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위/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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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군주
2. 왕가 위(魏)씨
3. 기타 이름있는 자
4. 기타 이름없는 자



1. 역대 군주[편집]


말 그대로 위나라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스레 시작 당시의 위나라 군주. 본인의 능력과 판단력은 물론이고, 당대에 있었던 인재들 또한 위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기라성들이었다.
당대 최강이었던 위나라의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삼진을 비롯한 동맹들을 지원하는 것 만큼은 앞 뒤 안 가리는 정도의 패권국가로써 제대로 된 행보를 보이는 인상적인 군주. 다만 시작 시점이 시점인 만큼 얼마 안 가 천수를 다할 운명이었고, 당연히 이는 이 당시에 거느렸던 인재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위나라의 역사적인 내리막길의 서막을 알린 군주이기도 하였다. 사후 위무후 위격이 자리를 계승한다.

AA덕분에 역사보다도 더 다혈질적인 느낌을 주고 행적도 비슷한 느낌인 위나라의 2번째 군주. 다만 오기 관련 사건 때에는 이상하리만치 자신의 분을 삭여가면서 생각보다는 이성적이거나 관대한 판단을 내렸고, 이는 오기가 위나라에서 이탈하지 않고 겸허함을 겸비하여 직책도 마다하고 동부군에서 남은 생을 쏟아붓게 하는 충격과 공포의 역사 개변을 일으켰다. 공숙좌가 이렇게 된 오기의 지식을 빨아먹어서 기량이 아득하게 상승한 것은 덤이다.
노나라의 멸망 이후 위나라의 패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제나라와 서하를 계속 노리는 영사습의 진나라 등에 대응하기 위해, 위무후 입장에서 일단 끼어들면 이상하리만치 판을 꼬아버리는 조선을 어느 정도 묶어두고자 태자 교환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 때 조선의 태자 기이에게 애증 수준의 감정을 지니게 되는데, 이유는 자기 딸(위앵)이 기이만큼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왜 기이가 자기 딸이 아닌가에 대한 울화통이었다.(...)[1]
진나라의 서하 공략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등으로 양호하게 저지하였지만, 제나라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시도한 2번 정도의 공략이 미진한 성과를 내면서 패권이 흔들리는 단초가 되었다.
최후는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따라갔는데, 제위를 목적으로 움직인 위완에게 시해당한다.

조선과 애증의 관계가 된 파란만장한 삶의 소유자
AA의 첫 등장은 조선의 중원계 공인 과정에서의 사신 및 슈퍼 공숙좌의 위장용 껍데기(...) 위나라 동부 월경지에 자신의 영지가 있었고, 여기에 위무후가 과한 신경을 쓰는 것(+능력치가 너무 낮게 나온 것)에 의문을 품은 스레주의 판정 결과 위앵임이 밝혀졌다.
위무후의 주도로 이루어진 조선-위 양국간의 태자 교환으로 조선에 손님으로써 보내졌는데, 이 과정에서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궁금한 것, 모르는 것 다 체통을 생각지 않고 물어보는 통에 기식을 비롯한 당대 조선 주요인사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군사적 부문의 해프닝이었던 기병 만능론의 창시자이기도 하는 등 보통 말썽이 아니었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의 당시 주류 사상이었던 인의패도론을 습득하여 역사보다 향상된 기량을 보이기도 하는 등의 수확도 거두었다.
이 당시의 기억에 더해 본디 역사적으로는 제위를 목적으로 위무후를 참살한 위완과 대판 싸워야 했던 탁택 전투의 위기를 조선의 적절한 개입으로 매우 깔끔하게 넘기면서 조선에 일반적인 동맹 이상의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게 되었으나, 방연을 전적으로 중용하면서 생긴 물밑에서의 동맹간 외교적 결례나 마찰 등이 화근으로 작용해 한나라와 조선이 돌아서면서 상당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어, 이 중 가장 적극적으로 공세를 전개한 뒤 아직까지 사과가 없는 조선에 맹목적이라고 보일 정도의 적개심을 가지게 되고 만다.
다만 이후의 조선과의 국지적 분쟁에서 패자인 제위왕의 중재로 상당군을 위시한 조선의 위나라 방면 국경의 방비 해제 및 혼인 동맹이 성사되었는데, 이때 얻은 사위를 매우 마음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위가 능력으로만 보면 공숙좌를 대신할 정도라 해도 무방할 인재이건만 중요한 상황에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등, 현재 위나라의 침체 상황에 어느 정도 일조를 하고 있었지만, 조선 유가 명사 자격으로 설득을 시도한 기비의 노력으로 일단은 어느 정도 감정을 정리하였다.
후일 후계구도 문제로 불거진 물밑 갈등을 포착하지 못하여 위사의 거병으로 인한 내전을 맞고, 여기서 다시 조선의 도움[2] 을 받아 또 안정화되는 식으로 자신의 대에 위나라가 내전에만 2번을 휘말리고 조선군이 위나라의 땅을 3번 밟는 것을 봐야 했다.
위신이 위사의 귀신을 보고 급사하자 토혈과 함께 졸도하였다가 깨어나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급작스럽게 왕위에 올라야 하는 손주 위래를 걱정하다가 안심해도 된다는 자신에 찬 위래의 위로를 듣고서야 여지껏 겨우 버텼다는 듯이 쓰러져 이승을 하직하였다.

