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준(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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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준

출생
1957년 1월 16일 (67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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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가족
3남 2녀 중 장남
아내, 슬하 2남
학력
성동중학교 (졸업)
덕수상업고등학교 (졸업 / 63회)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제학 / 학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국제경영학 / 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제경영학 / 박사)
병역
보충역
약력
삼보증권 경리, 재무 (1974~1979)
하트포드화재보험 경리과장 (1979~1986)
한국신텍스 이사 (1986~1994)
한국신텍스 부사장 (1994)
BMW코리아 상무이사 (1995~1999)
BMW코리아 부사장 (1998~2000)
BMW코리아 대표이사 사장 (2000~2018)
BMW 그룹 본사 임원, 수석부사장
한양사이버대학교 경영정보학과 겸임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프라임칼리지 석좌교수
한독상공회의소 이사, 회장
BMW코리아 대표이사 회장 (2018~2019)
BMW코리아 회장 (2019~2021)
덕수고등학교 총동문회장 (2020~현재)
BMW코리아 고문 (2021~현재)
한국독일동문네트워크 이사장
월간 CEO& 회장 (2022~현재)
대창그룹 부회장 (2024~현재)
수상
제21회 마케팅부문 연세경영자상 (2001)
제4회 글로벌 CEO대상 국제통상부문 (2007)
제46회 한국의 경영자상 (2014)
한국경영사학회 추계학술대회 전문경영자 대상 (2015)

1. 개요
2. 생애
2.1. 초창기
2.2. BMW 신화
2.3. 근황
3. 어록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기업인. 한국에서 BMW를 수입차 상위권으로 이끌었던 장본인이다.


2. 생애[편집]



2.1. 초창기[편집]


서울에서 3남 2녀 중 장남이자 맏이로 태어났다. 사범학교를 다녔던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의 여파로 월남한 후 건축업, 인쇄업, 운수업을 선전하고 있었다. (즉 실향민 2세) 학급반장을 성실하게 도맡던 중학교 2학년 시절, 택시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인해 10년 가까이 몸져 누워있었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인문계 대신 상업 계열이었던 덕수상고에 진학했다.

고1 시절 중3 학생 12명을 모아 가르치고, 동생 4명과 금호동 산동네 단칸방을 선전하며 동생들의 학비를 대신 마련하는 등, 가족을 대신해 집안살림을 도맡았다. 또한 책상 살 돈이 없어서 벽돌 위에 보자기로 감싼 박스 위에 공부했다고 한다.

고3 시절이었던 1974년 여름부터 삼보증권(미래에셋증권)에 입사해 재무, 경리과장 직을 맡았다. 1975년 여름휴가 때는 광주, 부산, 대구의 지점들을 돌며 직원들을 만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친한 사이였던 선린상고 출신 선배가 그처럼 상업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승진심사에서 누락되는 일이 벌어지며 인사담당 임원의 집을 찾아가 따진 적이 있다.

저희 회사에는 능력이 출중한 상고출신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단지 상고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졸 출신들과 차별한다면 누가 이 회사에 충성을 바치겠습니까.


저는 전혀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다른 이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삼보증권을 퇴사하고 보충역으로 군 제대 후, 1979년 외국계 하트포드화재보험으로 이직해 경리과장으로 약 6년 6개월간 일했는데, 그는 "외국계 회사가 상대적으로 낫겠다는 생각에 전직을 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1986년 미국의 제약회사 신텍스의 한국지사 창립 멤버로 이직해 이사직을 맡았고, 1994년에는 부사장 직을 맡다가 신텍스가 스위스 로슈로 매각된 이후 합병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퇴사하고 만다. 당시 '제 손으로 만든 회사를 제 손으로 장례식 치렀다.'라고 화상하며 직원들과 함께 해고통지서에 서명하던 날 폭음을 하고, 부등켜 안고 운 적이 있다.

33세의 늦은 나이로 방송통신대학교에 90학번으로 입학 후, 경제학을 독학으로 전공해 1997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2.2. BMW 신화[편집]


1995년 3월 한 헤드헌터로부터 한국신텍스에서 나온 직원 5명의 이직을 보장하기 위해, 직판 체제를 구축한 BMW코리아의 임원직 3명을 선발하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즉시 수락했고, 한국의 수입차 시장 현황이라는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본사가 있는 독일 뮌헨으로 갔다. 그곳에서 미국의 대학에서 MBA 학위를 취득한 후보 2명과 면접을 보고 합격 후 동년 7월 1일 상무이사직(CFO)에 취임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쳤을 때는 여러 수입차 딜러들[1]이 잠시 철수하던 시절에 '철수하고 나면 다시 진출할 때 비용이 많이 든다.'라고 말하며 본사가 철회했고, 2000만 달러 자금을 5% 금리로 지급받는 데 성공했다.

1999년 부사장직으로 승진한 시절에 한국어가 내장된 인포테인먼트 개발을 본사에 요청하기도 했다. 2000년 8월 BMW코리아 대표이사 사장직에 취임하며, 역사상 최초의 현지인 사장이 되었다. 2000년 한양대학교에서 석사 수료 후 2007년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BMW 5시리즈의 성공으로 2000년대 중반, 2009년부터 2016년까지 BMW를 7년 연속 수입차 1위를 이끈 장본인이다. 이 성과를 인정받아 2003년에 아시아 최초로 BMW 본사에서 임원진(Senior Executive)에 이어 2013년 수석부사장으로 있었을 정도. BMW 본사도 이를 잘 알 만큼 2014년 8월 독일, 미국에 이은 세계 3번째로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BMW 드라이빙 센터를 개장했다.

당초 2017년 2월에 사장직에서 물러날 계획이었으나, 본사의 요청으로 2020년까지 연임에 성공했다. 2018년 1월 말레이시아 지사 대표였던 한상윤 대표가 취임한 이후에는 대표이사 회장직에 올랐다가, BMW 차량 연쇄 화재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9년 대표이사직 마저 한상윤 대표에게 물려주고 2021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그에게는 결함은폐 관련 혐의는 무혐의 판결이 나왔다.

64세가 된 해인 2021년 4월 1일부로 BMW코리아 회장직에서 완전히 사임하고 고문직을 맡고 있다. 총 26년을 BMW에서 보낸 셈.


2.3. 근황[편집]


덕수고 총동문회장, 월간 CEO& 회장직으로 비정기적으로 활동하다 2024년 1월 4일 구리에 특수금속이 포함된 동합금을 제조하는 비철금속 전문 기업인 대창그룹 부회장직으로 임명되었다.


3. 어록[편집]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지만 한번도 가난을 탓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부자들을 존경하고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당장 현실이 힘들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옵니다.


기업은 돈만 버는 조직이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에 가치를 뿌려 일반이 향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는 사회의 그것과 궤를 같이해야 하며 지속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업이 사회에 기여하고 존경을 받습니다. 이것이 선순환입니다.


미래의 경쟁력은 네트워크와의 싸움이며 경쟁사 간의 싸움이 아니다.


저도 밑바닥에서 성장해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지금 세대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세대에도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4. 여담[편집]


  • 독서나 시 읽는 것이 취미다. 차, 비행기 탈 때나 취침하기 전에 한달 평균 3권 이상 읽는다.

  • 좌우명은 등고자비(登高自卑), 척벽비보 촌음시경(尺璧非寶 寸陰是競)이라고 한다.

  • 2011년 수입차 회사 최초로 BMW코리아 미래재단을 설립해 사회공헌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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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부그룹(푸조), 효성그룹(아우디, 폭스바겐), 주광모터스(피아트, 란치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