연대기》를 집필했다고 전해지나, 그의 저술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통치 기간부터 전해질 뿐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에 대한 주요 문헌 기록으로는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De vita Caesarum)과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를 들 수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2세기 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때 관직을 역임하면서 정부가 보관하는 공문서들을 참고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도미티아누스 암살에 대한 가장 상세한 설명을 제공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콤모두스 황제의 치세부터 세베루스 왕조의 시대까지 관직 활동을 했던 인물로, 수에토니우스가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을 보충 설명했다. 또한 에우트로피우스의 《로마 역사 요약》(Breviarium Historiae Romanae)에도 네르바 황제의 집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들어 있으며,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카이사르의 생애》에도 암살 사건에 대한 서술이 들어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필로스트라토스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에도 도미티아누스 암살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지만 신빙성은 높지 않다.


3. 배경[편집]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서기 81년 9월 14일 형 티투스가 병사한 후 제위에 오른 이래 황권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원로원을 어느정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및 형 티투스와는 달리 황궁 내 신료들과 함께 정책을 결정한 뒤 원로원에 명령조로 통보하는 방식으로 일관했다. 이에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황제의 언동에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더해, 황궁의 관료 사회와 원로원에 지속적으로 속주민들을 수혈하면서 새로 들어온 속주민들에게 큰 역할을 부여했다. 따라서 많은 속주민들이 도미티아누스 시대 동안 귀족이나 기사계급(에퀴테스)으로 편입되었는데, 이 중에서 대부분은 그리스 출신이나 그 혈통의 동방 출신들이었다. 황제는 집정관 자리까지 여러 차례 추천해 당선시켰다. 이는 자연스레 본국 이탈리아 및 소외된 속주 태생 원로원 인사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원로원 의원들이 황제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의 고압적인 언행이었다. 그는 역대 황제들이 줄곧 썼던

"원로원 여러분"

이라는 표현을 전혀 하지 않았고, 늘 상대를 존중하는 말은 모두 생략한 뒤 사무적이고 명령조로 말했다. 또한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신을 부를 때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1]

라고 부르게 했으며, 고위 관료들이 자신과 접견하거나, 황제 자신이 이들을 대상으로 공식연회를 베푸는 공간을 황궁으로 정한 뒤 예법을 만들어 운영했다. 원로원 입회때마다 늘 개선장군의 복장을 착용하고 등장했으며, 자신이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아 사용을 허가받은 존칭과 자신의 이름을 9월과 10월에 넣어 게르마니쿠스(9월), 도미티아누스(10월)로 부르도록 일방적으로 바꿨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델라토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여러 의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한 때 도미티아누스와 원로원과의 관계가 이렇듯 악화일로로 흘러간 끝에 원로원의 사주로 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설이 학계에서 정설로 취급되었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의견이 각광받고 있다. 도미티아누스가 여러 의원을 숙청한 건 사실이지만, 황제에게 발탁되어 의원 자리를 꿰찬 이들도 여럿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 타도를 결의하고 음모를 꾸미는 건 불가능했다. 설령 그렇게 하려고 해도, 황제가 근위대의 철통 경호를 받고 감시인들을 통해 의원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상황이었기에 조기에 발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음모를 꾸민 주체는 의원들이 아니라 오히려 황제의 신임을 받은 궁중 관료와 플라비우스 황실의 일원들이었다.

왜냐하면 매사에 엄격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황제는 원로원 의원 뿐만 아니라 측근과 황실 인사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직후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정부였던 카이니스가 해방노예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상시와 달리 입맞춤을 거부하고 손등을 내미는 행동을 보이면서 이러한 성향을 대놓고 드러냈다.[2] 이후 황실 친척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맡기던 아버지와 형의 정책을 중단하고,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한 이들만 중용했다. 특히 사촌이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와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처형하거나 추방했고, 이모인 플라비아 도미티아도 추방했으며, 한번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자들은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고문해서 증거를 얻어내고, 이를 증거삼아 고발한 뒤 사형을 언도하여 처형하는 식으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특히 황제의 측근들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총애를 한 번 잃는 순간 가차없이 제거되곤 했다.