몰락한 위를 부흥시켰지만, 개인의 감정으로 대사를 그르친 비운의 군주
위왕 위앵과 공자 위신이 연달아 급사하여 왕이 된 인물. 위신과 기람의 자식으로, 위앵이 위신을 후계자로 내정할 때 여기에 더해 만일 본인이 죽으면 그 자식에게 승계하겠다는 확답의 당사자이다. 공손연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소진을 상방에 올리는 도박을 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아 서하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조위초 동맹에 참가하여 제나라를 공격한다. 그러나 전후회담때 소진의 설득으로 대조선 합종군을 만들었지만 진나라 왕위 계승전쟁때 조선군이 초군을 몰아내고 영탕을 왕위에 올리는 것에 성공하여 합종이 깨지고 만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초나라와의 연대를 시도하면서 마침내 대조선 합횡을 선포하는 데 성공하고, 하남대전에서 조선군을 물리쳐 상승의 기세를 이어나가 위나라의 부흥에 다다른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본인의 어린 시절에 봤던, 어머니와 삼촌의 내전으로까지 이어진 불우한 가정관계와 대비되는 진의 자매의 화해가 트리거가 되어 일으킨 진나라 공격과, 거기에서 파생된 2차 중원대전에서 대패하며 나라가 다시 반으로 줄었고, 실권을 잡은 망묘에게 발언권이 밀려나 둘째 이하를 정치에서 최대한 배제할 정도로 피하고 싶어하던 자식들 간의 왕위다툼과 조선과 국혼을 한 어린 막내를 이용하려는 딸들의 모습을 보고만 있는 등 말년에 불운하게 되었다.
종횡대전에서 연종이 최종 승리하고 조선이 패권을 쥐게되자, 후계자 구도를 확실히 정하기 위하여 조선을 뒷배로둔 위포의 협력아래 장녀 위의 대신 유능한 모습을 보인 차녀 위리를 후계자로 정하였다.[3] 후계구위를 정리하는데 성공한 이후 기원전 289년 7월 위래는 세상을 떠났고 위리는 조정과 논의하여 시호를 밀(密)로 정하였다.[4]

위래의 둘째. 위래는 후계 구도에서 배제하고자 타국과 국혼을 시켰으나 오히려 국혼을 통해 세력을 키웠고, 전쟁 이후 실세가 된 망묘와 결탁하여 위나라가 연종 질서에 강제 편입된 뒤 국정을 이끌고, 이 과정에서 본인만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인면몰수까지 감소하고 몸소 합횡 붕괴 과정에서 단절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다시 터놓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능한 행보에 위왕 위래는 고심끝에 후계자를 장녀 위의에서 그녀로 변경하였고, 위래가 죽자 뒤이어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그럭저럭 위나라 국정을 운영[5]하고 있으나, 동생 위포와 더불어 상방 망묘와 힘겨운 기싸움을 진행하고 있는중이다.


2. 왕가 위(魏)씨[편집]


혹은 공중완(公中緩). 원역사에서는 위혜왕과 위나라의 권좌를 두고 내전을 일으켜 위나라를 망하게 할 뻔한 탁택 전투의 시발점이 된 인물.
... 이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이 과정에서 전투로는 당시 따를 자가 없던 명성을 자랑한 조선군의 협력을 얻고 매우 기뻐하였으나, 사실 조선은 업과 방릉를 댓가로 하여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었기에, 방심한 상태에서 수뇌부는 수뇌부대로 병력은 병력대로 조선군에게 제압당하는 양상으로 참패하여 위앵에게 보내져 처형된다.
...작품의 전쟁을 거의 꿰뚫어본(…)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전투민족 조선 떴다! 이걸로 이겼다!

  • 공자 위앙(AA:)
원 역사에서 상앙과 친분을 맺었던 위나라의 공자. 훗날 이 인연으로 인해 진나라 군대를 이끌고 온 상앙과 만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히고 서하 지역을 통째로 뺏긴 걸로 유명하다(...)
공숙좌의 사후 서하 주둔군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공손앙이 조선에 간 덕분에 역사적인 기만을 당하진 않았으나, 조선-제-한의 연합 공격에 위 동부가 아비규환 상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거량의 최정예병 2만을 추려서 치고 들어온 급습에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한다.

위혜왕의 장남으로 원 역사에선 마릉 전투에 나갔다가 전사한 인물.
조선이 제, 한과 함께 위나라를 칠 때 상당군 쪽의 방어담당이었으나 규모를 잘못 예측한 것이 화근이 되어 회전을 시도하다 탈출에 실패해 사로잡힌다. 이후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최소한 피를 덜 보게 하기 위해 자신의 관할지역의 수비병들, 그리고 긴급히 증원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으나 역시 규모가 부족한 상태에서 회전에 돌입하여 밀릴 조짐이 보이는데도 전투 속행을 결의하는 장평 성주를 설득하였다.
이후 조선의 예측을 뛰어넘는 호전성을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조선-위 간의 국지적 분쟁의 조정을 계기로 남편이 조선의 방계 공족이 되었다. 당장 위나라의 인재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했기 때문에 능력이 되는 이상 뭐라도 써야 한다는 매우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다만 조선에 대한 감정을 죽인 것은 아니어서 조선과의 외교를 위사에게 떠미는 행동을 하였다. 위사의 반란 이후 한을 공격할 준비를 하다 위사의 귀신을 보고 사망.

