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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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완룡[1]
金完龍


파일:김완룡.jpg

출생
1918년 7월 1일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하서리[2]
(現 함경남도 함흥시 통남1동)
사망
2013년 8월 16일 (향년 95세)
서울특별시
임관
육군사관학교 (3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3]
1947년 4월 19일 ~ 1962년 7월 21일
최종 계급
소장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2층-212실-84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 개요
2. 초반 생애 및 평양학병운동
3. 해방 후 생애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군인, 변호사. 평양학병운동을 주도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2. 초반 생애 및 평양학병운동[편집]


1918년 7월 1일 함경남도 함흥군 함흥면 하서리(現 함흥시 통남1동)에서 태어났다.

1941년 12월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연구과에 재학하면서 니혼대학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1944년 1월, 귀국길에 일본 제국 경찰에 검속돼 학병 지원을 강요받았고, 이렇게 일본 제국 육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이후 평양사단 예하 42보병부대에 배치되었고, 그해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수료한 뒤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집단 항거를 계획하였다. 이에 김완룡이 총책, 박성화(朴性和)[4]가 참모장에 선임되고. 작전참모로는 전상엽[5], 보급참모로는 최홍희[6], 이도수[7], 김윤영(金允永), 부대 조직책에 최정수[8]가 담당하였다.

그해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면서 본격적으로 계획을 추진하였고, 평양사단 내 각 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이때 평양사단 학병들의 항거계획으로는 평양사단 내 병영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를 탈출한 후 조선-만주국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동정을 탐지한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그 과정에서 김완룡은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다 마침내 평양사단의 집단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6월 10일 열린 일본 제국 육군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에서 최홍희와 함께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학병들의 사기를 고려해 실제로는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3. 해방 후 생애[편집]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출옥 후 좌익계열 학병조직인 학병 동맹에 맞서 학병회를 조직하였고, 1947년 1월 13일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입교해 3개월간 훈련을 받고 4월 19일 소위로 임관했다.

창군기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법무과장, 육군 법무장교 등으로 근무하면서 좌익 숙군작업과 여순사건 부역자 재판에 참여했다.[9] 1949년 12월 서울병사구사령관[10]에 취임했으며 6.25 전쟁 시 서울수복 후 서울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으로 대민활동에 앞장섰고, 서울지구 계엄사무소장으로 재직 중인 1953년 5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4년 6월 국방부 정훈부장에 임명되었고, 1955년 초대 육군본부 법무감이 되었다. 1959년 12월 육군진급심사위원회에서 소장 진급이 내정된 유해준 준장 대신 진급이 내정되어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임시 소장 진급이 결정되었다.[11]

1961년 국방부 군무국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7월에는 서종철, 한신 등과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962년 7월 21일 퇴역하였다. 1963년 반혁명 쿠데타 관련 허위사실유포로 구속되었으며, 광복군 출신 태윤기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하였고 그해 9월 공소기각 되었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대한증권거래소 고문을 역임했고, 1968년 향토방위전문위원으로 향토예비군 창설에 기여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평양학병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2013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2013년 8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2층 212실 84호에 안장되었다.

4. 여담[편집]


  • 차남 김영호는 줄리아드 스쿨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피아노과 교수재직하다가 2021년 퇴임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관련 군사재판에서 재판관을 맡았다. 후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의혹에 관해 남로당에 연루되었으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고, 수사에 협조적이었으며 주변에서 석방을 탄원했었다고 증언했다.
  • 해방 다음 날 석방되었는데 감옥에서 얻은 피부병으로 피부에 진물이 흐르고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채 동지들과 열차에 탔는데 승객들이 문둥이(나환자의 멸칭)가 지나간다고 소리질렀지만 광복을 맞이한 기쁨에 그저 웃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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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서울현충원에는 김완용이라는 이름으로 안장돼 있다.[2] 1930년 함흥군이 함흥부로 승격되면서 함흥면 하서리는 함흥부에 편입되었고, 1933년에는 하서리가 황금정1정목과 황금정2정목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황금정1정목 124번지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3] 군번 10071[4]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출신이다.[5]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채광과 출신이다.[6] 주오대학 법학과 출신이다.[7] 미야자키고등농림학교(現 미야자키대학) 축산과 출신이다.[8] 토요대학 철학과 출신이다.[9] 추후 김완룡은 숙군 작업에 대해 억울한 사람이 많았다고 증언했는데 특히 최남근의 경우 어떻게든 무죄를 내려 풀어주려고 했으나 이범석, 채병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형을 내렸다고 한다.[10] 현 서울지방병무청장[11] 유해준 준장은 1961년 8월 소장 진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