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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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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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홍희(崔泓熙, Choi Honghi)
국적
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기.svg캐나다파일:캐나다 국기.svg

창헌(蒼軒)[1]
출생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리
(現 함경북도 화대군 화대읍)
사망
2002년 6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향년 83세)
학력
주오대학 (법학 / 중퇴)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46년 ~ 1962년
임관
군사영어학교
최종 계급
소장
참전
6.25 전쟁
1. 개요
2. 생애
2.1. 광복 후 태권도의 이름을 만들다
2.2. 국제태권도연맹의 창시
2.3. 박정희와의 불화와 캐나다로의 망명
2.4. 월북 활동과 사망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mookas.com/080110_itf_chh_02.jpg
대한민국의 前 군인 및 무술가다.

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장제29보병사단장을 지냈으며, 국제태권도연맹(ITF)의 창립자이며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사람이다.[2] 초기 태권도의 확립과 보급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으로서 한국 태권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무술인이지만, 유신독재를 반대해 캐나다에 망명한 사람이 1980년대 들어선 뜬금없이 북한과 교류하기 시작해[3] 이후의 행보는 한국인 입장에선 상당히 평이 갈릴 수밖에 없는 인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창립한 ITF 태권도가 일각에선 '북한 태권도'로 잘못 알려지기도 해[4] 북한 사람으로 오인받기도 하지만 원래는 대한민국 장성 출신으로 '남한 사람'이었다.

2. 생애[편집]


학술 문서가 있는데, 본 문서는 해당 기사의 글도 상당히 참고했다.

최홍희는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리(현 함경북도 화대군 화대읍) 산골마을에서 5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약한 체질을 타고나 부모가 근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998년 자서전 《태권도와 나》에서 어릴 때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라는 올가미를 씌워 무참히 학살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에 재학하면서 가라테를 배우던 그는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기질이 있던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선고가 바뀌어 사형당할 뻔도 했지만, 광복이 되면서 가까스로 풀려나게 된다.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육군 창설 멤버 110명 중 한 명이 된다. 1949년부턴 약 1년 간 미국 상급군사훈련학교로 일종의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2.1. 광복 후 태권도의 이름을 만들다[편집]


1953년 제주도에서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의 초대 사단장으로 부임한 최홍희는, 이곳에 자신의 첫 태권도 교육기관을 만든다. 부대 이름을 '태권도부대'라고 하고[5]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본인은 광복 전 잠시 배운 가라테를 중심으로[6] 여순반란사건 당시 경찰에게 맞고 오던 개판 오분전 상태의 한국군에게 자기 몸을 단련할 수 있는 새로운 무술을 지도할 생각을 했다는 말이 있으며, 저서에 따르면 본인은 1946년 3월 쯤부터 새로운 무술이 필요하다고 고민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1954년에는 그의 부대가 대통령 앞에서 무술 시범을 보이는데, 이것을 본 이승만이 "저것이 우리 고유에 내려오던 탁견이야"라고 말하며[7] 관심을 가졌다는 일화가 있다.

최홍희는 본인 부대에 군용도장 '오도관'을[8] 설립했는데, 이때 오도관엔 남태희 등 광복 전후 태권도의 기원이 된 이른바 5대관 중 하나였던 '청도관' 출신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사범들과 논의해오던 무술을 더 개량시켜 1950년대 중반 ITF 태권도의 원형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즉, '청도관->오도관->ITF 원형'인 셈. 이후 최홍희 자신은 1955년 정통성 확보 목적 등으로 민간 도장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청도관에서 2대 관장 손덕성 명의로 명예 4단증도 받는다. 1959년에는 월남에 국군태권도시범단 파견도 한다.

1959년, 민간 도장들과도 통합을 꾀해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고 본인이 초대 회장 자리에 오른다. 다만 이때 일부 민간 도장 사범들은 자신들과 큰 연관도 없는 군인 최홍희에게 제법 반감이 있었고, 이게 얼마 안가 대한태권도협회가 찢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족으로 지금의 WT 대한태권도협회는 최홍희 시절을 지워놔서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부터를 시초로 본다. 근데 1965년 대한태수도협회를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한 것도 최홍희 때라 WTF 입장에선 난감하긴 했을듯. 사실 이종우 등 기존 세력들은 태수도('태'권도+당'수'도)협회의 명칭을 고집했으나, 당시 5대관에서 영향력이 강하던 무덕관의 대변인 김영택이 수박도회와 태수도협회가 통합하는거니 양쪽 명칭보단 먼저 알려진 태권도로 명칭을 개정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최홍희를 도와준다.