위혜왕 대의 장수이자 위나라의 공족. 사기에선 위조로 등장. 원 역사에서는 자치통감에 따르면 혜문왕 원년에 안문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역사에서는 위혜왕 위앵 그 다음의 위양왕이 되는 인물. 위신이 감정상 처리를 안 하려는 대 조선 수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위앵이 왕위를 위신에게 물려주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11만 3천의 대군으로 수도 대량을 포위하였으나 약 20만의 조선-제-송-한(+하동 지원군) 연합군[6]의 공격을 받자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량을 점령하는 것에 집착하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했다. 사망으로 인해 후손인 신릉군도 미처 등장조차 못 해보고 존재가 증발했다.
뭔가 이 인간과 엮이는 사람마다 전부 비참하게 죽어서 진짜로 위사 귀신이 있다는 말도 듣는 중(…)

위래의 첫째. 소진을 견제한다. 태자임에도 불구하고 위리와 망묘에게 밀려나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편. 하필 연종회맹에서 어머니 위래가 위리 대신 망묘를 보좌로 끌고 간 것을 자신에게 입지를 구축할 기회를 잡으라는 제스처로 오해한 탓에 분란의 씨앗이 싹터가고 있다.[7]
그러나 이미 후계구도를 바꿀것을 결심한 위래가 위포와 협조하여 위의와 위리 두사람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후계구도를 차녀 위리에게 주겠다고 선언[8]하자 아래와 같이 한탄하였다.
꿈을 심어주고.
길을 보여주고.
불어닥치는 풍파를 막아준 것은-
........마지막에, 그 모든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입니까?
회한에 가득찬 말을 마친후 위의는 후계자 변경을 인정하면서 물러나고 스스로를 자택에 유폐하였다. 물러나기전 막내 위포를 명재상감이라 칭찬하였지만, 뒤이어 이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 왕자 위포[9](AA: 아스톨포(Fate 시리즈)
위래의 셋째. 조선과 국혼을 하고 조선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우고 있다.
조선의 왕족과 결혼해서 위포를 끌어들이면 조선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나라 왕위 경쟁의 키퍼슨이다. 이 때문에 누나 두명에게 주목받고 있지만, 본인은 가족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자는 어린 나이에 걸맞는 순수함을 보여줬다.[10] 어장주(진행자)의 언급에 따르면, 이미 등장가능성이 완전히 일소된 원 역사 신릉군 위무기에 꽤나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기원전 282년 공현에서 한나라와 국지전을 벌였으나 상대가 전 위나라 출신인 위경에게 대패하였고, 이탓에 망묘 일파에게 정치적 공세를 당해 조선으로 보내졌다.


3. 기타 이름있는 자[편집]


원역사에서도 위무후 시절 상방을 맡았던 인물. 맹상군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오기와의 짧은 논쟁 이후 존재감 없이 어느샌가 수명이 다했다.

살아서는 위나라의 충신, 죽어서는 위나라의 귀신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인재.
역사와는 미묘하게 달라서 여기서는 오기의 위신이 너무나도 높기에 견제는 하되 서하에 오기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선에서 그쳤고, 때에 따라서는 오기를 변호해주기도 했다. 이후 오기가 은퇴 아닌 은퇴를 할 때 그를 붙들어 1주일 단위로 그의 병법 등을 사사했는데 그 성취도가 94%... 이를 바탕으로 지력 100등의 매우 향상된 능력치로 스레민들에게 일명 슈퍼 공숙좌라는 -추가로 이름에 기반한 숙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지력이 100인데도 조선-위의 조나라 합공 전후 처리에서 자리에도 없었던 기식에게 비단 주머니 하나로 논리에서 압도당한 것을 시작으로 위나라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다시피 했으나 위무후 위격 시절에는 위무후가 다소 무리한 명을 내려서, 위앵 시절에는 스스로가 백방으로 뛰는데도 능력치에 비해 다소 미진한 성과 등의 불운이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탁택 전투였어야 할 해프닝 이후로 위앵에 의해 위나라의 상방으로써 군권과 외교권등의 전권을 보장받았고, 이후 위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것을 결의한다.
공숙좌 본인이 거의 말년에 주도한 진나라 수도의 대대적인 공략에서 13여만을 동원하였으나 사습/거량 부녀의 운까지 따라준 압도적인 기량으로 인해 좌절되고 동원 병력의 약 1/3을 잃는 참패를 겪었고, 이 죄는 용서받았으나 위앵의 신임에 약간 금이 가고 말았다.
자신의 뒤를 이을 인재로써 평소 눈여겨보던 작은 위나라의 공족 태생인 공손앙을 키우고 있었고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위후에게 추천하면서 쓰지 않을 거라면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하면서 만남을 주선했으나, 위앵을 시험하고자 공숙을 폄하하는 발언을 한 공손앙에게 위앵이 분개해 공손앙의 등용이 좌절된 이후 공손앙에게 이미 위나라의 행패 등으로 인해 공숙좌는 몰라도 위나라는 미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듣는다. 그렇기에 위후를 시험해봤다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애원하다시피 이 늙은 것을 봐서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고 하는 공숙좌는 공손앙의 이미 마음이 돌아섰다는 선언에 좌절한다. 결국 약 10일 후에 노환 등으로 인해 삶을 마친다.