물론 궁정에서 일하는 해방노예들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숙청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들의 입지를 걱정하게 만들 사건이 벌어졌다. 서기 95년, 네로 황제의 해방노예이자 개인비서였던 에파프로티투스가 처형된 것이었다. 에파프로티투스는 제4대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 1세로부터 자유를 얻고 황제의 개인이름+성씨를 받은 인물로, 네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 '국가의 적'이 된 이후 홀로 된 네로를 끝까지 따르고 주인의

"내 목을 찔러라"

라는 마지막 명령까지 이행했다. 그런데 네로가 몰락한 지 한참이 지난 뒤 도미티아누스에게 기소되어 추방된 후 처형당한 것이었다. 에파프로티투스는 과거에 피소 음모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네로 황제에게 제출하여 수많은 이를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은 전적이 있었기에, 일반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죗값을 치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노예들 입장에서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시간이 한참 지난 일을 들먹여 죽여버리는데 자신들 역시 그리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수에토니우스는 도미티아누스 암살에 황후였던 도미티아 롱기나도 가담했다고 기술했다. 이를 긍정하는 역사가들은 도미티아누스를 아기 때부터 키웠던 유모가 도미티아누스의 유골을 화장한 뒤 조카딸인 율리아의 무덤에 매장한 사실에 주목하여, 도미티아누스가 율리아와 근친상간을 저질렀으며 도미티아 롱기나는 이를 알게 되어 암살에 가담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도미티아가 이후 재혼하지 않고

"나는 도미티아누스의 아내"

라고 말하며 수절한 점을 들어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반박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해 고고학자이자 역사가인 앤서니 비렐리(Anthony Birley)는 2013년 논문인 <하드리아누스: 안절부절 못하는 황제>에서 도미티아 롱기나가 원로원 의원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루카누스와 재혼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재반박했다.

도미티아 롱기나 황후가 황제 암살에 가담했는지의 여부는 현재까지 불확실하지만, 서기 83년 알 수 없는 이유로 황궁에서 추방되었다가 이듬해인 84년에 복귀했으며 남자 후계자를 끝내 낳지 못했고, 도미티아누스가 첩을 대놓고 들였던 것으로 볼 때 부부 관계가 그다지 원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암살 과정이 상당히 치밀했고, 궁정에서 일하는 이들이 대거 가담했던 것으로 미뤄 볼 때 그녀가 암살에 적극 개입하진 않았더라도 방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황제의 경호를 담당해야 할 근위대장 역시 암살에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했을 당시의 근위대장은 노르바누스와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였다. 네르바 황제는 집권 직후 노르바누스를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로 교체했지만 페트로니우스의 직위는 유지시켰다. 서기 97년 근위대가 도미티아누스 암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였을 때 페트로니우스도 살해당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네르바가 시종인 파르테니우스와 페트로니우스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4. 암살 진행 과정[편집]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96년 게르마니아 총독이 게르만족 출신의 점성술사이며 예언가인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를 불경죄 혐의로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다.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번개와 별자리로 점을 치다가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 9월에 제 수명을 못 채우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기에, 총독이 깜짝 놀라 체포한 후 로마로 보냈던 것이다. 도미티아누스도 총독의 보고로 이 점쟁이가 허풍쟁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차 점을 치게 했는데, 이 점쟁이가 친 게르만족과 켈트족들이 사용한 점성술과 그리스와 로마의 점성술 모두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러자 분노한 도미티아누스는 이 사람에게 직접 사형을 언도했다. 허나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의 점괘에 따르면, 황제의 죽음이 이해 9월 16일이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일단 사형 집행은 그가 예언한 날짜 이후로 무기한 중지되었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가 이 예언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이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호위를 강화하고, 궁전 복도에서 암살당한 칼리굴라의 사례를 생각하여 궁전 복도 벽 전체에 거울처럼 만든 검은 대리석 석판들을 붙여 주위를 항상 살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자신의 베게 밑에 늘 호신용 검을 두고 잤으며, 약간의 변고 조짐이 있으면 즉시 고발을 통해 의심되는 이를 붙잡아 체포하고 심문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라 여겼던 해방노예들이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서기 96년 9월 18일 오전 10시 또는 11시경, 휴식을 취하면서 수행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궁정을 책임지는 최고 관료인 쿠비쿨리오(cubiculo)를 맡은 파르테니우스가 다가와서 중요한 공문서가 왔으니 서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도미티아누스는 별다른 의심없이 수행원들을 해산시키고, 파르테니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황제가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을 때, 모든 문이 돌연 걸어 잠기더니 칼을 든 하인들인 스테파누스, 막시무스, 클로디아누스 등에게 공격당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침대에서 뛰어내리면서 배게 밑에 숨겨둔 단검을 찾았지만, 파르테니우스가 사전에 치워버렸기 때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이에 굳게 걸어잠긴 모든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라, 검을 줘라"

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도미티아누스는 탈출하지 못했고, 단검으로 무장한 스테파누스 및 다른 이들을 상대로 맨손으로 사투를 벌였다. 이때 도미티아누스가 얼마나 처절하게 저항했는지 칼에 손이 베인 상황에서 부상당한 손으로 암살자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후벼 파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테파누스 등의 암살자들에게 7번이나 칼에 찔려 다시 한번 치명상을 입고 44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사건이 발생한지 한참 지나서야 근위대가 달려왔지만 황제는 이미 살해당했고 이를 보고 경악한 근위대는 도주하는 암살자 3명을 추적하여 전부 죽였다. 파르테니우스도 범행이 들통나서 나중에 근위병들한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황제의 시신은 근위병들과 아기 때부터 키워준 유모가 수습해 화장한 뒤 조카딸인 율리아의 무덤에 재를 섞는 방법으로 매장되었다. 그 후 집권한 네르바 황제는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를 석방하고, 400,000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금을 내려줬다고 한다.