1961년에는 제6군단을 역임하였으며[9] 1962년에 군에서 예편하였다. 참고로 태권도계 전체로 보면, 당시 태권도 보급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청도관에선 발차기를 중심으로 꾸준히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창무관에선[10] 태권도에서 빠질 수 없는 뒤돌려차기[11]가 1960년대 초반 이 무렵쯤 고안되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다른 주요 무관들과 교류전을 갖는 등 매우 의욕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12][13]

1965년 8월에는 3년 간의 집필 끝에 영문으로 된 『태권도교본』(4×6판·364쪽)을 펴냈다. 당시 그는 태권도의 기술연구를 비롯해 명칭과 용어를 제정하기까지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내가 아니면 태권도에 관한 책 하나 쓸 만한 사람이 없느냐"며 태권도계의 인재 부족을 탓하기도 했다. 다만 안티측에선 그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비꼬기도 한다.

2.2. 국제태권도연맹의 창시[편집]


최홍희는 1959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국군태권도시범단과 태권도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베트남, 대만, 아프리카, 중동, 유럽 등지에서 시범공연을 하면서 태권도 국제기구를 창설해보려는 구상을 가졌다. 기구의 명칭부터 임원 구성, 규약 ,편제 등의 기초작업이 어느 정도 끝나자 1966년 3월 22일 조선호텔 로즈룸에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했다. 창설임원은 김종필, 김완용, 김용태, 이상희, 조하리 등 당시 최홍희 지인이나 정치인들이 많은 편이었고, 태권도인들은 부총재에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인 노병직, 사무총장은 엄운규, 기술위원장은 이종우 등으로 임명되었다.[14] 초대 가입국은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국, 서독, 이탈리아, 통일아랍공화국 등 9개국이었는데, 1년 후엔 40여개국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대한태권도협회는 국제태권도연맹이 유사단체를 만들어 파벌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국제태권도연맹의 해체를 종용함과 동시에 협회 내에 태권도 해외 보급 및 지도자 해외파견 등 대외관계를 전담할 상설기구인 국제분과위원회를 신설했다. 그러자 최홍희는 강력하게 반발에 나섰고 결국 대한체육회는 1968년 9월 3일에 업무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나섰다. 국제 태권도연맹은 산하 도장을 갖지 못하도록 하면서 국제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업무와 건전한 국제대회를 관장하고 대한태권도협회는 국내도장 설립과 국내대회 관장 및 선수양성 등의 업무를 보도록 했다. 그리고 1966년 9월 20일에는 태권도분규수습위원회가 신설되고 두 단체간의 분규를 없애려고 했다. 최홍희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박정희의 지시로 이런 위원회가 생겼다고 여겨 불쾌해했다. 당시 자신에 적대적인 협회 인사들에게도 길을 닦아 놓으니 문둥이가 지나간다는 속담까지 인용하여 맹비난하였다. 위원회에서의 합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 사범의 해외파견업무는 대한태권도협회 소관이니 당분간 태권도 국제적 보급을 위하여 대한태권도협회 회장과 국제태권도연맹의 총재가 협의하여 파견한다. 단 1969년 9월 2일까지 만 1년간 해외 사범파견에 대한 권한을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완전 장악한다.

1. 대한태권도협회는 국내의 기존 17개 중앙도장과 지관과의 계열을 없애기 위해 지체없이 지역별 명칭으로 개칭한다.

1. 국제태권도연맹은 여하한 단증도 발급할 수 있으며 가맹국으로부터 4단 이상자에 대한 인준 신청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인준하고 인준서를 발급할 수 있다. 단 대한태권도협회에 대해서는 인준권한을 위임하고 4급 이상자에 대하여 국제태권도연맹에 등록만을 시키는 것으로 한다.