위나라 최종병기 1. 손무와 쌍벽을 이루는 전설적인 군사 이론가이자 명장. 오랜 기간동안 위나라에서 망명 생활을 했었던 영사습의 표현에 따르면 사람이 아닌 자.[11] 워낙 유명한 인물이지만 원 역사처럼 상방 전문에게 대놓고 따질 정도로 성질머리 역시 그대로인지라 스레민들이 위나라 견제를 목적으로 흉노를 용병으로 하여 서하지역 약탈을 활용해 역사대로의 방출을 기도했었다. 처음엔 오기라는 이름값 답게 오는 족족 흉노를 갈아버렸으나 흉노 선우가 서하주둔군을 피하고 오로지 백성을 대상으로 한 약탈작전으로 선회하자 골머리를 싸맨다. 보다못한 오기가 추가 지원을 위무후에게 여러번 요청했으나 위무후가 이걸 씹고 파직 크리를 내리면서 스레민들의 계획대로 되는가 싶었는데...
그러나 위무후가 미묘하게 관대하거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공숙좌도 오기를 모함할 뿐이었던 본래 역사와는 달리 경우에 따라서는 변호도 한 덕분인지, 오기 본인도 자신이 이렇게까지 출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선대 위문후를 비롯해 자신을 믿어주고 뒷받침해주는 사람이 있었음을 인지하고 위무후가 내린 태부 자리를 마다하고 군무에서 은퇴 아닌 은퇴.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위나라 동부로 이동하여 제나라의 암살로 명을 달리한 서문표 대신 동부군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여생을 보낸다.덤으로 주마다 따라붙는 스토커가 생겼다. 은퇴는 했지만 동부군 사령관이라는 직함은 남아있는지라 조금 늦기는 했지만 중원대전을 벌인 제나라의 계획을 알아채고 군을 움직여 승구를 구원하고, 동부군을 이끌고 한단 공략전에 참전하는 등, 명성에 걸맞는 노련한 지휘를 선보였다.
조선-위 간의 태자교환으로 인해 당시 조선의 태자였던 기이가 위나라에 들어왔을 때 다른 위의 걸물들과 함께 그 자질을 경계하였으나[12], 어느날 기이에게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위문후 위사의 모습을 본 끝에 홀리듯이 노망이 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게 된다. 이후 기원전 379년에 사망.

악자의 아버지. 여기서는 증산국 정벌 때에 손을 써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을 탈출시켰지만, 소문은 역사와 거의 다르지 않게 났고 이후 자신의 연로함을 이유로 굳이 중책을 맡지 않으려 한 채 한직을 맴돌았다. 이후 서문표의 주선으로 악자와 만날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일족 중 가장 공명을 떨친 것을 명분으로 악자를 악씨 문중의 차기 당주로 임명한다.

의외로 마당발인 위문후-위무후 시기의 명장. 원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게 사건이 소문난 악양과의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에도 조나라 상방 공중련과도 사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다.
결국 위무후 시절에 조나라에 대한 횡포가 심해진 것을 계기로 조선과 연합한 조나라와 싸우게 되는데, 공중련이 전사하면서 씁쓸함을 표하다 이 때 뒤늦게나마 지원 온 악자와 조선군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 마주치자마자 악양의 딸임을 알아보고 더 이상의 피를 보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에 응하여, 이후 악양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악양이 병에 걸려 악씨의 차기 가주를 임명할 때 드러난 바에 따르면 아예 악양의 본심을 간파할 수준이며, 이후 동부군을 담당하다 제나라의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역사대로의 공명심에 언젠가 손빈을 족쳐놓을 생각이었지만, 출세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아서 손빈이 스스로 방연의 연줄을 포기하여 연이 끊겼다. 이후 작은 위나라를 선동하여 자신의 휘하 병력과 함께 일시적으로 읍성 하나를 점령하였고, 제의 증원으로 후퇴할 때 사건의 원인을 작은 위나라에 성공적으로 뒤집어씌우는 등의 능력 또는 만행을 보여 공숙좌의 눈에 띄어 승진과 동시에 목줄이 채워졌다.
공숙좌 사후 위앵에게 상당히 중용되는데, 이 과정에서 정말 마음대로 날뛰는 동시에 작은 위나라와의 유착과 한나라의 증원 요청을 성의가 부족하다 란 이유로 씹어버리는 등 부패하여 조선이 결정적인 순간에 위나라를 배신하고 제한연합군과 함께 위나라를 합공해 상당군을 상실하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다. 덕분에 방연이 어떤 놈인지 제대로 알게 된 위앵에게 단단히 찍혀서 대량으로 천도한 위나라의 수도방위사령관 정도로만 기용되고 그 외의 일에는 철저히 배제당하고 있다.
진나라가 손빈을 통해 서하의 완전한 병탄을 마무리 지으려 할 때 서부 방어선에 막 배속되었던 탓에 서부군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손빈에게 참패를 당하고 목숨이 위중한 부상을 입고 달아났으나 명이 다하는 결말을 맞았다.

위혜왕 대의 장수. 원 역사에서는 공숙좌의 입을 통해 파녕과 세트메뉴로 짤막하게 언급된 정도? 특이사항으로 원래는 군무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고도 이내 회복해버린 전적이 있다. 중원대전이 벌어지기 전에 사망했는데, 상기한 이유로 본래 단짝(?) 이었던 파녕 또한 명을 다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사기에는 왕착(王錯)으로 나온다.(錯이 착으로도 읽을 수도 있고 조라고도 읽을 수 있기 때문.) 원 역사에서는 위무후-위혜왕 대의 신하로 오자병법에 따르면 오기와는 앙숙관계였다고 나온다. 위혜왕 대에는 상방을 지냈으며 위혜왕에게 방연을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태평광기에 따르면 귀곡자 왕리(王利) 혹은 왕후(王詡)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탁택전투였어야 했을 사건에 등장하여 공자 위앙 등을 포섭해 위앵과 일종의 거래를 시도했으나, 애초에 위앙은 군주란 거래 및 교섭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쳐야 할 존재라 생각하기에 이미 공숙좌와 짜고 적절한 때에 등을 돌렸다. 이에 당황하여 급하게 말을 바꾸는 등의 추태를 보이다가 위앵 및 공숙좌의 명을 받은 흔양에 의해 처형된다.