5. 네르바 황제의 집권[편집]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음모가들은 암살을 결행하기 전에 전임 집정관이자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을 역임했던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와 파브리키우스 바이엔토를 찾아가 황제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충성심을 시험받고 있다고 여기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그들은 차선책으로 네르바를 새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 그들이 당시 60세가 넘었고 신체도 허약했던 네르바를 새 황제로 옹립하기로 한 까닭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네르바는 플라비우스 왕조와 친밀한 관계였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후원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치르기 위해 시리아로 출전한 뒤 로마에 남겨진 도미티아누스 등 베스파시아누스의 가족을 돌봤다. 수에토니우스는 네르바가 어린 도미티아누스와 성관계를 가졌는데, 도미티아누스가 수동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도미티아누스를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보이지만, 도미티아누스가 네르바를 총애한 것은 분명하다. 네르바는 90년에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황제의 결정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이렇듯 플라비우스 왕조와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네르바가 황제로 오른다면 도미티아누스 암살에 동요할 친 플라비우스파 인사와 장병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를 위해 복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도미티아누스는 95년에 네르바의 친척이자 친밀한 사이였던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처형했기 때문이다. 이에 네르바는 자신 역시 그리 될 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3] 그런 그를 추대한다면, 암살자들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네르바는 집권 이후 암살자들을 처벌하긴 커녕 중용했다.

네르바가 암살 계획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암살 직후에야 자신을 황제로 추대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사실은 암살 사건이 벌어진 당일에 바로 황제로 추대되었고, 원로원 회의가 다음날 긴급 소집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는 9월 4일부터 9월 19일까지 루디 로마니(Ludi Romani)라는 정규 휴일을 두었고,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은 각자의 정원에서 쉬거나 농장에서 제배된 과일 또는 밀 등을 수확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기에, 수도 로마에 남은 원로원 의원은 지극히 소규모였을 것이다. 암살자들은 바로 이 점을 노려 암살 거행일을 9월 18일로 잡았을 것이다. 즉, 의원들 중에는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발탁된 이들이 다수 존재하니, 그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로마에 남은 의원들을 긴급 소집해 일사천리로 네르바의 황제 취임을 공인하게 한 것이다.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 네르바의 황위 계승을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네르바는 이 조치를 엄격히 시행해 모든 도미티아누스 조각상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자신의 얼굴을 모사한 두상을 대신 세우게 했으며, 도미티아누스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 및 동판 등을 깎아버렸다. 다만 도미티아누스가 완성한 플라비우스 경기장을 만든 사람이 도미티아누스라고 쓰여진 석판만큼은 경기장을 지은 것을 감사히 생각한 시민들이 결사적으로 막아서 지우지 못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생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처음으로 군인들의 급여를 올려줬기 때문에 군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근위대는 일단 네르바의 집권을 용인했지만, 도미티아누스의 기록말살형을 집행하자 격분했다. 이때 네르바에 의해 신임 근위대장으로 선임되었던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가 97년 근위대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암살자들을 처벌하라며 네르바를 압박했다. 네르바는 자신의 집권에 공헌한 자들을 배신함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거듭 말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를 무시하고 근위대장이었던 페트로니우스, 도미티아누스의 해방노예였던 파르테니우스와 스테파누스를 죽였다.

그 후 네르바는 궁정에 사실상 유폐되었고, 원로원은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늙은 황제는 군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트라야누스를 반강제적으로 후계자에 지명한 뒤 98년 1월에 청중들에게 연설하던 중, 고령의 나이와 최근 겪은 스트레스로 고생한 후유증으로 인한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며 쓰러졌다. 즉시 살루스트 정원 내 베스파시아누스 별장으로 호송되었으나 98년 1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트라야누스가 황제로 집권하면서 오현제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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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인이시자 신(神)"[2] 베스파시아누스 항목에도 나오지만 카이니스는 단순한 정부가 아니라 소 안토니아의 비서관이자 베스파시아누스의 출세를 도운 파트너였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사실상 정실 부인으로 대한 사람이었다.[3] 네르바가 괜히 걱정한 게 아니라, 도미티아누스의 정적 숙청 및 그 뒷처리가 늘 그랬기 때문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측근이나 선대부터 함께 한 협력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않으면 상대를 안심시키다가 증거를 잡은 뒤 점찍은 상대를 고발인 제도를 활용해 모조리 제거했다. 이 방법은 훗날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직후, 원로원에 의해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