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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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己巳換局

숙종 15년(1689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사건이다. 숙종대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환국이다. 이 기사환국은 보복성 숙청도 짙었던 환국이었다.


2. 상세[편집]


발단은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의 원호를 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호를 정한다는 것은 곧 이 아들을 숙종의 공식 후계자인 왕세자로 지정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원자란 정궁에서난 임금의 맏아들로 중전이 적장자를 생산하면 자연스럽게 원자라 불렸다. 즉, 서출 원자정호라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였다.[1]

후궁 소생의 왕자에게 원호를 정해준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며, 송시열을 필두로 김만중 등 서인들이 반발하였다. 중전인 인현왕후가 동춘당 송준길의 외손녀로써 서인 명문 출신이고 반면에 장희빈은 중인 출신으로 역관 장현의 딸이니 서인 입장으로썬 당연히 원호를 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인현 왕후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3][4] 이를 빌미로 숙종은 서인들을 대거 숙청한다. 송시열[5], 김수흥[6], 김수항[7], 민정중[8], 조사석[9], 이상진[10], 김익훈[11], 김만중[12], 이사명[13], 여성제[14], 남구만[15], 박세채[16], 윤지완[17], 남용익[18], 유상운[19], 홍만용[20], 이익[21], 윤계[22], 이익상[23] 등 서인의 거두들이나 중진들이 줄줄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떠나거나 파직된다. 이렇게 조정 내의 서인 세력이 몰살되면서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도 폐출되고 후궁이었던 장희빈은 왕비로 승격된다. 단, 원호의 지정과 인현왕후의 폐출 자체는 남인 측도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숙종이 원호 지정과 인현왕후의 폐비를 주장하면서 내건 명분과 행동이 너무 막무가내여서[24] 남인조차 차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남인들도 '여자로서 질투는 흔히 있는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하십시오'[26], '왕후로서 당연한 예법을 가지고 왜 이리 진노를 하십니까?'라며 인현왕후를 옹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인현왕후의 폐출 및 장희빈의 왕비 승격을 강행했다.

여기서 청년 군주 숙종의 강경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송시열과 김수항을 사사한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 - 현종 - 숙종 세 임금의 사부이자 당시 서인 산림의 영수였다. 그리고 김수항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충절을 지킨 그 대사헌 김상헌의 손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경신환국 직전 철원에 가 있었던 상황에서 영의정에 임명되어 경신환국 기간에 급하게 서울로 돌아왔던 사람이었다.

