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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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왕국의 왕대비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Πριγκίπισσα Ελένη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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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리스어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Ελένη της Ελλάδος και της Δανίας)
루마니아어
엘레나
(Elena)
출생
1896년 5월 2일
그리스 왕국 아테네 구왕궁
사망
1982년 11월 28일 (향년 86세)
스위스 로잔
배우자
카롤 2세 (1921년 결혼 / 1928년 이혼)
자녀
미하이 1세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조피
형제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 파블로스, 이리니, 에카테리니
종교
그리스 정교회루마니아 정교회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망명과 결혼
3.3. 왕세자비와 이혼
3.4. 카롤 2세와의 갈등
3.5. 왕대비
3.6.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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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왕국의 왕대비이자 그리스 왕국의 공주. 루마니아의 마지막 국왕 미하이 1세의 어머니다.

애칭은 시타(Sitta).

2. 작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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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3. 생애[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1896년 5월 2일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왕세자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오빠 알렉산드로스가 여동생(Sister)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여 생긴 애칭 시타(Sitta)로 불렸다. 엘레니는 3살 차이인 알렉산드로스와 가장 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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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린 시절 대부분을 아테네에서 보냈으며 독일에 있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황태후를 찾아가기도 하였다. 엘레니는 영국인 유모와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친영국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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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진[1]
그러나 1909년 그리스에 쿠데타가 일어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군사 직책을 포기하였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독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11년, 그리스의 상황이 진정되어 다시 귀국할 수 있었으나, 1912년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고 1913년에는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테살로니키에서 암살당하여 아버지 콘스탄티노스가 그리스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콘스탄티노스 1세독일을 지원하였는데, 이로 인해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와 갈등을 빚었다. 더군다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폐렴에 걸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였던 엘레니 공주는 아버지의 회복을 기원하며 종교에 의지하게 되었으며, 이는 엘레니가 평생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스 1세는 정책을 바꾸는 것을 거부하였다. 결국 1917년에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3.2. 망명과 결혼[편집]


1917년, 콘스탄티노스 1세소피아 왕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를 제외한 엘레니와 형제들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이 때가 엘레니가 가장 좋아하는 오빠 알렉산드로스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이었다. 엘레니와 가족들은 스위스에 정착하였지만, 1918년에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1921년, 엘레니의 큰오빠인 요르요스 왕세자루마니아의 엘리사베트 공주[2]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엘리사베트의 외할머니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가 사망하였고 엘레니의 오빠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게 다리를 물려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엘레니는 엘리사베트 공주의 오빠인 카롤 왕세자와 대화를 나누며 그와 사랑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롤 왕세자는 엘레니에게 청혼하였지만, 엘레니의 부모는 결혼을 반대하였다. 카롤은 여자를 매우 밝히는 성격이었고 엘레니와 만나기 전 지지 람브리노라는 여성과 사이에서 아들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엘레니의 어머니 소피아 왕비의 반대가 심했는데, 엘레니가 고집을 부려 결국 결혼이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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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사진
마침 1920년 그리스 왕정이 복고되면서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위하였고, 엘레니와 가족들은 다시 그리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카롤 왕세자와 함께 그리스를 두 달 동안 여행한 엘레니는 1921년 3월 10일 아테네에서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3.3. 왕세자비와 이혼[편집]


결혼한 지 약 7개월 반 만에 1921년 아들 미하이 왕자를 출산했다.[3] 꽤나 난산이어서 제왕절개 수술을 하였으며 의사들은 더이상 아기를 갖지 말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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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미하이와 함께
행복한 신혼생활도 잠시, 튀르키예 독립전쟁으로 그리스의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고, 콘스탄티노스 1세의 건강 또한 좋지 않았다. 엘레니는 친정이 걱정되는 와중에도 공무를 성실히 수행하였지만, 남편 카롤 왕세자는 미렐라 마르코비치라는 여배우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결국 1922년 군사 쿠데타로 인해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 망명하게 되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요르요스 2세 역시 15개월의 짧은 재위 후 남동생 파블로스에게 양위하였다. 충격을 받은 엘레니는 부모가 망명한 이탈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콘스탄티노스 1세가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롤과의 관계 또한 점차 소원해졌다. 엘레니는 부부관계를 원치 않았고 카롤은 엘레니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 왕자[4]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했다. 엘레니와 카롤은 별거를 시작했지만 유일한 아들 미하이 왕자를 위해서 겉으로라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카롤 왕세자마그다 루페스쿠라는 여성과 불륜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카롤이 이전에도 외도를 저지른 적은 많았지만, 이번에는 진지한 관계였고 마그다와 대놓고 동거를 했다. 결국 카롤은 1925년 12월 28일 왕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엘레니는 남편의 태도에 분노했다. 특히 시어머니 마리아 왕비는 결혼 실패의 원인을 엘레니의 탓으로 돌렸다. 엘레니는 남편을 설득하는 편지를 쓰고 정치인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것을 연기해달라고 하였으나 이러한 제안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카롤은 마그다 루페스쿠와 결혼하기 위해 엘레니에게 끊임없이 이혼을 요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니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3.4. 카롤 2세와의 갈등[편집]


1927년, 시아버지 페르디난드 1세가 암으로 사망하여 6살의 아들이 미하이 1세로 즉위했다. 그리고 점점 카롤에게 지친 엘레니는 1928년 6월 21일에 이혼했다. 의회는 마그다 루페스쿠와 관계를 청산하고 엘레나와 화해하라는 조건 하에 미하이 1세를 격하하고 카롤 2세를 즉위시켰다.