최홍희는 해외사범 파견과 단증 발급은 국제태권도연맹의 고유 소관업무라고 여겼지만 대한태권도협회가 이 업무들도 자신이 하겠다고 하고 분규수습위원회의 지침대로 해외사범 파견에 대한 대한태권도협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보낸 서류들을 무조건 회송하고, 이종우를 시켜 해외에 나간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만든 것을 하라고 지시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분을 삭였다. 이런 분규는 1970년대 초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최홍희는 1971년 8월 분규수습위원회 전제회의에서 불만을 가지고 탈퇴했고 수습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제7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운용은 대한체육회에 가입한 단체는 대한태권도협회가 유일하다며 국제태권도연맹과의 차별화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2.3. 박정희와의 불화와 캐나다로의 망명[편집]


국제태권도연맹대한태권도협회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박정희 정권과도 껄끄러운 관계였던 최홍희는 계속해서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최홍희는 해외출국이 통제되고 유신독재가 시작되려던 찰나인 1971년 암암리에 망명 계획을 세우고 1972년 3월 신변 안전과 유신독재에 반대한다는 명분 아래 캐나다망명을 떠났다.[15]

1973년에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한 후 1974년 7월에는 몬트리올에서 23개국이 참여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또 북미권에서 마샬 아츠 붐이 일어난 덕분에 엄청난 조직 성장을 이뤄[16] 이후 태권도라는 이름이 서방권 국가들에 알려지는데 공헌을 하였다.

1978년에는 사범단을 이끌고 동유럽에 태권도를 보급했고, 1970년대 말에는 북한 방문을 비밀리에 추진해 1980년대 들어선 실제로 태권도 시범단을 결성해 북한으로 가서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1986년에는 중국에 방문해 처음으로 태권도 보급을 시작하는 등 공산권 국가에도 활발히 진출했다.

2.4. 월북 활동과 사망[편집]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최홍희는 점점 북한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기 시작했고, 북한의 요청에 따라 아들 최중화를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보내 제2기 사범요원교육을 도와주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북한은 1981년 1기생 사범을 교육하고 1982년 2기생 교육을 한 뒤 3기부터는 자체 교육을 하겠다고 통보했고 사범양성 및 파견과 사범단 운영도 점차 자체적으로 하려는 등 은근히 마찰도 빚게 된다.[17]

한편, 이런 활동은 국제태권도연맹 내에서도 논란이 되기 충분했다. 최홍희의 의도야 북한도 남한과 같은 한민족이므로 태권도를 보급해야한다는 생각이었겠지만[18],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19] ITF내 사범들간에 많은 갈등을 야기했고 이것은 ITF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최홍희를 따르는 사범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그의 최측근 또한 이런 그의 친북적인 경향에 등을 돌렸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반론측에선 최홍희가 북한일본에 태권도를 보급한 것으로 인해 사범들이 돌아섰다는 것은 왜곡된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몇몇의 한국인 사범들은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한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난 것이지 그의 태권도 보급 활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1994년에는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여부를 둘러싸고 WT(당시 WTF)와 ITF간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특히 최홍희는 WTF가 내세우는 형식이 가라테 동작을 모방한 가짜 태권도라고 비난했다. 물론 WTF 측에선 펄쩍 뛰었다. 그러나 1994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03회 IOC 총회에서 WTF의 태권도가 2000년 2000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이때 의외로 최홍희는 (본인 기준) 사이비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된건 유감이지만 태권도 세글자는 확실히 이름을 남겼으니 후손을 위해서도 좋은거라며 대승적 관점에서 이를 환영했다.[20]

1998년에는 자서전 《태권도와 나》를 집필하고, 이 무렵 주변의 권유에 따라 당시 김대중 정부에 자신은 과거 독재자들을 미워한 것이지 한국 정부를 미워한게 아니라며 남한 귀국 의사를 밝혔으나, 그동안의 친북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면 귀국시켜주겠다는 식의 제안이 오자 거절했다는 설도 있다. "안기부가 마치 죄인을 취조하는 식의 질문을 보내왔다"는 최홍희의 말 속에 방한이 무산된 속사정을 엿볼 수 있다.