위혜왕 대의 장수로 원역사에선 오기 이후의 서하 지역의 담당자이다. 당연히 삼국지연의의 이 사람이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 여기서는 공숙좌 이후 서하태수로 부임하였는데, 오기와 공숙좌가 쌓아올린 장성과 서하주둔군의 숙련도 덕분에 진헌공 영사습이 이끄는 진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다가 공숙좌가 총지휘한 서하대전에서 영거량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다가후궁이 될 뻔하고 귀환. 이후 파직되면서 출연 끝.

위혜왕 대의 장수. 원 역사에서는 이 사람도 상앙은 물론 훗날 진혜문왕과도 좀 많이 얽힌다.
공자 위앙의 사후 서하를 담당했으나 손빈이 진나라 특유의 아득한 숙련도의 병력 약50000명을 이끌고 오자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바로 후퇴하였다.[13]
이후 위후 위앵의 명으로 조선령으로 넘어간 중도 성을 4만여의 병력으로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그곳에는 조선의 문관 세가 있어 시간이 끌렸고, 뒤이어 당시 일개 현령이었던 고정이 훈련도가 낮은 병력으로나마 위군의 배후를 들이치자 전투를 벌이기 이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던 위나라의 재정상태를 감안한 판단으로 후퇴한다.
이 과정에서 추격까지 허용하여 결과적으로 적보다 약 4배의 병력을 가지고 4배의 병력을 잃은 기적의 교환비를 달성한 끝에 위앵의 신임을 잃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조선-위 간의 국지적 분쟁의 사후 조정의 결과 위나라와의 혼인동맹을 위해 보내진 조선의 방계 공족, 위후 위앵의 입장을 빌리자면 위나라와의 혈맹관계를 배신한 국가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하고도 좋게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위앵은 겨울연가 팬이라는 유언비어가 스레민에게 퍼졌다 카더라 위신의 남편자격으로 같이 참전한 대 초나라 합종전에서 조선군과 위군의 충돌을 무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후 공손연의 농간 내지는 설득으로 인하여 위신과 별거 상태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자식인 위래를 훌륭히 키우고 비공식적인 루트지만 위사의 반란 소식을 조선에 직통으로 전하는 등 조용히 활약하였다.
참고로 AA 선정 당시에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다이스를 굴려서 나온 결과는 둔재였는데 참치가 아이젠을 앵커해 버렸고, 어장주는 변태가면 같다고 직설적으로 까면서 이 이후로는 이전에 굴린 다이스와 캐릭터의 속성이 모순되는 것 같다면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삼인성호라는 사자성어로 유명한 인물. 한-송이 한의 월경지역을 이어두는 전쟁을 벌일 때 대언의 4만 병력을 지역방위군과 함께 막아내며 데뷔전을 치뤘다.[14] 여기서는 방연의 조카로 등장한다.

  • 옹저 (AA: 누노타바 시노부)
쓸모조차 없던 배신자
위사의 난 당시 사전작업으로 하남 각지 유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권 보장 실무를 맡았고, 이 부분을 얼마나 잘 처리했는지 무려 11만 3천이라는 대군이 군기조차 원만한 채로 위사에게 주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왕도 대량을 포위한 자신들을 향해 열국의 병력들이 토벌을 위해 몰려오고, 반군의 수괴인 자신의 주군이 동요 끝에 이성을 상실하고 대량을 공성하라는 명령을 강요하자[15] 그대로 위사를 죽이고 자기 밑의 병사들과 함께 입을 맞춘뒤 도하저지병력을 쳐서 자신들의 의도를 증명할 계획을 세우나, 성의 상태 때문에 이미 비비오에게 들켰고, 공손희가 이끌던 도하저지병력을 상대로 자신의 정체에 물증을 더해줄 고위급 포로들을 입막지도 못하였다.
반역한 것도 모자라 한 배를 탔던 동지들 목숨도 헌신짝 버리듯 여긴 그 행태는 그 누구도 이들을 비호할 생각을 가지지 않게 하였기에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전 군은 즉시 옹저와 밑의 병사들에게 죄의 댓가를 치루게 하였다.

  • 공손희 (AA: 앨리스 신서시스 서티)
위사의 난 당시 위사측의 장군으로 대량성 공략도중 후방에 조제연합군이 나타나 후방을 위협하자 5만을 이끌고 이를 적절히 방어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군의 눈속임으로 투제가 이끄는 1만의 조선기병이 도하하여 위협하자 본대의 옹저가 위사를 죽이고 투항하고 자신들의 배신을 숨기기 위해 공손희를 제물로 삼는다. 옹저의 음모를 눈치챈 투제가 전벽강에게 알렸고 이에 전벽강이 공손희에게 사실을 알려주며 투항을 권고하였지만, 공손희는 이를 적의 계략이라 여기며 믿지 않았다. 나중에야 옹저의 모습을 보고 분노에 가득차 더욱 가열차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이미 여러차례 전투로 지칠대로 지쳐있을때 후방에있던 투제가 직접 기병을 이끌로 공손희군을 돌파하여 공손희 앞에 도달하니 두 장수가 칼춤을 추지만 투제의 실력에는 못미쳐 그녀의 칼에 목이 베여 죽는다.[16]

