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케발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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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아 왕국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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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데케발루스.png
이름
데케발루스
(Decebalus)
출생
미상
사망
106년
재위
87년경 ~ 106년
직위
다키아 왕국 국왕

1. 개요
2. 생애
3. 루마니아의 상징




1. 개요[편집]


다키아 왕국 6대이자 마지막 국왕. 다키아를 강대국으로 육성하고 도미티아누스트라야누스 황제를 상대로 분전했으나 끝내 국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망했다.


2. 생애[편집]


다키아에서 출토된 항아리에 "Decbalus per Scorilo"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스코릴로의 아들 데케발루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다키아 왕국 4대 국왕 스코릴로의 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스코릴로 사후 바로 왕이 되지는 못하고 두라스의 장군이 되었다. 두라스는 스코릴로의 장남이나 형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케발루스'는 용맹한 자 또는 열 사람보다 강한 자라는 의미가 담긴 호칭으로,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한 후 부하들이 칭송의 의미로 붙인 별칭이었을 것이다.

85년, 두라스와 함께 로마의 모이시아를 급습하여 총독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를 참수했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다키아로 쳐들어갔다. 두라스 왕은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코르넬리우스 푸스쿠스 장군에게 다키아 진입을 명령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데케발루스는 로마군의 위협을 비웃으며 "로마인은 다키아인에게 매년 2 오볼(obol)을 바쳐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전쟁이 일어나 로마인들에게 불행의 물결을 일으키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로마군은 이에 자극받아 다키아로 쳐들어갔지만, 매복에 걸려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푸스쿠스 장군은 전사했고, 상당한 병력이 포로가 되었으며, 독수리 군기마저 잃어버렸다. 그는 이 전투 후 부하들의 추앙을 받았고, 두라스 왕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았다.

도미티아누스는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를 모이시아의 새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재차 공세를 가하게 하였다. 88년, 율리아누스는 다시 다키아로 진격하여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라인강 전선의 게르만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사르마티아 부족과 마르코만니 족이 동방에서 로마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전선이 위험해지자, 도미티아누스는 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였다. 로마는 매년 다키아에 8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바쳐야 했고, 그의 왕위 지위를 인정했다. 대신 로마의 '친구'가 되었고, 다시는 로마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리하여 로마와 화해한 뒤, 그는 십여년간 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우수한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요새를 건설하고 우수한 장비를 구축했다. 또한 게티족, 바스타르네족, 사르마티아인, 록솔라니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로마가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하려 했다.

로마인들은 도미티아누스가 다키아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공물을 바친 일을 치욕이라고 여겼다. 후임 황제 트라야누스 역시 같은 생각이었고, 다키아를 정벌하기로 마음 먹었다. 101년, 그는 로마의 전 지역에서 징발한 대군을 이끌고 다키아로 쳐들어갔다. 데케발루스는 첫 전투에서 패배한 뒤, 협상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타파에 전투에서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는데, 다키아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로마군 역시 큰 손실을 입었다. 트라야누스가 봄이 올 때까지 겨울 숙영지에 가만히 있자, 그는 모이시아를 기습하여 타격을 입히려 했지만 아담클리시 전투에서 참패했다. 102년 봄 원정을 재개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공략하고 그의 여동생을 포로로 잡았다.

결국 데케발루스는 굴복하기로 하였고, 트라야누스의 요구 조건을 전부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무기를 포기하고 그의 군대에 있던 로마 탈영병을 돌려줘야 했으며, 로마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요새를 허물어야 하며, 공물을 더이상 받지 못하고, '로마의 친구'로서 동맹을 맺기로 했다. 또한 앞으로는 로마를 다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데케발루스는 로마의 모든 요구 조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약속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는 만족한 채 로마로 돌아갔지만, 그의 조약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사르미제게투사에 수비대를 남겨두었다. 트라야누스가 성공을 자축하는 동안,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에게 힘을 합쳐 로마에 대항하자고 호소하고, 요새를 재건했다. 사르미제게투사의 수비대는 트라야누스에게 그가 평화를 깨뜨렸다고 통보했고, 그는 서기 105년에 다시 다키아로 진군했다. 데케발루스는 다키아 영내의 로마 기지들을 게릴라 공격으로 파괴하는 한편, 트라야누스가 경호원 없이 부하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습관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 암살자를 보냈다. 그러나 암살자들이 붙잡힌 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걸 발설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데케발루스는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장군에게 평화를 이루길 원하니 세부 사항을 논의하자며 초대했다. 롱기누스가 초대에 응해 오자, 즉시 체포한 뒤 트라야누스에게 철수한다면 롱기누스를 풀어주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롱기누스가 하인을 시켜 독약을 가져오게 한 뒤 그걸 먹고 죽어버리는 바람에 또다시 실패했다. 트라야누스는 다뉴브 강변에 도착한 뒤, 다키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거대한 다리를 건설했다. 그 후 로마군이 다키아로 쏟아져들어오자, 그는 유격전을 벌이며 저항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사르미제게투사를 또다시 함락하고 다키아 전역을 파괴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의 고지대로 도망친 뒤 계속 항전했다. 그러나 로마 추격대가 근방까지 따라붙자, 그는 남은 족장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후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막시무스라는 이름의 로마 기병은 연회가 열리고 있던 요새를 막 찾아낸 뒤, 그가 죽어있는 방에 들어가 목을 베어 트라야누스에게 가져다 줬다. 트라야누스는 그에 충성하는 다키아인들을 끌고 갔고, 다키아 왕국의 모든 영역을 로마의 새 속주로 삼았다. 로마 제국은 다키아 전쟁에서 막대한 재원을 확보했고, 트라야누스는 이 재원을 활용하여 로마 전역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단행했으며, 자신의 업적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다키아 전쟁을 묘사한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세웠다.


3. 루마니아의 상징[편집]


파일:Decebalus.jpg

오늘날 루마니아인들은 부레비스타, 트라야누스, 그리고 그를 건국 시조로 꼽는다. 부레비스타는 건국자로, 트라야누스는 로마가 가져온 웅장하고 고전적인 문화를 상징하며, 루마니아의 기원인 다키아를 자유롭고 강력한 나라로 육성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한 명군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세기 루마니아 정치가 미하일 코겔니체누는 1843년 연설에서 그를 "역대 최고의 야만인 왕으로, 아우구스투스의 난폭한 후손들보다 로마의 왕좌에 오를 가치가 있다"라고 칭송했다. 현재도 루마니아의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상 매체에서 그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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