2000년대에는 WT와 통합도 해보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21][22] 2001년에는 아들인 최중화와 ITF 해석을 놓고 갈등이 생겨 결국 최중화를 제명하는 시련을 겪기도 한다. 이후 부자 사이는 사망 1달여 전 겨우 화해하고 회복하지만, 공적인 문제는 따로 놀게 된다. 위암으로 북한에서 치료를 받으며 캐나다와 왔다갔다하다 2002년 6월 평양에서 만 8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ITF의 후계자로는 당시 IOC 위원이던 장웅을 지명했다.[23]

3. 평가[편집]


업적은 초기 태권도계를 이끈 인물 중 하나로 태권도라는 명칭을 창안해내고, 지금의 ITF 태권도 스타일의 원형을 만들어내는 등 태권도 역사에서 좋든 싫든 부인하기 힘든 족적을 남겼다. 당장 최홍희가 당시 가라테에 많은 영향을 받은 태권도를 새로운 한반도 무술로 정립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태권도란 무술은 존재하지 않고 그냥 "코리안 가라테" 비슷한 형태에서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24][25] 그래서인지 ITF에선 지금도 최홍희를 태권도 창시자로 명시하는 반면, WT는 이를 부인하고[26] 최홍희 생전에는 그의 정당한 업적조차 애써 무시하는 추세였지만, 최홍희 사후엔 WT 내에서도 그를 창시자까진 아니지만 초기 태권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는 인정하는 추세다.

무술인으로서 보자면 일단 무게 중심을 이용하는 방법론에 중점을 두어 사인웨이브(Sine Wave)의 원리를[27] '체득(體得)'하는 등 그가 뛰어난 무술가였음엔 큰 이견이 없다. 또 태권도라는 무술에 동양 철학의 이치를 담고자 노력하는 등 이론화 작업에 능했으며[28] 태권도에 관한 여러 저술을 하는 등 이런 지적인 면모는 무술인으로써 최홍희가 갖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론적인 부분과 별개로 그의 실전력에 대해선 딱히 전적이 없으니 검증된건 없다는 의견도 있다.

여러 증언으로 볼 때 그는 무술에만 전념하진 않았던 듯 하다. 무예만 익혔던 다른 무술인들과 달리 최홍희는 대한민국 육군 소장 출신으로 어느정도 학식과 관의 고위급 인물로 인맥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초기 태권도를 알리는데 장점이 되었다. 실제 초창기엔 태권도 명칭에 거부감을 가지던 관장들을 설득하고자, 지금 와선 몇몇 학자에게 신빙성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당시 정권이랑 교류가 있는 척 외부적 권위를 끌어들이기도 했고[29] 틀(품새)에도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 틀이란게 있었지만, 4.19 혁명이 일어난 해인 1960년 재빨리 삭제하고 충장 틀로 대체한 것을 보면 시류에 무딘 인물도 아니었다. 이런 점은 그가 이후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전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한계 역시 있었는데, 일단 조직의 수장이 되기에 그는 대인관계가 썩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인품 자체에 큰 결함은 없었지만 자기 무술철학이 너무 확고해서 주변 인물과 자주 마찰을 겪었다. 명백히 다른 무술을 가르치는 5대관을 강제로 통합하려다 5대관 관장들로부터 신임을 잃어서 결과적으로 대태협에서 쫓겨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고[30] 군대 선후임 관계인 박정희와의 불화는 유명하며, 캐나다로 건너간 이후엔 평생의 파트너였던 남태희까지 ITF에 대한 노선 차이로 불화를 겪고 떠나보냈다. 그리고 말년엔 가장 사랑해야 하는 가족인 아들 최중화까지 기어이 ITF에 대한 해석 차이로[31]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32] 사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것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최홍희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5대관과의 불화로 태권도의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고, 심지어 그렇게 딴 살림 차린 ITF조차 화목하게 유지시키지 못하고 아들 최중화와의 불화로 ITF 전체 사분오열의 싹을 제공한 것은 ITF, 더 나아가 태권도계 전체 시각에서 봐도 좋게 평가해주긴 어렵다. WT가 실전성 논란을 겪는 와중에 그나마 실전적인 ITF마저 점점 하락세를 타는 현 시점에선 더더욱.