중원제일궁[17]
위나라 장군으로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의 소유자. 위앵 재위기 대진전선을 담당하는 하동 태수로 첫등장을 하였디. 2차 위나라 내전이후 진나라가 위나라 하동을 넘보기 위한 국지전에서 활약하였지만, 태자 위신의 무리한 한나라 공격 명령에 반발한 탓에 명령위반죄로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위신이 갑작스럽게 즉사하고 태손 위래가 구명하여 다시 복직하였다. 이후 2차 서하대전, 산동대전, 관중공략전, 하남대전 등 굶직한 대전에서 활약하여 위군의 기둥이라는 평을 받게된다.
그러나 기원전 297년[18] 북방 방어선 순시중 그녀를 노리고 있던 의거의 아탈란테에 저격당하여 사망한다.[19]
위래 제위기 위나라를 수호하는 수호신이었기에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한 위는 이후 몰락하기 시작했다.

위사의 난 당시 위사의 장수으나, 내전이 끝나고 위왕에 오른 위례의 요청으로 다식 복직하고 식객으로 와있던 임홍과 함께 대 한나라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함곡관 전투에 실패한탓에 이후 크게 중용받지 못하였고 남들 다 달아보는 경하나 달지 못한 사실에 스스로도 운수 박복하다며 임홍앞에서 한타였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빛을 보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임홍과 만난 그 다음날 쓸쓸히 졸하였다.

하동의 아들원 역사에서는 종횡가로 활약한 사람. 위사파에서 위신파로 줄을 갈아타거나 하는 영악한 모습을 보여줬다. 위나라 내전에서는 주나라를 겁박해 주나라는 공손연이라면 치를 떤다. 위나라 내전 이후 공손연의 기반인 하동은 멀쩡한데 하남은 황폐화되고 정적 전수는 해임되어서, 권신으로써 위래에게 위협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래가 서하를 되찾아오고 왕권이 강해지자 소진에게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었다.[20] 그러던 중 위나라가 진을 공격하면서 온갖 혐성질을 다 부리면서 음진 공격에 나섰고, 조선이 위의 배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도 모자라, 음진현령이 낙하산으로 들어온 젊은이인 것을 보고 방심했다. 문제는 네임드 보정까지 받은 음진현령 조사는 이미 위의 배신을 알고 있었고, 음진에서 사로잡혀 심문당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초래된 음진 방면군의 지휘체계 혼란과 내부의 분열, 이어 들어온 백기의 증원군에 자신이 직접 길러낸 정병이 모조리 수장당하고 공성군은 단순히 질량으로 들이받다가 나가떨어진 상태로 합공을 받아 와해되는 환장의 상황을 목도하고는 졸도하였다.[21] 이후 진나라에 인솔되어 처형당한다.

원래 진나라의 장군으로 무의 임비라 불리울 정도로 진나라 내에서 임비와 1대1로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의 장사다. 2차 서하대전 당시 소관을 담당하였으나 조위연합군의 맹공에 결국 성을 내어주게되었다. 패전하였으나 스스로 후미를 맡아 아군의 퇴각을 도왔고 그와중 악의와 일기토를 벌여 그의 실력을 크게 평가하고 물러난다.
패전하였으나 임비만한 장수가 없었기에 무관을 담당하게 되었으나,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무관 방어에 실패한 뒤 도주하여 위나라로 갔다. 이후 신분과 외모, 이름을 바꾸고[22] 위나라로 도주하여 위장의 식객이 되었는데, 위장이 한나라령을 공격할때 부장으로 동행하여 활약하고, 초의 명장 경취와의 싸움에서 활약한 공으로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다.
공손연 사후 하동군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처지가 비슷했던 위장과 가까웠던지 그녀가 빛을 보지 못하고 졸한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눈물을 흘렸다. 2차 중원대전에서 하동을 지키기위해 노력하였으나, 정세판단의 착오에 더불어 하기의 계략에 속아 대패하여 하동을 통째로 조선에 넘겨주었다. 그래도 옛날 실력 어디 안가서 포위망을 개인의 힘으로 뚫고 북방에서 반격하려 하였으나, 그때 조선과의 협상이 이루어져 무장해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위밀왕이 죽자 미련없다듯 제나라로 임관하였으나 임관 다음해에 졸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끝내었다.

소진의 동생. 소진이 가장 믿고 일을 맡기는 인물. 소대가 이상한 말을 하면 그것을 해석해서 수습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소진 실각 이후 언니 대신 위래를 보좌하였고, 위래 사후 쓰러진 언니 소진을 간호하였다. 언니 소진과 오빠 소려와는 달리 안정적인 생황을 동경하고 있었기에 각각 초와 한으로 간 소진, 소대와 달리 위에 남았고 위리의 최측근으로 국정을 보좌중이다.[23]

제위왕의 추천으로 위나라의 상방이 되었다. 제나라 왕족의 후손이지만 위나라를 진심으로 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제나라 왕족이었기 때문에 견제를 받다가 쫓겨나서 맹상군의 식객으로 살다가 죽는다.

위나라의 장군으로 관중침공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위나라의 대패 이후 깔끔하게 항복하면서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살렸고 그로 인해 인망을 얻었다. 송으로 시집갔던 위리를 다시 불러들이고, 위리가 왕위에 오르고 함께 전후 위나라의 국정을 이끌면서, 동시에 상호간에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가 되었다.