권력을 잡은 카롤 2세아들과 재회하기 위해 엘레니를 만났다. 엘레니는 그에게 냉담하였지만 아들을 위해 잘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의회는 엘레니에게 카롤 2세와의 화해를 촉구하였고, 엘레니도 마지못해 그와 주기적으로 차를 마시는 등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의회는 엘레니를 루마니아의 왕비로 즉위시키려고 했지만 카롤 2세는 이를 거부하였고, 마그다 루페스쿠가 루마니아에 입국하면서 화해하려는 모든 노력은 끝이 났다.

1932년, 어머니 소피아 왕대비가 암으로 사망하자 엘레니는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집을 구매하여 그곳에서 거주했다. 엘레니가 루마니아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카롤 2세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으며, 끝내 카롤 2세는 엘레니를 루마니아에서 영원히 추방시켰다. 아들 미하이는 1년에 단 2개월동안 피렌체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 그리스 왕정이 다시 복고되어 큰오빠 요르요스 2세가 다시 즉위하였지만, 아내 엘리사베타[5]와 이혼했다.


3.5. 왕대비[편집]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트란실바니아헝가리 왕국에, 도브루자불가리아 왕국에 할양한데 이어 베사라비아부코비나 북부를 소련에 할양하게 되면서 루마니아의 영토가 대폭 줄어들었다. 나치 독일의 압력 속에서 카롤 2세는 점차 인기를 잃고, 1940년 9월 6일에 퇴위하여 아들 미하이 1세가 다시 즉위하였다.

미하이 1세가 즉위하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엘레니에게 폐하(Her Majesty) 칭호를 부여하고, 왕대비가 되도록 하였다. 또 그는 토스카나에 있는 엘레니가 부쿠레슈티로 돌아오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루마니아로 돌아온 엘레니는 이미 국가의 실권이 안토네스쿠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런 권력이 없는 미하이 1세는 때때로 우울해했고, 엘레니는 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으며, 안토네스쿠가 왕권을 위협할 때 그가 저항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도 했다.

1941년 루마니아가 소련 침공에 참여하면서 안토네스쿠와 왕실은 갈등을 빚었다. 미하이 1세는 공개적으로 안토네스쿠를 비난하였으며 안토네스쿠는 그 배후에 엘레니가 있다며 분노했다. 이에 안토네스쿠는 미하이 1세와 엘레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고, 더 이상 도발한다면 왕정을 폐지하겠다고 협박했다.

1944년,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하이 1세쿠데타를 일으켜 안토네스쿠를 체포했다. 미하이 1세는 나치 독일과 단교하고 연합국에 가담하였으나 루마니아가 패전국으로 분류되는 것과 소련군이 루마니아를 점령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서도 엘레니는 루마니아의 병원을 지원하는 등 여러 자선 활동을 이어나갔다.

미하이 1세는 루마니아가 공산화 되는것을 막으려 노력하였지만 결국 194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왕정은 폐지되었고, 엘레니와 미하이 1세는 루마니아를 떠나 스위스에 망명했다. 공산당은 왕족들의 전 재산을 국유화하고, 국적을 박탈시켰다.


3.6. 말년[편집]


미하이 1세가 부르봉파르마의 안 공녀와 결혼한 이후, 엘레니는 예전에 살았던 토스카나로 돌아가 그곳에서 가족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또 손녀들을 만나러 영국에 방문하고, 1962년에는 후안 카를로스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6]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등 여러 국가를 여행하기도 했다.

혼자 살기에 나이가 든 엘레니는 토스카나를 떠나 미하이 1세가 거주하고 있는 스위스 로잔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1982년 11월 28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로잔의 부아드보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37년 후인 2019년에 루마니아 쿠르테아데아르게슈의 왕실 성당으로 이장됐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 공주
(Princess Helen of Greece and Denmark)
콘스탄티노스 1세
(Constantine I)
요르요스 1세
(George I)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러시아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na of Russia)
러시아의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Nikolaevich of Russia)[7]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공녀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프로이센의 조피 공주
(Princess Sophia of Prussia)
프리드리히 3세
(Frederick III)
빌헬름 1세
(William I)
작센바이마르아이젠나흐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Saxe-Weimar-Eisenach)[8]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미하이 1세
(Michael I)
1921년 10월 25일
2017년 12월 5일
부르봉파르마의 안 공녀[9]
슬하 5녀[10]


5. 여담[편집]


  • 말년[11]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예술과 원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연인 관계가 되었는데,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청혼했으나 엘레니가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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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른쪽 위가 엘레니다.[2] 페르디난드 1세의 장녀다.[3] 정황상 혼전임신인듯 하다(...)[4] 여동생 이리니 공주의 시숙이다. 단, 이리니 공주가 아마데오 왕자의 동생 아이모네와 결혼한 것은 한참 후인 1939년이다.[5] 엘레니에게는 전 시누이기도 하다.[6] 남동생 파블로스의 큰 딸이다.[7] 니콜라이 1세의 차남이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외손자이다.[8] 파벨 1세의 외손녀이다.[9] 부르봉 왕조 참고. 치타 황후의 조카이자 룩셈부르크 장 대공의 사촌[10] 루마니아의 마르가레타[11] 1968년부터 구스타프 6세가 사망한 1973년까지. 엘레니는 진작에 남편과 이혼했고(그 전남편도 이미 사망), 구스타프 6세는 두번째 부인 루이즈 마운트배튼과 사별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