태권도 외적으론 아무래도 그의 친북적 행보 때문에 일각에선 공산주의자라는 비판도 있는 편인데, 사실 최홍희가 넓은 의미로 친북 인사는 맞아도 최소한 공산주의자라고 볼 근거는 없다. 애초에 최홍희 본인이 6.25 전쟁 때 북한군을 맞아 싸운 참전용사이고, 1950년대 갓 태어난 대한민국 육군이 강건한 토대 위에 자리잡도록 한국형 군용무술 개발까지 한 사람이다. 이런 인물이 북한식 공산주의자라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딱히 전향했다는 근거도 없고. 최덕신 마냥 박정희에게 버림받고 환멸하여 친북 행보를 이어가다 월북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캐나다로 망명한 이후 제3국민이라는 지위를 활용해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려 했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이다. 미국 태권도의 개척자 이준구 사범의 말을 빌리자면, "태권도에 미쳐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싶다."

실제 그는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북한을 자주 다닌 것도 결코 남한보다 더 정들어서가 아니라 북한을 통해 올바른 태권도를 사회주의 국가와 제3세계에 보급함으로써 나의 꿈을 실현하자는 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태권도는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절대 정치적 목적으로 쓸 수 없는 국제무도'임을 뚜렷이 했던 것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물론 김일성의 사상과는 별개로 리더쉽이나 민족주의적인 부분은 호평하는 병크를 저지르거나[33], 굳이 평양에서 사망한 점[34], 북한인 장웅에 뒷자리를 물려줘[35] 북한계 힘이 커진 작금의 ITF 때문에 마냥 호의적으로 평가해주기도 뭐하긴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친북론이 군사정권의 잔재라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언론매체와 인터뷰 할 용의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HOI2 DHR에서 대한민국을 독립시키면 장성들 중 한 명으로 출연한다. 실제 최홍희는 한국군 소장으로 예편한 인사다.

1990년대 북한의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홍희를 주인공으로 다룬 에피소드가 제작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당연하지만 사실과는 다른 부분도 많으니 걸러듣자.