위나라 장군, 원역사의 진나라의 명장 몽무의 아버지이자 몽염의 할아버지로 본인 역시 그럭저런 한가닥 하는 장수다. 제나라 출신으로 위로 넘어와 장군이 되었고 첫출진은 함곡관 공방전에 앞서 한군을 함곡관에 넣기 위한 위장 전투에 지휘관으로, 이후 위장의 부관으로서 함곡관 공방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이후 대진운이 좋지 않았는데 하남대전때 하수도하전에서 염파가 지휘하는 조선군의 기동력에 휘말려 대패하고, 이후 2차중원대전때 조가성 전투에서 양수와 조사 콤비에게 또다시 대패 하여 결국 위래에게 징계를 받게되었다.
징계가 풀린 이후 상구대전에서 조위연합군의 후방병참 담당으로 참전[24][25], 조위연합군이 경취가 지휘하는 합횡군을 상대로 승리하자 덩달아 위상이 오르게되어 위국내 한정으로 몽오 더 미라클, 몽오 더 매지션이라는 별칭이 붙었다.[26]
영통의 난 당시 위왕의 파벌에 군문 쪽으로 내세울 인재가 없었던 대다 하동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위군의 장으로써 파병되었다.

상기한 대부 경리의 후임으로써 일대의 위무가 우선시되어 그 연륜[27]을 바탕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진짜로 당시 위나라에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부족하여 어떻게든 고른 것. 중원대전에서 흉노가 귀뜸해 준 정보의 신뢰성을 일언지하에 일축하여[28] 결국 대응에 차질을 주었다.

합종론으로 유명한 그 소진이다. 위래 재위 직전 고조된 한-위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위래의 눈에 띄었다. 당시 실세이던 공손연이 정적인 전수의 식객인 소진을 대놓고 견제해서 위나라를 뜰려고 했지만, 위래가 파격적으로 객경에 임명하고 자기를 믿어주자 뻑 가서 위나라에 남았다. 이후 위나라의 외교를 담당하면서 전방위로 활약했다. 특히 합횡군을 처음으로 제시해서 조선을 견제할 것을 주장하고 다이스 운이 상당히 좋은 편이라서 참치들의 두려움을 사기도 했다.[29] 결국 대조선 합횡 조직에 성공하기까지 한다. 위나라가 아니라 위래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나, 조모씨나 웅모씨 같은 파격적인 바보들에게는 페이스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어장에서 종횡가의 끝이 비참하다지만[30] 현황은 현재 등장한 그 어떤 종횡가보다도 좋은 편이었으나, 2차 중원대전에서 계속 지적받던 위래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해 위래가 트라우마에 떨며 분노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여겨서(….) 왕을 말리지 못했고 전쟁의 패배 책임을 지고 상방에서 아경으로 직위가 깎이고 봉지를 반납하였으며, 가볍게 육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정치적으로 몰락해 가족들과도 제대로 못 만나고 관청에 나가는 것도 금지된 상황이지만 조선왕의 지원으로 어느정도 생활을 보장받는 중.[31]
초나라가 연종에 가입하도록 유도한 공적으로 복귀하였고, 위래가 후계문제에서 위리가 보인 공적 등으로 자문을 구할 때 불려가 뭐가 되었든 상관 없지만 결정을 빠르고 확실히 해 둘 것을 진언하였다. 이후 위래가 죽자 크게 슬퍼하며 실신하였고, 소려의 간호로 회복한 뒤 임관 요청을 받은 초나라로 떠났으나, 종합적으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영입했던 경가로부터도 버려지고, 초나라에서 쫒겨난 뒤 가족들을 다시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행적이 끊겼다.

망묘의 책략을 견제하기 위하여 위왕 위리가 하동군수로 임명한 인물. 망묘는 몽오로 부터 별볼일 없는 인물이란 평을듣고 방심하였지만, 군수에 부임하자마자 하동을 장악하여 망묘의 계책을 방지하였다.[32]


4. 기타 이름없는 자[편집]