이후 5년간, 정국은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심재, 이관징, 권대재, 민종도, 유명천, 유명현, 이우정, 권유, 이현일, 이서우, 이담명, 정유악, 신후재, 윤심, 민암, 목창명, 장희재, 민장도 등의 남인이 이끌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남인의 마지막 집권기였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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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해군도 서출 왕자군의 신분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원자-왕세자 테크를 타지않았다.[2] 이보다 200~300여년 전, 장경왕후 사후 새 왕비를 정할 때 중종이 평민 출신 후궁인 경빈 박씨를 새 왕비로 맞으려고하자 정광필이 왕비는 좋은 집안에서 맞아야 한다고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이는 신분제적 측면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도 애초에 모계의 신분이 낮으면 아예 계승 자체가 막히는 유럽을 생각해 보면 이왕 같은 값이면 외가도 빵빵해야 결혼한 왕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중에 그 아들이 왕이 되어서도 도움이 되는건 너무 당연하다.[3] 물론 이것 말고도 성급하다는 것과 현실적인 측면도 한 몫을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조선왕조 역사상 이 때까지는 서출에게 원호를 정해주는 것은 전례가 없고 왕의 나이도 고작 28~29세라서 얼마든지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볼 수 있었다. 즉 기껏 원호를 정해놨더니 인현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왕위 계승 순서가 꼬여서 피바람이 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서인들의 반대는 정치적인 면도 있었지만 적법한 절차와 후대를 위한 측면이라는 현실적인 면에서도 일리가 있었다. 거기다가 장희빈 집안이 '고작' 중인 따위이니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2] 그렇기에 명분이든 현실이든 서인측이 한참 앞서 있었다. 툭까놓고 보면 서인측은 너무 맞는 말을 하는데 숙종 혼자 개무시하며 내 말대로 하라며 우기는 상황인 것.인조 시기에도 이거 본 적이 있는 거 같다.[4] 게다가 설사 숙종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당시는 숙종의 법적 증조할머니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가 세상을 떠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말하자면 국상 중이었다. 현대 입헌군주국이라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왕실 어른의 국상 중에는 적자 내지 적손이 태어나더라도 3년상 내지 최소 1~2년은 지나고, 이후에 책봉 등의 절차를 지내는 게 예의인데 이 당시에 더욱 논란이 될 만한 서출 원자 정호를 함부로 그것도 국상 중에 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다혈질에다 감정적인 숙종 입장에서는 자신을 견제할 마지막 왕실 어른인 장렬왕후의 사망을 기회로 황급히 일을 추진한 것이겠지만, 역시 이러한 정황이 다 눈에 보였을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국왕이 왕실 최고 어른의 국상 중에 패륜에 가까운 막무가내 행위를 저지르려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5] 전 좌의정, 당시 영중추부사를 하다가 봉조하로 가게 되었다. 현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했다.[6] 영의정,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를 하다가 다시 영의정에 오르게 된 것이다. 현종 말에도 영의정을 잠깐 한 적이 있다. 귀인 김씨의 종조부이다.[7] 전 영의정, 당시 영돈녕부사였으며 현종 때 우의정, 좌의정, 숙종 때 영의정이었다. 역시 귀인 김씨의 종조부이다.[8] 전 좌의정, 당시 판중추부사였고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인현왕후의 백부이자 숙종의 처백부이다.[9] 전 좌의정, 당시 판돈녕부사에 있었으며 곧 영돈녕부사로 올랐다. 기사환국 이후에도 퇴출되지는 않았으나 2차숙청 때 곧 귀양에 처해진다. 숙종 때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장렬왕후의 조카이다.[10] 전 우의정,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남구만과 같은 소론이었다.[11] 전 광주유수, 숙종 때 공작정치의 달인이며 문관직으로는 형조참판을 지냈고 무관직으로는 어영대장으로도 있었다.[12] 전 좌참찬, 인경왕후의 백부이며 공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고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썼다.[13] 전 병조판서, 노론 4대신에 속해있는 좌의정 이이명의 형이다. 김석주의 공작정치를 도왔다.[14] 좌의정, 기사환국 이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서인에 속하여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을 옹호하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귀양을 떠난다. 다만 석방되면서 영의정에 잠깐 올랐고 기사환국 이후 조정에 남아있었지만 결국 2차숙청 때 조정을 떠났다.[15] 전 영의정, 당시 판중추부사에 있었으며 소론의 거두였다.[16] 우참찬, 숙종 때 이조판서를 거쳤다.[17] 병조판서, 숙종 때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문관직을 지냈고 광주유수, 강화유수 등의 지방관직도 거쳤으며 어영대장 등 무관직도 역임했다.[18] 이조판서, 숙종 때 서인 정권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했다.[19] 호조판서, 유봉휘의 아버지이고 숙종 때 공조판서를 지냈다.[20] 전 예조판서, 숙종 때 공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21] 광주유수, 숙종 때 서인 정권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쳤다.[22] 전 공조판서, 숙종 때 호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했다.[23] 전 이조판서, 숙종 때 공조판서도 지냈다.[24] 막무가내이기도 하려니와 애초 인현왕후의 신분이 왕비인지라 남인들도 감히 폐비에 적극 찬동하기는 힘들었다. 말하자면 정식 왕비와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싸움인데 그럼 호오에 관계없이 전자다.[25] 어느 정도냐면 사씨남정기의 주인공 사정옥에 대해서 사정옥은 유교적으로 이상적인 여인상을 담아낸 인물임에도 당대 양반들은 저런 아내를 얻고 싶다고 생각한게 아니라 반대로 답답하게 여겼다(...) 그리고 사정옥의 현실판인 폐비 신씨 역시도 당시 사관은 '중전이 너무 착해서 답답하다' 수준의 평을 내놨다... 그만큼 당시에도 사람이 너무 착해도 문제로 여겼다.[26] 여담으로 이는 이미 폐비 윤씨때에도 써먹어졌다. 본디 칠거지악에 따르면야 질투도 잘못이긴 했지만 어차피 질투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심지어 암묵적으로는 질투를 너무 안 해도 문제로 여겼기에[25] 이런 논리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27] 남인 정권도 재집권 초반기에는 신중한 면이 있었지만 결국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장희재 세력과 결탁하다가 결국 갑술환국으로 몰락을 자초한다. 이후에도 재집권을 위해서 여러 수를 썼지만 신사무옥(무고의 옥), 이잠의 옥사, 임부의 옥사, 경인환국, 병신처분, 을사처분, 이인좌의 난, 기유처분, 경신처분, 신유대훈, 나주괘서사건으로 계속 몰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