젊은 최홍희(차홍기)는 공산주의 청년단에 들어갈 정도로 좌파 이념에 동조했지만, 출신 성분과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월남하여 군직에 종사한다. 박정희는 처음에 최홍희를 형님으로 대우해 주면서, 최홍희는 군대에 태권도를 무술로 보급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군대가 최홍희 이하 이북 장교들의 사병으로 변모하게 될 것을 걱정하는데, 때마침 먼저 같은 이북 출신으로 최홍희에게 모임을 제안했던 김형욱이 선수를 쳐서 자신이 이북 출신 모임을 사사로이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박정희는 이북 출신 장교들을 처단하기 위해 전두환을 시켜 전방의 부대가 북괴로 위장한 몇몇 부대에게 당하게 해서 최홍희를 실추시킨다. 거짓된 음모에 절망한 최홍희는 캐나다로 망명한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최홍희를 감시하기 위해 군대에서 최홍희가 총애했던 태권도 제자인 홍영자(가상의 인물이다)를 내세워 남한 태권도 도장을 장악하고, 최홍희를 암살하려 든다. 그러나 중정의 요원인 홍영자는 최홍희를 내심 사랑하고 있어 망설인다. 마침 같이 망명한 김형욱에게 올바른 민족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최홍희는 김형욱과 몇 번 접촉을 하고, 김형욱에게 미국에서 박정희의 부정을 까발릴 것을 권한다. 김형욱은 말을 따르지만 자신의 애인이 파리에 있다는 홍영자의 꾀임으로 인해 파리에 가게 되고, 거기서 요원에게 납치되어서 박정희의 총을 맞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온갖 부정과 음모에 지친 홍영자도 전두환이 집권하자 한국 정부와의 연락을 끊고 최홍희와 국제태권도연맹에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1] 초창기 ITF 태권도를 일컬어 창헌류라고 간혹 이야기하는데, 최홍희의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2] 좀 더 정확하겐 최홍희의 측근이었던 남태희와 함께 만든 것으로 보인다.[3] 비북한계 ITF 관계자들은 무술 전파에 국경은 없다며 북한도 ITF 회원국 중 하나이고 배우길 원하면 갈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4] 정확하겐 북한계/비북한계로 나뉘어 내부 싸움이 있다.[5] 그래서 경례구호도 '태권'이었다. 다만 태권도가 이후(1954)에 작명되었다는 식의 말도 있는거 보면 1953년부터 태권도란 말을 썼다는건지 아니면 이후에 태권도부대라고 명명했다는건지 전후관계가 좀 복잡하긴 하다.[6] 초창기 태권도 원로들은 다수가 가라테 사범 출신이었고, 그 외 소수의 중국권법, 기타 사범들이 협력하여 여러 무술을 연구 통합, 한국식으로 변형시킨게 태권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최홍희는 이것을 군용무술로 활용한 케이스. 참고로 최홍희 본인은 쇼토칸 가라테 2단이었다.[7] 사실 가라테를 나름 변형 소화했던 것으로 이승만이 착각한 것이다. 이승만 택견 부정설 탁견이야? 라고 질문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최홍희 본인은 태권도라는 단어를 만든 후 가라테와 구분되는 고유의 색채를 입히고자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8] 최홍희 왈, 오도관의 오도(吾道)는 '공자가 나는 오직 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야(吾道一以貫之)'에서 따왔다고 했다. 즉, 태권도의 길을 가겠다는 것.[9] 참고로 최홍희가 논산훈련소 참모장으로 5.16 당시 후방에 참여했다는 식의 글도 있는데, 정작 다른 글에선 그가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박정희쿠데타 세력들에게 반감이 많았다는 반대 서술도 있다. 절충식으로 파가 달라 비협조적이었다는 식의 글도 있고 기사마다 제각각이다. 어쨌든 최홍희는 이후 저서에서 "8기생 중령들은 대령도 거치지 않고 졸지에 준장으로 둔갑하여 격에도 맞지 않는 장군 행세를 하는가 하면 박정희는 전원 군 임무로 돌아간다는 당초의 혁명공약은 아랑곳없이 결국 대통령 자리까지 차지하지 않았는가. 군사정부의 독재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의 시초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라고 5.16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0] YMCA 건물을 빌려 운영했던 도장.[11] 참고로 최홍희가 직접 창립한 ITF에서는 이 기술이 몸의 회전을 이용하여 돌려차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돌려찬다면 반대돌려차기, 단순히 상대에게 등을 보이면서 뒤를 찬다면 뒷차찌르기라고 부른다. 태권도가 발기술 위주로 발전하면서 이후 가라테도 태권도의 영향을 받아 좀 더 다양한 킥 기술을 받아들인다.[12] 다만 뒤돌려차기의 경우, 초창기에는 "일단 피하거나 앞으로 전진하여 손기술로 제압"하는 대처법이 나와 고전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로, 1960년대 초반 뒤돌려차기가 고안된 지 얼마 안되어, 전국 주요 무도관 중 강덕원과 교류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강맹한 위력의 뒤돌려차기에 기가 죽은 학생들이 맥을 못췄지만(당시 강덕원은 지방의 명문 학교와 연계하여 나름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겨루기가 계속 진행되다 보니 애들 눈에도 "정신차리고 피하면 이길 수 있다"는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건 말 그대로 "초창기" 때의 얘기다. 