엑스트라로써는 가장 한에 사무친 삶을 살게 된 이 중 하나.
중원대전 당시 둔류가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원군으로써 장평의 병력 4만을 모조리 이끌고 이를 지원하려 둔류로 향했지만, 이미 공자 위신을 사로잡고 둔류를 손아귀에 넣은 조선군에 의해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 중간 지점에서 회전을 치루게 되었다.
3배 가량의 규모 차이부터 하여 기울기 시작한 전황에도 물러나지 않고 싸우다 죽을 각오로 명을 내리기 직전, 대세가 결정난 이상 더 이상 피를 보게 둘 수 없었던 위신의 간곡한 설득[33]을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여 병사들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전을 중지한다.[34]
가용 가능한 병력을 이렇게 모두 잃은 장평 또한 뒤이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평균 수명 상 죽은 이후에도 다시금 조선이 조국의 영토를 또 확 줄이는 데 일조한 것을 생각하면 죽고 나서도 눈이 안 감겨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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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이가 위나라에서 딸 기토를 낳았을때 기토에게 자신의 이름을 격을 줄려고 하였을 정도다. 자신의 이름을 준다는것은 그 상대를 거의 친족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다.[2] 전과는 달리 다른 나라의 군대도 위나라 국왕군을 지원했지만, 일단 그 공로의 지분은 조선이 제일 컸다. 추가로, 위사의 거병 소식은 비계승권자지만 엄연히 공족이었던 기람을 통해 비공식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조선에 신속하게 전달되었다.[3] 위포가 가세한탓에 이미 가망이 없을음 안 위의는 이를 수용하고 스스로 자택에 유폐하였다.[4] 죽기직전 그녀가 원한 시호는 은(隱)이지만 위리가 받아들이지 않았다.[5] 도박적 수단으로 패가망신한 어머니 영향때문인지 절대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국정을 돌보고 있다.[6] 이 연합군은 메타적으로 숙련도가 고작 36인 송 지원군을 제외하면 전부 숙련도 80 이상이었다. 그나마도 숙련도 84인 하동군을 빼면 전부 숙련도 90 이상.[7] 그도 그럴 게 여지껏 위래는 후계구도에서 태자 이외의 자식들을 배제하는데 집중했다가 좌절당하고 이후 위리가 나름대로 공을 세우면서 마음이 돌아섰으나, 위포의 요구로 가족이 그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게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때문에 위래 입장에서 후계에서 위의를 배제하지만 그렇다고 죽일 뜻까지는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위나라의 역사까지 감안해서 망묘를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위의에게 절실한 입지 구축 기회를 제공하고, 위리에게 절실한 자신만의 입지 구축 기회를 박탈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8] 대신 목숨만큼은 유지해주겠다고 보증하였다.[9] 포는 이름이 아니고 자이며, 이름은 유실되었다는 설정이다. 덤으로 포의 한자는 砲인데,어린 나이에 강궁을 잘 다루어 지어졌고 연초에 있던 아스톨포 코스어의 몬스터 캔 급 XX와 엮어 이것을 떠올리는 참치가 많았다.[10] 순수함과는 별도로 나라 안팎과 고금의 상황을 나름 꿰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어머니에게 가족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되는 것만은 피하게 하라는 요구를 할 정도로 강직하다.[11] 아예 스레주가 대놓고 괴물이라 언급했다.[12] 정확히는 기이 개인에 대한 경계라기 보단 조선에 대한 경계심에 가까웠다.[13] 작중 본인 입으로도 언급되지만 주전공은 축성이었지 수성이 아니었는데, 하필 그 순간 이끌던 병력의 규모와 질이 각각 진나라의 절반 가량밖에 안 되었다.[14] 그 과정에서 19%라는 피해를 입기야 했지만, 명장인 대언을 병력의 질, 양 모두 열세인 상황에서 잘 막아낸 것이다.[15] 대량을 포위하는 병력은 총병력에서 도하 견제 문제로 분할되어 5만밖에 없었는데, 대량 자체는 위나라의 당시 왕도로 차고 넘칠 만큼 견고한 성채이기도 하였다.[16] AA는 유명한데 허무하게 가버린 케이스[17] 경궁지조(驚弓之鳥) 말 그대로 활만 들고있어도 나는 새가 놀라서 떨어질 정도의 명궁이다[18]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하는 시점이었다.[19] 이후 그녀가 담당하던 서하군수는 초사가 물려받았다.[20] 소진이 공손연을 견제하는 것이 좀 심해서 위래가 살짝 불편히 여기기도 했다.[21] 본인 입장에서는 졸도한 게 차라리 정신을 차린 편일 정도의 상황이었다.[22] 메타적으로 AA가 오오가미 사쿠라에서 플랑드르 스칼렛으로 바뀌었다. 참치들 모두 중화의술의 신비에 경악하였다.[23] 소대는 그런 소려를 보고 남매중 가장 제위왕의 영향을 적게 받았다고 판단하였다.[24] 위국이 동원한 병력이 4천뿐이었기에 조사가 후방병참을 맡겼다. 때문에 명목만 연합군이지 싸움은 조선군이 혼자서 다했다.[25] 그러나 조선군 총사령관인 가현이 보급계획은 잘짰으나 보급의 호위는 생각하지 않았기때문에 몽오가 어느정도 공을 세운것은 맞다[26] 몽오 본인이 위의 전공을 부풀려서 말하였고, 망묘가 자신의 파벌로 들어온 몽오를 추켜세워 파벌의 위신상승을 노렸기에 별다른 의심은 받지 않고 위국내에서 명장소리를 듣게되었다. 보급선의 호위를 전적으로 도맡은 셈이 된 것 때문에 조선 측 지휘관들이 공이 있다는 점을 굳이 부인하지도 않았고. 이때 몽오는 자신을 조선의 조사, 진의 사마착, 초의 경취와 비할만하다고 말하며 자아도취에 빠졌다.[27] 등장 당시 연령이 50세(...) 지만 나름 용력을 자랑하는 지라 [28] 경리의 죽음의 배후에 흉노가 있다는 확신이자 오해도 있었고...[29] 다만 이게 소진의 전력은 아니라고 공인된 것이, 지금 소진은 위나라에 묶여있기에 합횡 결성이나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하기는 오히려 힘들다는 듯.[30] 소진과 세트로 묶여 종횡가 하면 소진과 함께 떠올리는 장의는 진에 사신으로 갔다가 처형당했으며, 조선의 종횡가 고애는 할머니인 고정이 조선상이었기에 목숨은 건졌지만 고문당해 뜻이 꺾이고 평생 한직에 머물렀다.[31] 이를 인상여에게 꿰뚤어봐지고 처음으로 수싸움에서 정면으로 밀려서 극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2] 이로인해 망묘가 신원연의 이름을 기억해 두겠다며 분노하였다.[33] 위신 왈: 미안해, 내 잘못이고, 공가의 잘못이야. 우선순위를 망각한 채로 겉치레에 치중한 결과,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염치없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 않겠어? 이번에는, 이번에는 정말......[34] AA의 영향인지 능력은 있으나 정의가 승리한다는 관점을 지녀왔던지라 기만적인 방식으로 당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때 눈앞의 현실을 바로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