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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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권세연(權世淵)
자 / 호
조원(祖源) / 성대(星臺)
본관
안동 권씨[1]
생몰
1836년 ~ 1899년 12월 10일
출생지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현 유곡리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2]
사망지
경상북도 봉화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권경섭은 그의 손자이다.

2. 생애[편집]


권세연은 1836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현 유곡리(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서 시골 유생인 아버지 권진하(權鎭夏)와 어머니 의성 김씨 김재익(金在翼)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권우연(權友淵)이 있었다. 그는 안동에서 학문에 정진했으며, 1870년(고종 7) 식년시 생원시에 3등 57위로 급제하였다.# 1890년(고종 27) 7월 18일 숭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같은 달 23일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한 후, 1896년 1월 초 수백 명의 의병이 안동에 모여서 안동의 관찰사부(觀察使府)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으니,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달아났다. 이후 김흥락(金興洛)과 유지호(柳止浩) 등을 중심으로 한 의병 참모진에서는 권세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이상오(李尙五)를 좌익장(左翼將)으로 임명하는 등 부서를 정하니 진용이 차츰 정비되었다. 권세연은 격문을 각처 의병과 각 지방으로 보내어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인심을 격려, 고무했다. 한편, 그는 곽종석에게 부대장 직에 임명할 테니 함께 하자고 제안했지만, 곽종석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며 임금에게 대항하는 격이 되니 안 된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그는 문경의 이강년, 영양의 조승기(趙承基)[3], 제천의 유인석, 예안의 이만응(李晩應), 그리고 김도화, 김도현 등 각지의 의병장들과 상호 긴밀한 연결을 갖고 북진을 꾀했다. 그러나 1896년 1월 28일 안동 관찰사 김석중이 지방과 서울의 관군을 규합한 뒤 안동부로 쳐들어오자, 권세연은 결사 항전했으나 의병의 전투력이 너무 약하여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고, 결국 1월 29일 안동부를 내주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권세연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의병장 직을 사퇴했고, 김도화가 그를 대신해 대장을 맡았다.

그 후 자택에 은거한 그는 몇년 후 병세가 깊어지자 차남 권상규(權相圭)[4]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일찍이 감히 의병장에 임명되어 나라의 원수를 통설(痛雪)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내가 죽더라도 명(銘)을 쓸 경우 진실로 창의한 일에 대해 떠벌려서 확대시키지 말라.


그로부터 얼마 후인 1899년 12월 10일 사망하니, 향년 64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권세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복야공파 두경(斗經)1계 32세 연(淵) 항렬.[2]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권성기 전 국회의원과 독립유공자 권경섭·권상익·권영섭·권차응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시인 조지훈의 증조부이다.[4] 독립유공자 권경섭의 숙부이다.