현재는 견제, 기습, 마무리 등 응용법이 많이 고안된 상태다.[13] 참고로 강덕원은 택견 등 여러 무술에 일가견이 있는 박철희 관장이 운영한 곳으로 앞차기, 안다리걸어차기, 손기술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타격 순간에 힘을 내는 것을 강조했으며, 특히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팔을 뒤로 빼는 예비동작 없이 바로 뻗는 주먹 또는 수도와, 역시 예비동작이 생략된 빠른 앞차기가 이 강덕원에서 연구한 결과물이다. 티우 월남 대통령을 경호한 장교 안낙순이 강덕원 출신이며, 예비동작 없는 빠른 주먹을 수련한 사람 중에는 권투로 전향해 성과를 거둔 이도 나왔다는 후문이 있다.[14] 다만 이후 엄운규는 자신이 사무총장으로 일한 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15] 다만 채명신은 색다른 주장도 했는데, 이런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최홍희가 말레이시아 대사를 하던 시절에 태권도 보급과 동시에 금전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대사에서 면직되고 핀란드에선가 북한으로부터 접촉이 와 (최홍희의 형은 노동당 간부였다) 북한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에는 최홍희가 최덕신까지 포섭해 최덕신이 채명신에게 전화를 했지만 채명신 장군은 이북으로 가자는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최홍희와 대립을 거듭하던 대한태권도협회 (WTF 기준) 초대 회장 채명신의 발언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 최홍희는 1980년대 북한에 넘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6.25때 빨갱이 때려잡은 공로로 육군 장성에까지 올랐을 정도로 반공 성향은 나름 투철했던 인물인데, 이런 사람의 형이 북한 노동당 간부를 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결국 신빙성은 위키러들의 몫이다.[16] 덕분인지 지금도 재미교포들이 운영하는 도장 중 상당수는 ITF 계열이다. 조기 영어 교육붐을 타고 국내로 진출하기도 한다.[17]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훗날 최홍희의 아들 최중화는 2008년 9월, 34년만에 남한에 귀국한 후 기자회견에서 "장웅 계열의 ITF가 북한 노동당 통일선전부전위조직"이라며 북한이 태권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최홍희의 부인과 두 딸은 지금도 장웅을 정식 계승자로 인정하고 관련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철권으로 유명한 황수일도 장웅 계열이다.[18] 최홍희는 가라테를 참고하긴 했지만 자신의 철학이 더해져 민족 고유의 무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태권도를 이전부터 같은 민족의 나라인 북한에도 전해주고 싶었다. 실제 통일이 되면 하나된 태권도를 구사하는 남북한도 꿈꿨다고. 또 무술은 배움에 있어 정치적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홍희가 북한을 드나들며 태권도를 전해준 후에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후에는 후계자 결정에 있어 많은 갈등을 초래했으며 이런 갈등이 나아가 국제태권도연맹의 분열로 연결된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최홍희가 너무 낭만적이었던 거 아니냐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19] 근데 이건 남북한이 도긴개긴이라는 의견도 있다. 당장 WT도 당시 ITF에 대항한답시고 민족주의를 강조하던 군사정권의 뜻과도 결합되어 태권도 택견 전통무술 드립을 자행하는 흑역사를 찍는다. 무술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진짜 무도인들만 불쌍하게 된 셈이다.[20] 사실 이때 투닥투닥하긴 했지만, ITF가 가진 글로벌 인프라도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되는데 유무형의 영향력을 끼치긴 했다.[21] WT 관점에선 흡수면 모를까 화해와 통합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일축했다는 설도 있고, 역으로 ITF 관점에선 당시만 해도 ITF태권도가 해외 특히 북미를 중심으로 엄청난 세력을 구축하고 있을 때라 이제 막 올림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WT태권도보다 도장도 많고 수련인구도 많은데 뭐가 아쉬웠겠냐는 반응도 있다. 실제 ITF태권도 세가 예전보다 약해지게 된 것은 최홍희 사후 단체의 분열에 따른 계파 싸움과 공산권 수교,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등으로 인한 WT태권도의 급격한 성장이 컸다. 그래서 ITF쪽에선 WT가 최홍희에게 먼저 통합 얘기 꺼냈다 까이고 나서 이런 식으로 왜곡한다는 주장도 하는데, WT쪽에선 또 뭔소리냐고 일축하는거 보면 참 답이 없다.[22] 다만 이런건 있다. 최홍희는 태권도의 스포츠화를 누구보다 경계하던 사람이었다. 자기가 만들려고 한건 한국인에게 맞는 무도, 격투술이기도 했고. 근데 그런 사람이 올림픽 때문에 양 단체 통합을 추진했다는건 그의 철학과는 좀 어긋나긴 한다. 물론 ITF쪽 룰에 좀 더 가깝게 통합한다는거면 몰라도. (사실 ITF가 WT보다 실전성이 낫다고 평가받긴 하지만, 작금의 MMA 시대에선 ITF도 실전성만으로 어필하기엔 이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차라리 WT보다 박진감 넘치는 라이트 대련이란 식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23] 이후 국제태권도 연맹은 장웅 계열과 최중화 계열, 쩐꽌 계열로 갈라졌다.[24] 실제 당시 다수의 태권도 원로들은 전직 가라테 사범이었던만큼 가라테(당수/공수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각 도장들을 통합하려 했을 땐 기어이 당수 혹은 공수라는 이름을 지키려고 엄청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을 친일파라고만 욕하기엔, 가라테 자체가 오키나와 테에서 유래했다 보니 다른 일본 무술에 비하면 당시 조선인들에겐 거부감이 덜했다는 점과 각 도장이 쓰던 명칭이 이미 있는데 오도관, 청도관처럼 일부 도장만 쓰던 태권도로 통합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 알력 다툼 등 여러 속사정도 있긴 했다.)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다보니 최홍희가 1960년대 외교관으로 외국에 가있는 틈을 타 이종우 등의 주도로 대한 태권도 협회가 가라테 느낌이 물씬나는 대한 태도 협회라는 이름으로 단체명을 바꾼 적도 있었는데, 최홍희가 한국에 들어와 대한태수도협회장을 맡게 되면서 다시 명칭을 대한태권도협회로 복구시켜 버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상당수 태권도 원로들의 가라테 향수는 현재 태권도 품새와 격파 시범, 약속 겨루기에서도 꽤 드러나고 있다.[25] 참고로 한국에서 나름 기반을 다진 무술들 중엔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건너온게 생각보다 많다. 합기도, 유도, 검도가 대표적. 유도, 검도는 거의 원형 그대로 온 케이스고, 합기도는 일본 합기유술에서 유래했지만 최용술 항목에도 있듯 여러 사정으로 인해 유파가 나뉘고, 이들이 각종 무기술이나 태권도의 발차기도 받아들이는 등의 변형을 거치면서, 지금은 일본식 합기도와는 형태가 많이 다른 한국식 창작 무술 비슷하게 되어 있다.[26]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최홍희가 주요한 태권도 1세대 멤버인건 맞지만, 유일한 창시자는 아닌 것도 맞다. 태권도/역사 항목도 참조.[27] 초기 태권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나, 최홍희 총재의 캐나다 망명 이후 한 물리학자와 담화를 나누다가 영감을 얻어 체계화하였다고 한다.[28] 태권라는 명칭을 고안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실 무술에서 '○도'란 명칭은 유도가 시초긴 하다. 중국은 권법의 경우 '○권'이란 표현이 더 많은 편. 태극권, 영춘권 등이 있다.[29] 최홍희는 태권도란 명칭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군 내부의 모략과 당수도와 공수도, 권법 등을 사용하고 있는 민간도장의 반발로 무산될까 걱정했다.[30] 최홍희 측에서 보자면 민족 무술을 새롭게 만들어야 되는 찰나에 굳이 가라테를 고집하던 기존 일부 사범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측에선 자기들이 배운 무술에 나름 자부심이 있는데 굳이 바꿀거면 뜻 맞는 사람들끼리나 바꿀 것이지 왜 자꾸 우릴 끌어들이려 하냐 싶었을 것이다. 이는 각 도장내에서도 또 개개인마다 의견이 달랐기에 벌어지는 해프닝이었을 것이다.[31] 대충 최중화는 실전성을, 최홍희는 역시 본인의 초심이었던 '한국인에게 맞는 격투기'를 추구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최홍희 태권도를 정식으로 계승한 장웅계는 전반적으로 WT처럼 화려하지만, 최중화계는 전반적으로 동작이 옛날 태권도처럼 소박하고 실전적인 게 특징이다.[32]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최홍희가 말년에 위암으로 위독해지자 화해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5월 북한에서 위암 치료를 받고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한 최홍희에게 최중화가 나타나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고 통곡을 했다고. 이때 최홍희도 부자간으로선 화해했지만, 공적인건 다른 문제라고 최중화에게 결국 자기 자리를 물려주진 않았다.[33] 그 속내는 알 수 없지만, 김일성이 북한내 ITF 태권도 보급에 열성적이긴 했다. 한 예로 최홍희가 '태권도 백과사전'을 저술하자 당 간부들한테 대중화시키라고 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34] 당시 캐나다에 있던 최홍희는 남북한 양측에 어느 쪽이든 자길 불러주는 곳(한반도)에 묻히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으나, 북측은 수용한 반면 남측은 시기상조라는 답변을 보냈다고 한다. 다만 그 북한도 정작 최홍희가 '태권도 창시자'라는 비문(碑文)을 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35] 이에 대해선 당시 WTF와의 통합을 염두에 두고 IOC 위원이던 장웅을 지목한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한편으론 이것도 유언이 조작된거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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